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3)
도훈의 수다 덕분인지 일반 연수생들과의 문턱은 많이 없어졌다.
그들은 이제 도훈의 농담에 살짝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하하, 재미있는 분이군요.”
“헤헤, 조금 재미있다는 얘기를 가끔 들어요.”
“그런데 이도훈 본부장님은 반찬을 그렇게 다양하게 담았나요?”
“여기 들어오는데 경비 아저씨가 편식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하하, 그게 진짜 이유입니까?”
“네, 그게 진짜 이유에요.”
도훈은 한 점 거짓도 없다는 듯 활짝 웃으며 사람들을 바라봤다.
역시 이들 중에는 경비 아저씨의 정체를 아는 이가 없는 것 같았다.
경비 아저씨의 조언은 어찌 보면 진짜 힌트였다.
도훈은 그 힌트를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해 준 것이고 말이다.
물론 도훈이 건넨 힌트에 대해서 귀 기울여 듣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첫 번째 식사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첫 번째 시험이 다가왔다.
* * *
연수원의 대회의실.
누군가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걸어온다.
구두 굽 소리의 주인은 여인.
걸음걸이만으로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것이 완벽한 회사원의 표상처럼 보인다.
그녀는 미라클 그룹의 인사 팀장 설미현이었다.
단상에 오른 그녀는 주위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이번 과정에 입소하신 걸 축하드려요. 지금 나눠 줄 문제지는 여러분의 진급을 평가하는 도구가 아니에요. 그저 적성 검사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최대한 솔직하게 적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설명은 간단했다.
시간 내에 적성 검사지를 풀고 제출하면 끝이었다.
첫 번째 종이 울리면 시작.
두 번째 종이 울리면 적성 검사지의 작성을 끝내고 제출하면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시간은 60분이지만, 문항이 무려 200개라는 데 있었다.
시험 설명 도중 도훈은 손을 들었다.
“답안지를 잘못 적으면 어떻게 되나요?”
“이 앞에 여분의 답안지를 둘 테니 아무 때나 나와서 가져가시면 돼요.”
인사팀장 설미현이 앞쪽의 책상을 가리켰다.
시험의 감독감이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이야기였다.
문제지를 나눠 준 그녀가 나가자 이도준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도훈이 고개를 갸웃하며 보자 이도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훈아, 이번에도 부탁한다.”
“네, 알았어요. 저만 믿으세요.”
도훈이 활짝 웃었다.
어찌 전생과 저리 똑같을까, 하는 비웃음이었다.
이도준은 항상 저랬다.
돌봐 준다는 명목하에 시험지까지 약탈해 갔다.
땡. 땡.
시험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훈은 앞으로 나가 답안지를 가져왔다.
전생에도 있었던 일이었다.
도훈은 두 개의 답안지를 작성해야 했다.
그중 완벽한 하나는 이도준에게 바쳐야 했다.
자리로 돌아온 도훈은 재빨리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툭. 툭.
컴퓨터 수성 사인펜이 답을 찍는 소리가 기계처럼 울렸다.
60분에 200문항이라는 조건에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한 문제를 확인하는 데 주어진 시간은 고작 20초 남짓.
시간이 오 분도 안 남은 상황에서 이도준이 다가왔다.
“다 됐어?”
“여기요.”
도훈은 답안지를 넘겨줬다.
이도준은 답안지를 받는 즉시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그러고는 도훈의 답안지를 바라봤다.
아직 깨끗한 도훈의 답안지를 본 이도준은 어깨를 으쓱하다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뒤 바로 종이 울렸다.
땡. 땡.
종이 울리자 설미현 팀장이 다시 들어왔다.
“답안지를 제출하고 가시면 됩니다.”
그녀의 말에 모두는 답안이 적힌 카드를 제출하고 나갔다.
모두가 나가자 설미현 팀장은 회의실의 구석구석을 바라봤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조그마한 카메라가 렌즈를 빛내고 있었다.
실미현 팀장은 카메라를 향해서 살짝 고개를 숙인다.
그러고는 일곱 개의 답안지를 확인했다.
답안지를 천천히 넘기던 설미현 팀장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다시 한번 카메라를 바라봤다.
* * *
대부업계의 큰손이자 미라클 그룹의 회장인 장경자의 방.
그녀는 자신의 비서와 함께 팝콘을 들고 벽면의 스크린에서 재생되는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수원의 카메라를 통해 장경자는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미현 팀장의 이야기대로 답안지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다만 답안지를 작성하는 도중의 행동이나 인간관계가 임원 후보가 되느냐 마느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장경자는 답안지가 아닌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
시험이 끝나자 그녀의 비서가 불을 켰다.
실내조명이 켜지자 벽면의 스크린에 흐릿해졌다.
그때였다.
장경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엄 비서야, 저 설 팀장 표정이 왜 그러지?”
“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답안지를 확인하는 설 팀장 표정이 조금 이상하지 않나?”
“제가 확인해 볼까요?”
“그건 마지막 날 확인하고 엄 비서는 다른 중요한 업무를 처리해야지.”
“이거 말고 더 중요한 업무가 어디 있어요.”
“엄 비서야.”
“네, 회장님.”
“강영웅 콘서트 티켓 예매가 오늘 저녁이잖아. 그거 말고 중요한 게 어디 있나?”
“앗, 그거 제가 말씀 안 드렸네요. 소속사와의 문제 때문에 콘서트 취소됐어요.”
“이런…….”
장경자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 모습에 비서 엄지연은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었다.
대한민국 제일의 큰손이 저렇게 소박한 덕질을 한다고 누가 상상이나 할까.
사실 장경자의 취미는 그녀의 자식들도 잘 몰랐다.
* * *
연수원의 임원 후보 과정은 어느덧 막바지로 치달았다.
그들 중 가장 이상한 행동을 보인 것은 도훈이었다.
도훈은 교육 과정은 겨우겨우 눈만 뜬 채 버텼고.
나머지 시간은 연수 과정이 입소한 동료들과 시간을 보냈다.
이도준은 그런 도훈이 탐탁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연수 과정을 평가할 중요한 시험이 있었다.
그 시험에서 자신의 답안지를 작성해 줘야 할 도훈이 저러고 있으니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꾸벅꾸벅 조는 도훈을 본 이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 한숨과 함께 교육의 마지막 시간이 끝났다.
이도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도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도훈! 나 좀 보자.”
“네, 형님.”
“마지막 시험은 그냥 내가 할 테니, 신경 쓰지 마.”
“제가 대신…….”
“아니야, 괜찮아. 이제까지 도와준 것만 해도 괜찮아.”
“그럼, 할 수 없죠.”
도훈은 손을 흔들었다.
그다음 날.
연수원의 마지막 과정인 평가가 시작되었다.
인사팀장 설미현의 장황한 설명이 끝나자 이도준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지난번의 설명과는 확실히 달랐다.
이번 평가의 결과에 따라 임원 후보의 선정이 좌지우지된다고 했다.
이도준은 도훈에게 이번 시험을 맡기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도준이 도훈에게 시험을 부탁하는 것은 자신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도훈에게 갈 기회를 뺏기 위해서였다.
이도준이 보기에는 도훈은 모난 돌이었다.
모난 돌은 정으로 찍어 내야 하는 게 세상의 진리.
그때였다.
땡. 땡.
시험의 시작종이 울리자 이도준은 시험지를 펼쳤다.
순간 이도준의 눈이 커졌다.
예상도 못 한 문제가 나왔기 때문이다.
일주일 내내 들었던 경영학이나 회계 관련 문제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이건 문제가 아니었다.
김현조 부장의 자녀는 몇 명일까요?
…….
장정문 부장이 사는 동네는?
정성형 차장의 취미는?
…….
이건 마치 누가 호구 조사를 잘했는지를 평가하는 문제 같았다.
시험 시간이 5분여 남았을 때였다.
이도준이 도훈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답안지를 바라봤다.
역시나 백지였다.
이도준은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땡. 땡.
시험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역시나 설미현 팀장이 들어왔다.
“이제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가셔도 좋아요.”
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답안지를 제출하고 자리를 떠났다.
답안지를 넘기던 설미현은 눈을 크게 떴다.
“대체 이건…….”
* * *
임원 후보 선발을 위한 연수 과정이 끝난 다음 날.
미라클 그룹의 회장실은 오래간만에 북적거렸다.
회장실의 커다란 테이블에는 일곱 명의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몇몇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미라클그룹 본사의 부장인 김현조도 마찬가지였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왜 여기에 연수 과정에 참석한 이들이 모두 모여 있냐는 것이었다.
김현조 부장은 이도준과 이도훈을 평가하라는 지시를 받고 연수 과정에 참가했다.
그 지시를 받은 것은 자신밖에 없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모두가 이도준과 이도훈을 평가하기 위해 입소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김현조 부장은 이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는 것이 난감할 따름이었다.
거기에 설미현 인사팀장이 자리한 것은 이해하지만, 연수원의 경비 아저씨까지 와 있었다.
이것은 김현조 부장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김현조 부장이 경비 아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회장실의 문이 열렸다.
동시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들이 모두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회장님 평안하셨습니까?”
…….
줄줄이 이어지는 인사에 장경자는 손을 휘휘 저었다.
“다들 앉아.”
말을 마친 장경자는 자리에 앉아 참석한 사람들을 확인했다.
이번 평가에 필요한 인원들은 모두 모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장경자의 시선이 경비에게 멈췄다.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박 이사, 그동안 잘 지냈어?”
“회장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둘의 대화에 시선이 바삐 움직였다.
경비 아저씨에게 박 이사라고 하자 그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때 장경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둘 중에 어떤 놈이 나아 보여? 박 이사.”
“이도훈 본부장입니다.”
“어떻게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말하지?”
“이도훈 본부장은 사람을 알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에 비해…….”
박 이사라 불린 사람은 쉴 틈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장경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 이사는 미라클의 창업 멤버였다.
젊은 시절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장경자의 칼이 되어 행동했던 사람.
덕분에 그룹 사람들은 그를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보다 미라클 그룹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은퇴하고 연수원에서 휴양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 부탁으로 도훈과 이도준을 평가하게 된 것이었다.
이번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임원의 자질이었다.
장경자가 보는 임원의 자질이란 한마디로 노력이었다.
사람을 알아보려는 노력!
그것이 있어야 돈을 지킬 수 있었다.
설명을 듣고 난 장경자는 이번에는 설미현을 바라봤다.
“시험 결과지 줘 봐, 설 팀장.”
“여기 있습니다.”
설미현은 서류 두 장을 내밀었다.
그곳에는 첫날과 마지막 날 제출한 시험의 결과가 나와 있었다.
첫 번째 결과를 살피던 장경자가 눈을 크게 떴다.
“설 팀장, 이거 잘못된 거 아닌가?”
“아닙니다, 몇 번이고 확인했습니다.”
“흠.”
장경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답안지를 다시 확인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