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7화
제227화 우리가 만들어 갈 나라
포르센 항구에 접안한 나는, 간만에 육지를 밟을 수 있었다.
“……희, 흰 사자?”
나를 발견한 시민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모두가 나를 알아보았다.
흰 사자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흰 사자가 제국을 종단하고 있다는 건 모두 알고 있었을 터였다. 나의 칼끝이 황제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는 것도 알았을 테지.
그런 내가 이곳에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황제가 서거했다는 정보는 나보다 앞서 제국군에 도착했을 터.
지금은 수뇌부 정도만 알고 있을 확률이 높지만, 내가 왔다는 소문이 퍼지면 다들 자연스레 황제의 죽음을 유추할 수 있을 거다.
나의 실패를 예상하는 자들도 있겠지만, 결국 모두 진실을 알게 되겠지.
그의 죽음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나의 생존이 될 테니까.
나의 존재감은 적, 아를 구별하지 않고 무거웠다.
나로 인한 큰 소요가 있을 터였다.
프렌치아로 돌아오는 길에 체력은 충분히 회복을 했다.
황제를 베고 다시 프렌치아로 향하는 배를 타기까지.
솔직히 무리한 움직이었다.
황궁을 홀로 뚫고 들어가 황제까지 상대했다.
거기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제국을 횡단하여 항구에 닿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
하나, 긴 항해 동안 몸 상태는 다시 최상으로 회복된 상태.
파밧.
나는 가볍게 땅을 밀어내며 신형을 옮겼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매우 간단하다.
내가 프렌치아에 온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게 첫 번째고.
적의 후미를 최대한 빠르게 잡는 것이 두 번째다.
나는 전선이 형성되어 있을 내륙을 향해 힘껏 내달렸다.
* * *
흰 사자가 돌아왔다.
하나의 문장이 들불처럼 프렌치아 전역으로 번져 갔다.
제국군의 군영 또한 거센 소란이 이는 것은 당연한 바였다.
황제의 죽음은 소수의 지휘관만이 알고 있던 사실.
그 상황에 제국을 종단하던 흰 사자가 프렌치아에 멀쩡히 그 모습을 드러내다니.
동요가 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도망쳐 온 것이겠지?”
“하긴. 혼자서 어찌 황제를 위협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이제 이 전장으로 오는 건가?”
“얼마나 강하려나.”
“아무리 흰 사자라도 이 많은 병력을 상대로 무얼 하겠어.”
“그런데…… 흰 사자, 황궁으로 가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너무 멀쩡히 돌아온 거 아니야?”
“헛! 그럼 설마 황제 폐하께서-.”
“어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아니, 요새 분위기가 영 이상하기도 하고…….”
“그냥 포기하고 도망쳐 온 거겠지.”
부정하려 해도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벌써 일주일째 이유 모를 대기만 하고 있었다.
적의 성벽이 빤히 눈앞에 있음에도 그랬다.
무언가 사달이 나긴 할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와중에 흰 사자의 복귀라니.
이래저래 동요가 이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흰 사자가 황제의 목을 베고 왔다고 여기는 자들은 극소수였다.
황제가 서거했다는 이야기가 은밀히 돌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병사는 그것을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하고 있었다.
흰 사자가 암살을 실패하고 도망쳐 왔다는 게 당연했으니까.
지휘부로부터 철군 명령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지금부터 철군을 시작한다!”
적들의 저지선이 눈앞에 있었다. 그 성벽은 높지 않았다. 언제든 넘어설 수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철군 명령이 내려졌다.
“…….”
무슨 사달이 났음을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철군을 준비하는 제국의 군영에 찬바람이 불었다.
다들 쉬쉬하고 있었지만, 철군의 이유를 알았다.
황제의 죽음.
하늘과 같던 황제가 서거한 것이다.
제국의 하늘이 무너졌다.
그것도 프렌치아의 검에 의해.
다들 엄청난 충격에 말을 잃었다. 누구도 쉽사리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말하는 순간, 그것이 완전한 사실이 될 것 같았다.
제국군의 분위기는 깊게 침전되어 가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그 광경이 믿기지 않는 건 프렌치아의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제국군이 철수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적의 기만일 거라고 경계하던 분위기가 점차 누그러지며 설마 하는 기대가 고개를 들었다.
흰 사자의 등장과 제국의 철수.
두 개의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흰 사자가 황제의 목을 벤 것이다.
“우와아아아-!”
길게 늘어선 성벽.
그 위에선 병사들이 멀어지는 제국군을 보며 일제히 함성을 질러 대고 있었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제국군이 썰물처럼 빠지고 있었다.
“프렌치아 만세-!”
“우리가 해낸 거라고-!”
“이겼다아-!”
“우와아아아-!”
다들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눈물, 콧물을 뽑아냈다. 프렌치아에 드리워 있던 먹구름이 걷히는 듯했다.
“빌어먹을 자식. 내 이럴 줄 알았지.”
미친 듯이 환호하는 병사들 사이에서 네더만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는 제네스의 검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았기에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흰 사자가 황제의 목을 벨 것이란 걸.
역시나 그것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홀로 황제의 목을 베다니.
정말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한 명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무력이 아니었다.
벽을 넘어 보니 더 확실히 알겠다.
이 자식이 얼마나 괴물 같은 놈인지.
소드 마스터가 되었음에도 격의 차이가 좁혀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자신이 성장할수록 오히려 더욱 거리를 벌리는 검력.
그렇게나 말이 안 되는 검이었다.
그 자식의 검은.
그러니 혼자서 이런 일도 벌일 수 있는 거겠지.
프렌치아의 완전한 독립을 네더만은 느끼고 있었다.
이제 프렌치아는 과거의 평안과 안정을 되찾을 것이다.
모든 국민이 바라 마지않던 일.
네더만은 환호에 잠겨 있는 전장 속에서 자신의 고동 소리를 선명히 들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굽이치는 해협의 간부로 지내 왔지만, 사실 프렌치아의 독립을 간절히 원한 적은 없었다.
그저 카드론과의 인연으로 그 길을 걸어왔던 것뿐이니까.
지금도 그렇고.
그런데 영 마음이 없던 건 또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 뛸 듯이 기쁜 걸 보면.
네더만은 목이 터져라 함성을 내지르며 울고 있는 알렌을 보고 입꼬리를 더욱 길게 찢었다.
“우와아아아아-!”
알렌은 그야말로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이들과 얼싸안으며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만끽했다.
마그네트를 수복하고 지난 3년간 프렌치아의 독립을 맛봤지만, 한편에는 항상 짙은 그림자가 머물러 있었다.
웃고 있을 때도, 평안에 잠겨 있을 때도 언제나 마음 한구석은 불안했다.
금방이라도 깨져 버릴 것만 같은 위태로운 평안.
소중한 유리그릇같이 느껴졌던 나날들이었다.
제국이 들이닥칠 일만 남아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막, 그마저도 끝이 났다.
그토록 바라던 프렌치아의 승리로.
완전한 종전이었고, 완연한 독립이었다.
“제네스 니이임-!”
알렌은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린 채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제네스가 눈앞에 있다면 부둥켜안고 뽀뽀라도 퍼붓고 싶은 심경이다.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그에게 중요치 않았다.
벅찬 감동이 몸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크허어어어어!”
함성을 지르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격렬한 고양감이었다.
목구멍에서 절로 거친 그로울링이 터져 나온다.
정말이지 수천 번을 그려 왔던 순간이었다.
그토록 바라 왔던 승리였다.
제네스를 만나고 그려 보았던 이 이야기의 끝이, 마침내 현실이 되어 눈앞에 있었다.
자신이 원하던 그 모습 그대로.
“제네스 니이이임-!”
알렌이 울부짖으며 승리를 만끽하던 때, 제국의 철군 소식이 아직 닿지 않았음에도 레이크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제국의 군대는 곧 프렌치아에서 완전히 철군하게 될 겁니다.”
“그렇겠지.”
루시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시계탑에 올라 한눈에 담기는 마그네트의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완전히 우리의 것이 됐어.”
담담히 흐르는 루시안의 목소리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멸문한 가문을 뒤로하고 주르아든 왕국으로 넘어가 팔레이트 상단을 일구고, 북부의 흰 사자를 세웠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긴 여정에는 수없이 많은 좌절과 울분과 죽음이 피어 있었다.
채 꽃을 피우지 못한, 그토록 바라던 결말에 닿지 못한 많은 죽음들.
그리고 지금도 전장에서 죽어 가고 있을 국민들.
그들이 남겨 놓은 의지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목숨값이 어깨 위에 얹혀 있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결코 이 지난한 길을 결코 완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까운 이들을 잃을 때마다, 동료들이 작전을 수행하다가 죽어 갈 때마다.
주저앉고 싶기도 했고, 도망치고 싶기도 했으며, 그만 편해지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끝 모르게 이어지던 험지를 건너 지금에 다다랐다.
“그동안 고생했다.”
레이크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뜻을 함께한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곧 녀석도 볼 수 있겠네.”
제네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륙 제일의 검.
대륙 제일이라는 수식어로도 담아내기 부족한, 세계를 압도하는 검.
그것이 손에 쥐어졌기에 지금의 결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도 훨씬 빠르고 예상보다도 훨씬 완벽하게.
이로써 프렌치아는 제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이제 제국의 정세는 거센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터였다.
홀로 모든 왕국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비대했던 힘이 중심을 잃었다.
그들의 칼끝은 꽤 오랫동안 바깥을 향하지 못할 터였다.
이제 자신들은 프렌치아의 국정 운영에 집중할 수 있을 테지.
내실을 다지고 국력을 키워 그 누구도 얕보지 못하는 나라를 만드는 동시에, 국민을 위한 나라를 만들어야 했다.
“이제 진짜 시작이네요.”
레이크의 말이 맞았다.
이제야 그 출발선에 선 것이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고민이 아닌,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고민.
국민을 위해 왕으로서 던져야 할 질문들과 해결해 가야 할 고민들.
이제 그것을 온전히 마주하고 나아갈 수 있다.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 왔던 나라를 위해서.
‘지켜봐 주십시오.’
루시안의 시선이 도심을 떠나 푸른 하늘을 향했다.
프렌치아를 위해 진심을 다했던 모든 이들에게.
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그리고 함께 꿈을 그렸던 자신의 왕이자 친우였던, 제네스 쿤 프렌치아에게.
보여 줘야 했다.
‘우리가 만들어 갈 나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