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15)
그날 오후.
한민국이 몰던 차가 여의도의 한 커피숍 앞에서 멈췄다.
도훈이 문을 열며 말했다.
“얼마 안 걸릴 테니까, 근처에서 기다려. 뭐, 배고프면 당기는 거 먹고 있고.”
“그런데 여긴 왜 오신 거예요?”
“흠, 그건 비밀이라고 할까나!”
“아, 알겠습니다. 원래 이 바닥이 비밀이 많은 거죠.”
“뭐, 그렇지.”
어색하게 웃은 도훈은 커피숍으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본 한민국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진짜 오전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오전에는 도훈의 친구인 박경민이 있는 태청 그룹 본사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론가 전화하더니 누군가를 소개받았다.
그 후 찾아온 것이 여의도였다.
연예기획사에서 여의도를 찾아오는 것이 뭔 대수냐 싶지만은 뭔가 은밀한 분위기가 풍기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한민국의 의심 가득한 시선을 뒤로한 채 도훈은 여의도의 한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얇은 체크무늬 재킷에 청바지 차림의 여자를 본 도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피디님, 여기입니다.”
도훈이 손을 흔들자 청바지에 포니테일 머리를 한 여자가 놀란 얼굴을 하며 다가왔다.
그녀가 천천히 걸어오더니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물었다.
“혹시?”
“네, 맞습니다. 경민이가 소개한 이도훈이 바로 접니다.”
도훈이 활짝 웃었다. 그가 말한 경민이란 얼마 전 통화했던 그의 친구였다.
“음, 그런데 저를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여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도훈을 마치 취재 대상 보듯 관찰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눈빛이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스쳐 지나가자 도훈은 오싹한 느낌마저 받았다.
생각해 보니 살짝 실수한 것 같았다.
전생에는 아는 얼굴이지만, 아직까지는 마주친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도훈이 활짝 웃으며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뭐, 이 바닥 생활 삼 년이면 누가 어떤 파트인지는 대충 감으로 때려 맞히죠. 이거 제 명함입니다.”
도훈은 재빨리 실장이라 찍혀 있는 명함을 건넸다.
기획사의 명함을 본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지갑에 도훈의 명함을 넣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네, 제 명함은 여기.”
명함을 받은 도훈이 이름을 확인했다.
[사건 수첩 기자 한지혜.]
명함과 얼굴을 번갈아 보던 도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피디라는 직업보다는 기자라는 신분을 더 자랑스럽게 여기는 한지혜는 역시 전생과 변함없었다.
도훈의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 한지혜가 물었다.
“그런데 저를 왜 보자고 하셨나요?”
“이거 한번 보시죠.”
도훈은 마이크로SD 칩 하나를 내밀었다.
그녀는 앞에 있는 칩을 보고는 만지기 싫다는 듯 팔짱을 꼈다.
“이게 뭐죠?”
“바이러스는 없으니 편안히 노트북에서 보시죠.”
“음, 지금 저랑 장난하자고 여기까지 오신 건 아닐 테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거기 모두 넣어 놨습니다. 혁수가 소개한 사람이면 이런 장난 칠 사람은 아니잖아요. 저 말고 혁수를 믿어 보세요.”
“흠, 그렇게 말씀하신다니 일단 확인은 해 보죠.”
“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커피는 제가 테이크 아웃으로 주문해 놨으니 번호 부르면 찾아가세요.”
도훈은 번호표를 쓱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한지혜가 번호표를 보고 눈을 가늘게 뜰 때 도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어디가…….”
“꼭 확인하세요! 참, 제가 핸드폰 전원이 다 돼서 지금은 전화 못 받을 거예요.”
다급히 빠져나가는 도훈을 한지혜는 멍하니 봤다.
그것도 잠시, 기자 특유의 감이 그녀를 자극했다.
그녀는 재빨리 마이크로SD를 핸드폰에 넣어 도훈이 전한 내용을 확인했다.
꽤 많은 기사 스크랩과 동영상, 그리고 몇몇의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다.
뭐지?
동영상을 재생하던 한지혜의 눈이 커피잔만큼 커졌다.
한지혜는 재빨리 동영상을 끄고 도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 뚜,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아이, 씨!”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나간 도훈을 쫓으려 밖을 보았다.
도훈은 어찌나 빨리 사라졌는지 그림자도 찾지 못했다.
그제야 도훈이 나가면서 배터리가 다 됐다고 한 것이 기억났다.
“에휴, 뭔가 당한 것 같기도 하고…… 오늘따라 단 게 당기네.”
그녀가 한숨을 내쉴 때였다.
커피숍 직원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36번 고객님, 36번 고객님!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36번 고객님.”
고개를 힐끔 돌려 보니 그곳에는 커피와 도넛 그리고 마카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적어도 10명분은 되어 보이는 양.
그 와중에도 직원은 계속 번호를 불렀다.
주문대를 가득 채운 커피와 간식에 한지혜가 피식 웃었다.
“누군데, 이렇게 안 찾아가?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걸로만 시켰네.”
“36번 고객님! 주문하신 음료 포장 준비됐습니다. 36번 고오객님!”
직원의 샤우팅이 커피숍 내부에 작렬했다.
그도 그럴 것이 10인분은 되어 보이는 양 때문인지 주문대를 가득 채우는 바람에 다른 음료를 올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쯧.”
한지혜가 혀를 차며 자신의 테이블을 봤을 때였다.
자신의 앞에 놓인 번호표의 숫자를 보았다.
[36번.]
순간 한지혜는 창밖과 주문대에 쌓인 커피와 간식을 번갈아 봤다.
황당하다는 듯 주문대로 달려간 한지혜의 눈이 한 단계 더 커졌다.
도넛 하나 마카롱 하나에도 자신의 취향과 정확히 일치했다.
거기에 나온 커피의 휘핑크림 양과 토핑 종류까지 말이다.
포장된 간식을 들고나온 한지혜가 혼잣말을 뱉었다.
“쟤 진짜 뭐냐?”
황당함도 잠시 한지혜는 본능적으로 커피에 빨대를 꼽고 후르르 내용물을 들이켰다.
“카페인이 들어가니 좀 정신이 나네.”
* * *
승합차 안으로 도훈이 돌아오자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한민국이 벌떡 일어났다.
“아, 오셨습니까?”
“피곤하면 더 자도 돼.”
“제가 언제 잤다고 그러십니까?”
“침이나 닦고 말해.”
“아, 침이…….”
“농담이니까, 이거나 먹어.”
도훈이 커피를 내밀자 한민국이 본능적으로 커피를 받았다.
“그런데 누굴 만나고 오신 겁니까?”
“이 명함의 주인.”
도훈이 한지혜가 준 명함을 보여 줬다.
힐끔 명함을 본 한민국이 커피를 탁 소리가 나게 홀더에 놓았다.
“사건 수첩 피디를 왜 만나고 왔어요? 혹시 미라클 찌르시게요?”
“내가 왜 내부에 대고 총질을 해?”
“그럼 혹시…….”
말끝을 흐린 한민국의 눈가가 진도 5에 가깝게 강하게 흔들렸다.
“왜 그래? 혹시 다른 거 안 사 왔다고 따지는 거야?”
“그게 아니고 혹시 경쟁 상대를 저격하시는 건 아니죠?”
“너는 뭘 보고 자랐기에 계속 찌른다느니 저격한다느니 그러는 거야?”
“아니죠? 진짜 아니죠? 저 이지유 님 팬이라고요. 지난번 시디 40장 사고도 팬싸 떨어져서 시무룩했는데…….”
“네가 이지유 팬이었어? 지난번에는 다른 아이돌 이름 댄 것 같은데?”
“아니에요, 지유 님이 제 최애라고요.”
“흠, 기억해 둘게.”
도훈은 씩 웃으며 태블릿 피시를 들었다.
지금의 웃음은 진심이었다.
전생에는 보지 못한 한민국의 모습이었으니까.
하긴, 이런 진심을 볼 만큼 그때는 오랫동안 같이 있지도 않았다.
* * *
같은 시간 부사장실.
―메시지 왔습니다! 메시지 왔습니다!
알림음에 김민석은 다급하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톡톡 화면을 터치하자 메시지가 열렸다.
내용을 확인하던 김민석의 눈이 커졌다.
지금 온 것은 다름 아닌 프레젠테이션 관련 파일을 보냈으니 당장 확인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김민석은 재빨리 도훈에게 전화했다.
―뚜, 뚜,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핸드폰에서는 황량한 안내 음성만이 울려 퍼졌다.
집안싸움을 해결하라고 전화했더니 자신에게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하라니?
이때까지만 해도 설마설마했다.
그런데 이제 파일까지 보내온 것이었다.
진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뭐, 유레카의 이익을 지킬 수만 있다면야 프레젠테이션이 아니라 춤이라도 출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로 먹힐 상황이 아니었다.
씁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신 김민석이 마지못해 파일을 확인했다.
“음…….”
김민석은 입맛을 다셨다.
누굴 시켜서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제법 구미가 당기는 도입부였다.
그것도 잠시, 김민석의 눈이 커졌다.
“쓰으벌, 이게 대체…….”
빌어도 시원찮은데 자료의 내용을 보면 이건 싸우자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도훈이 미라클 내부에서 가지는 지위에 대해서 회의적인 김민석이었다.
이 내용 그대로 발표한다면 다른 배우들의 광고도 날아갈지 몰랐다.
게다가 이 말도 안 되는 대응 방안은 꽤나 구체적이었다.
거기에 더해 정여진이 직접 찾아오면 취해야 할 대처 방안까지 적어 놓았다.
이건 뭐…….
혹시 정신병자?
정여진이 기획사를 찾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면 해결될 때까지 일부러 연락을 피하는 성격이었다.
그것은 자존심이 강한 정여진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런데 젊은 대표는 정여진이 찾아온다고 생각하고 응대 방향까지 지시를 내린 것이다.
“아, 미치겠네! 진짜 더러워서…….”
김민석은 말을 맺지 못했다.
더러워도 버텨야 했다. 그것이 일찍 세상을 뜬 아내와 약속을 지키는 길이니까.
김민석이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을 때였다.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살짝 보이는 머리칼.
그러고는 문틈 사이로 누군가의 손이 스윽 들어왔다.
김민석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손과 머리칼의 주인이 누군지 대충 감을 잡았기 때문이다.
김민석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들어오세요.”
그의 말에 문이 활짝 열리고 드문드문 새치가 보이는 여인이 들어왔다.
포근해 보이는 인상에 단아하게 튼 머리.
나이에 걸맞게 잔주름은 있었지만, 그 잔주름마저도 그녀의 인상에는 플러스였다.
그녀는 다름 아닌 국민 엄마라 불리는 정여진이였다.
“아, 본부장님 계셨네요. 제가 들어와도 되는지 잘 몰라서요. 약속도 잡지 않았는데…….”
“아니, 언제는 약속 잡고 오셨나요? 제집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오셔도 됩니다.”
“그래도 승진하셔서 바쁘실 텐데 이렇게 오는 게 실례일 수도 있고…….”
“아닙니다, 언제든 오십시오, 선생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해요. 오늘 제가 여기에 온 건 궁금한 게 있어서 왔는데 물어봐도 되겠죠.”
순간 김민석은 도훈이 보내온 메일을 떠올렸다.
어차피 달아날 목이라 생각한 김민석은 도훈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최대한 표정을 수습한 김민석이 말했다.
“얼마든지요, 광고 문제라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로요?”
정여진이 눈을 크게 뜨자 김민석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저희로서도 미라클의 대처가 조금 짜증 나기는 합니다. 선생님이 여기 계실 분입니까? 건강만 회복하시면 저 멀리 보고 달리셔야 할 분 아닙니까? 저희도 거기에 보조를 맞추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