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6화
제226화 걷히는 그림자
전장이 이곳저곳에서 가열하게 타올랐다.
마그네트로 향하는 제국군을 막기 위해 놓인 촘촘한 저지선들.
오직 제국의 침략만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성벽들이었다.
지난 3년간 국민 모두가 힘을 모아 쌓아 올린 것이기도 했다.
“후퇴하라!”
“퇴각해!”
하나, 그것들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제국의 공세는 거셌다. 드높은 파도처럼 그대로 밀어닥쳐 성벽을 휩쓸고 지나갔다.
전선은 계속해서 뒤로 밀렸고, 도시로는 계속해서 패전의 소식만이 전해졌다.
“이러다 정말 끝장나는 거 아닌가 몰라.”
“흰 사자는 언제 온대?”
“온다고 달라지겠는가. 병력이 초원의 들풀만큼 깔렸다는데.”
선방을 기대했던 국민들의 불안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갔다.
기다리는 승전 소식은 한 번을 들려오지 않았다.
모두 필사적으로 막고 있음에도 그랬다. 저지선은 가파르게 무너져 갔다.
단단히 쌓아 올린 성벽만으로는 병력의 질과 차이를 메꾸기에 한참 부족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아니, 그게 참말인가?”
“그렇대도. 프렌치아에 또 하나의 검이 생겼단 말일세!”
“내가 전부터 그러지 않았나! 흰 사자만 없다면 용 사냥꾼이 프렌치아 제일이라고!”
상기된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계속되는 패전 속에서 피어난 한 줄기 빛이 그들을 들뜨게 하고 있었다.
프렌치아에 새로운 소드 마스터가 등장한 까닭.
소드 마스터의 존재는 국가의 국력을 의미한다.
프렌치아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이어 새로운 소드 마스터까지 보유하게 된 것이다.
이번 전장만 무탈하게 이겨 낼 수 있다면 프렌치아의 국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 소식에 모두가 기뻐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니, 그 인간이 어떻게! 말이 돼!?”
리포드는 네더만이 벽을 넘어 소드 마스터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기함을 토했다.
분명 세계 정상회담을 위해 아르에리아로 떠날 때만 해도 자신과 같은 익스퍼트 최상급이었거늘!
복귀한 그가 소드 마스터가 되어 전장을 휘젓고 있다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전혀 믿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물론, 땅 끝까지 처박힌 프렌치아의 사기에는 큰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이 정도의 대규모 전장에서 판도를 뒤바꿀 정도의 영향력은 가질 수 없다.
그저 전장에 열기를 불어 넣는 정도겠지.
실제로 병사들 또한 다시 의지를 다지고 있었고.
패전만을 반복하던 프렌치아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배알이 꼴리는 게 문제인 거지.
“아니! 훈련도 제대로 안 하는 인간이!”
차라리 밤낮없이 창을 쥐고 있는 리포드가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면 억울하지나 않지.
아니, 그래도 배알이 꼴리기는 하겠지만.
어쨌거나!
네더만은 매일 술이나 퍼먹을 줄 아는 인간이었다. 개인 훈련하는 꼴은 본 적도 없다.
물론 익스퍼트 최상급의 끝에 이른 자에게 검을 휘두르는 물리적인 시간은 큰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그저 몸을 푸는 정도일 뿐이지.
하지만 그래도!
기사의 도의라는 것이 있거늘.
평소에 검보다 술병을 쥐고 있는 시간이 긴 개망나니가 소드 마스터라니!
“대체 무슨 수로 넘은 거지?”
벽을 넘은 방법이 궁금했다.
네더만과 조우하지 못했기에 그가 어쩌다 소드 마스터가 된 건지 알 방도가 없었다.
리포드는 소식을 가지고 온 기사를 바라보았다.
“우리 쪽에서 일부러 퍼트린 소문은 아니겠지?”
“네, 아닙니다.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검력 또한 압도적이었다고 하고요. 네더만 경께서 소드 마스터 경지에 오르신 게 확실합니다.”
리포드는 궐련을 깊게 빨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먼저 속여야 하는 법이다.
그가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는 것에 한 줄기 희망은 남아 있었다.
프렌치아로 따지면 복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그 인간이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고 해서 기울어진 전장이 바로 서는 것도 아니니까.
가짜나 진짜나 효과는 비슷할 터.
기왕이면 그 인간이 진짜 소드 마스터인 것보다는 전자가 낫지.
만약 진짜라면 또 얼마나 입을 놀려 댈까.
같은 시각, 드라칸 또한 같은 이유로 침통함을 느끼고 있었다.
“한발 늦은 건가.”
제네스를 이어 누군가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자신뿐이라 생각했었다.
한데 검보다 술병을 쥐고 있던 날이 많았던 그 네더만이 소드 마스터라니.
인생은 참으로 불공평한 것이었다.
“대열을 갖췄습니다.”
부관의 말에 드라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은 네더만의 소식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제국군이 끝없는 파도처럼 밀어닥치고 있었다.
사상자의 수는 갈수록 늘었다.
평야에 아군과 적군의 시체가 가득했다.
전선 또한 계속해서 밀리고 있는 상황.
하루빨리 전장이 마무리되지 않는다면 저지선은 결국 완전히 붕괴되고 말 터였다.
아직 프렌치아의 전력이 바닥을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결국에는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드라칸은 착잡한 시선으로 분주히 움직이는 제국의 군영을 바라보았다.
전에는 이 나라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프렌치아는 그에게 그 무엇도 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나라가 어느새 전부가 됐다.
이 나라 안에 자신의 가족들이 있었다. 지키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 전쟁,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데.”
시간상 슬슬 제국에서의 소식이 닿을 시기였다.
제네스는 과연 황제의 목을 베는 것에 성공했을는지…….
결국, 그것에 따라 프렌치아의 운명은 판가름 날 터였다.
모든 건 그 결과에 달려 있었다.
드라칸의 감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그가 그런 고민을 하던 그 시각, 황궁의 소식이 드디어 제국의 군영에까지 닿았다.
“무어라-!!”
벌떡 일어난 사령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얗게 질린 채 부들거리는 얼굴이 부복하고 있는 기사를 향해 있었다.
그는 선명히 들었음에도 다시 한번 물었다.
“화, 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셨다고?”
말끝이 파르르 떨린다. 온몸에서 힘이 풀린다. 육체가 눈처럼 녹아내리는 듯했다. 휘청거린 그는 책상을 짚으며 몸을 지탱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흰 사자가 제국을 종단하고 있다는 소식은 알았다.
하지만 그가 그 끝에서 황제의 목을 벨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황제에게 닿기까지 넘어야 할 산들이 어디 한두 개인가.
제국의 소드 마스터인 휴레인부터 특임 기사단들까지.
게다가 황제의 무력 또한 소드 마스터에 이른 것을, 알 만한 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모두가 흰 사자 하나를 막지 못해 당했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 정보의 출처가 어디냐.”
“제국에서 직접 온 서신이라 합니다.”
사령관은 머리를 한차례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적의 교란일 수 있다. 이 정보의 진위를 다시 한번 확실히 확인해야 한다.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기사가 나가는 순간부터 그의 머릿속은 맹렬한 가속을 시작했다.
이 소식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각 군단의 사령관급 인사들이 모두 알게 될 터였다.
황제가 서거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제국 전체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황위에는 누가 오를 것인가가 화두에 오를 테지.
황자들은 어렸다.
가장 먼저 황자들의 외가를 주축으로 그에 속한 가문들이 발 빠르게 움직일 터였다.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가문이 얽히고설킬 터였다.
내전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아니, 황제가 서거한 게 사실이라면 분명 내전이 일어날 터였다.
기회와 죽음이 욕망을 거름 삼아 이곳저곳에서 피어나게 될 거다.
앞으로 누가 아군이 되고 누가 적군이 될지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황제가 서거했다면, 프렌치아에서 세우는 공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게 된다.
새로운 권력이 자리 잡게 될 터였다.
줄을 잘못 잡으면 아무리 공을 세운다 한들 상이 아닌 칼이 떨어질지도 몰랐다.
복잡한 정세 속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힘을 기르는 것.
이 땅에서 의미 없는 피를 흘리고 싶은 세력은 없을 터였다.
게다가 정말 흰 사자가 황제의 목을 베었다면…….
그가 다시 돌아올 거다.
혼자 힘으로 제국을 종단한 그를 누가 막겠는가.
그를 맞이하는 군대는 그야말로 처참하게 패할 것이 자명했다.
누구도 그를 맞닥뜨리고 싶지 않을 테지.
생각을 정리한 사령관은 다급히 심복들을 불러 모았다.
만약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하루빨리 제국으로 복귀해야 했다.
이와 같은 결론에 다다른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각 군의 모든 지휘관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정보의 진위를 확인하고 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지금까지 쌓아 올린 부귀영화가 한순간에 먼지로 흩어질 수 있으니.
“……뭐지?”
“저것들 왜 저리 얌전해?”
성벽에 올라 제국의 진영을 바라보던 병사들의 눈가에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적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고요해도 너무 고요하다. 폭풍 전야의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가 이어져 왔다.
그런데 그것이 하루아침에 뚝 끊겼다.
벌써 며칠째였다.
작은 교전들이 있기는 했으나, 그저 시늉만 할 뿐 이렇다 할 공세를 펼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병사들에게는 그 고요함이 불안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지…….”
불안함이 가중되던 때, 프렌치아의 서해를 가로지르고 있는 소형 군함이 한 척 있었다.
그 선미에서 널따랗게 펼쳐진 해협을 바라보는 인영.
곧 황제의 죽음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존재가, 프렌치아에 도착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