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1화
제221화 마지막 장벽 (2)
황제는 흰 사자가 황성의 성문을 넘는 순간에도 언제나처럼 옥좌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대전.
그는 홀로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다.
저 멀리서 흰 사자의 기파가 전해져 온다.
눈앞에 마주하지 않았음에도 선명한 기파.
높이 솟은 산악을 마주한 것처럼, 드넓은 바다를 헤아릴 때처럼.
그의 존재감은 광활하다.
그와의 거리가 상당함에도 흰 사자의 존재감이 선명히 느껴졌다.
그것이 빠르게 간격을 좁혀 오고 있었다.
결말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느낌이다.
반복되던 삶의 종착.
지금까지 끝을 바란 적은 없었다. 더욱 나은 미래만을 바라왔으니까.
하지만 회귀의 권능을 잃고 나니 이 모든 삶의 끝이 궁금해졌다.
모두 흰 사자와의 승부로 결판이 날 터였다.
모든 걸 잃거나 모든 것을 얻을 테지.
그리고 승패가 어떻든 자신의 삶은 어떠한 결과에 도달할 것이다.
‘그런데 왜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때보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하나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는 알 거 같다.
이 결과를 끝으로 자신은 더 이상 무엇도 욕망하지 못할 거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지도 않겠지. 끊임없이 과거와 경쟁하던 그 길목에서 내려온 기분이었다.
언제든 과거를 돌릴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은, 오히려 그의 발목을 움켜잡고 나아가지 못하게 했었다.
자신을 더욱이 극한으로 몰아 최선의 결과만을 추구하게 했다.
황제는 자신이 그 굴레에서 완전히 내려섰음을 깨달았다.
‘어서 오거라.’
그렇기에 그의 존재가 기껍다.
황제는 흰 사자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알고 있으니까.
그가 결국 자신의 앞에 설 거란 걸.
황제는 그 끝에서 흰 사자의 목을 벨 생각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대륙 제일검의 자리에 스스로 오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흰 사자가 제국을 종단하고 황성을 뚫으며 쌓아 올린 업적은 모두 자신의 업적을 치하할 공적으로 화할 것이다.
흰 사자만 없어지면 더 이상 자신을 막을 수 있는 자들은 없다.
역천의 대가를 지웠으니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도 될 테지.
모든 일은 수월하게 흘러갈 것이다.
흰 사자만 없다면. 흰 사자만 제거한다면.
그렇기에 황제는 지금 무너지는 것들에 대해 조금의 미련도 두지 않을 수 있었다.
* * *
천지가 뒤집히는 굉음이 인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듯했다. 그 사이로 비명과 고함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정갈한 기품을 품고 있던 황성이 아비규환의 지옥도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흰 사자는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모조리 베어 내며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의 검을 제대로 받아 내는 이가 없다.
손끝이 번쩍일 때마다 그의 검은 예외 없이 무언가를 베었다.
단단히 세워져 있던 인의 장벽이 세로로 갈라진다.
“저, 저것이 정녕…….”
그가 금세 멀어진다.
흰 사자를 필사적으로 물고 늘어지던 기사들은 그 광경을 허무하게 지켜보았다.
마치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듯, 부서진 잔해들이 그것에 묻힌 시체들과 기다란 길을 이룬다.
살아남은 자들은 멍한 눈빛으로 그저 멀어지는 소음을 쫓았다.
살았다는 안도와 무력감이 동시에 흩어진다.
그 누구도 그의 뒤를 쫓지 못했다.
대체 저자를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어떻게 할까요.”
“시체를 수습하고 주변을 정리한다.”
흰 사자가 떠난 자리는 패전의 전장이 되었다. 뒤를 쫓아간들 설 자리도 없었다.
그들의 의무와 임무는 이곳에 있었다.
나머지는 다음 관문을 지키는 이들에게 맡길 수밖에.
“…….”
다들 말을 아끼며 움직였다.
모두 동요하고 있었다. 각기 다른 이들의 생각이 하나로 모여들었다.
여기 있는 누구도 모르지 않았으니까.
이 길의 끝에는 황제가 있다.
제국의 하늘이자, 대륙의 정점.
감히 누구도 그를 똑바로 마주하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 그 전능에 가까운 존재가 어느 때보다 위태롭게 느껴진다.
“동요하지 말고 소임을 다하라!”
지휘관들이 축 처진 기사들을 독려했다.
그 또한 그들의 마음을 잘 알았다.
흰 사자의 뒤를 따르는 폭발음은 여전히 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소음이 멀어지는 속도가 빠르다.
저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긴 설명 없이도 잘 알았다.
자신들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과연, 그를 막아 낼 수 있을까?’
제국의 정점이었던 두 개의 검이 이미 꺾였다.
특임 기사단이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그중 제국의 자존심이라 불리던 레트로이나 6검이 패했고, 황제의 검인 드래곤하트까지도 패했다.
솔직히 남아 있는 자들만으로 막아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다들 전장을 정리하면서도 불안한 눈빛으로 멀어지는 굉음을 좇았다.
그때 저편에서 다시 한번 커다란 굉음이 일었다.
쿠르르르르릉!
뿌연 운무가 건물 사이로 높게 피어올랐다가 이내 흩어진다.
분진이 흩어지며 점차 드러나는 광경은 처참했다.
흰 사자가 시체들 사이에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를 수많은 기사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전장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허전한 왼쪽 어깨를 부여잡은 자가 그를 바라본다.
특임기사단, 이노베트.
제국의 창이자 전장의 학살자라 불리는 기사단.
수없이 많은 이명을 가지고 전장을 휩쓸던 자들.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적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위명을 가진 자들이었다.
한데, 그런 이들이.
한 사내에게 무참히 도륙당하고 있었다.
콰과과과과광!
전장을 헤집으며 무자비하게 선고했던 죽음들이 이제는 그들의 것이었다.
짙은 무력감이 진영에 깔린다.
포위하며 공간을 잠그고, 목숨을 건 검을 그어 봐도 흰 사자에게는 조금도 닿지 않고 있었다.
마치 헛것과 싸우는 듯했다.
눈에 빤히 보이지만 닿을 수가 없다.
하나 그것은 분명한 실체였다.
흰 사자에게서 섬광이 번쩍할 때마다 그 궤도에 놓인 이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제대로 된 반격도 못 하고, 그저 그 검에 쉬이 꿰뚫리고만 있었다.
구성원 모두가 평생 검을 익혀 왔고, 대륙 정점에 위치한 기사단에 속한 기사들이다.
‘그런데 이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오우거와 고블린의 싸움보다도 압도적이었다.
적은 이제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애송이.
그런데 어떻게 이리 강맹한 검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끝없는 마력을 뿜어낼 수 있는 것인가.
외성에서부터 이곳까지 이르렀음을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그는 수없이 많은 것들을 베었을 터였다.
그런데 왜…….
‘지치질 않지?’
언뜻 보이는 얼굴에 내린 표정이 무심하다.
싸늘한 얼굴 위로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농부가 벼를 베듯 평범한 일상의 한순간처럼 아무 감흥 없이 검을 휘두른다.
격렬한 난전 속에서도 호흡은 흐트러짐조차 없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아군을 압도하는 검격을 끊임없이 풀어내고 있음에도 그렇다.
이것이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위엄인가.
흰 사자의 소문은 많이 들었다.
그의 강함이 하늘에 닿아 있다는 이야기도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직접 겪어 보니 확연히 다르다.
그가 일궈 낸 말도 안 되는 업적들.
그저 이야기로 들었기에 믿을 수 있던 것들.
그것을 실제로 마주하니 오히려 더 믿기지가 않는다.
별처럼 멀찍이 존재하던 이야기가 눈앞에서 선명해지는 순간, 그의 검이 얼마나 아득한 곳에 존재하고 있는지 선명히 알 수 있었다.
‘……막을 수 없다.’
그 누구도 이자의 걸음을 잡을 수 없을 거다.
그와 자신들 간에는 어떻게 해도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세워져 있었다.
병력의 태반이 쓸려 나가고 나서야 그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는 규격 외의 존재였다.
너무 아득한 격차에 분노조차 일지 않는다.
감정을 담기에 그의 존재는 너무나 아득하고 거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막아야 한다.’
그 끝이 허무한 죽음일지라도.
제국의 기사로서.
황제의 검으로서.
그것이 마땅하다.
* * *
황제의 검이 또 하나 부서졌다.
나는 호흡을 깊게 다스렸다.
그들의 검은 강했다.
조직력도 물론이거니와 개개인의 검력 또한 훌륭했다.
상대하기가 편하지는 않았다.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의 시체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이제 황궁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여기까지 이르기 위해 체력의 소진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거다.
내력 또한 4할 정도 소비한 거 같다.
성문의 단단함이나 병력의 구성이 과거, 프렌치아 총독부와는 확실히 격이 다르다.
대륙의 정점인 제국의 황궁이다. 긴말을 해봐야 입만 아픈 이야기였다.
그렇게 하나의 문을 넘어서니 널찍한 정원이 드러났다.
정원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왕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놓인 황궁.
나는 그것에 물끄러미 시선을 두었다.
마치 거대한 용이 그 안에 꽈리를 틀고 앉은 듯했다.
진즉부터 느끼고 있었으나, 확실히 거대한 존재감.
일대가 그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나는 마치 황제의 아가리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간만이었다.
이렇게 호승심이 일어나는 건.
자욱하게 깔린 황제의 기파가 나를 자극해 온다.
그 또한 이곳에 들어선 나를 선명히 느끼고 있을 테지.
하지만 아직이었다.
나는 저 너머에 있는 황제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녀석에게 닿기 전에 처리해야 할 귀찮은 것들이 있었다.
귀찮다고 말하기에는 솔직히 전력의 무게가 상당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총 열 명의 남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일렬로 선 자들에게서 늘어선 산맥과 같은 웅대함이 전해진다.
황제의 기운에 가려졌지만, 이들의 기세 또한 하늘에 닿을 듯 높이 뻗어 있었다.
“저스티스의 단장, 히킬레온이다.”
중년을 넘어선 자였다. 희끗희끗한 새치가 보였고 눈가의 주름이 깊었다.
최초의 세계선에서 황제와 함께 있던 자는 아니었다.
내가 말했다.
“총 열두 명으로 알고 있었는데.”
눈앞에 선 자들은 총 열 명이었다.
아르에리아로 가는 길에 둘을 베었으니 그 숫자가 맞기는 했다.
하나, 그전에 벤 자들이 있었다.
합하면 황제의 직속 친위대는 한 명뿐이어야 했다.
히킬레온은 내 의문을 쉬이 풀어 주었다.
“자네 덕분에 새로 추가된 인원들일세.”
아무래도 이능을 가진 자가 죽으면 그 이능을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부여할 수 있는 듯했다.
“시간이 부족했기에 전보다 아쉽겠지만, 그래도 쉽지는 않을 걸세.”
그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는 않았다.
아르에리아 조약의 기한은 3년뿐이었지만, 이들의 기세는 상당히 날카로이 벼려져 있었다.
대강 보아도 신체 능력은 소드 마스터급에는 이른 듯했다.
고작 3년 만에 이만큼 강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성장을 가속하는 이능이라도 그 정도로 가파른 상승은 불가능할 터였다.
그러니 애초부터 어느 정도 반열에 올랐던 이들에게 이능을 건네준 것이겠지.
그래 봤자 격의 차이는 선명할 테지만, 수가 열 명이나 되었다.
확실히 간단한 싸움은 아닐 터였다.
나는 뇌운검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이들이 황제와 내 사이에 놓인 마지막 장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