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9화
제219화 제국 종단 (3)
따사로운 햇볕이 떨어져 내리는 푸른 바다 위를 한 척의 군함이 항해하고 있다.
주변을 둘러봐도 온통 끝없는 바다뿐.
이리엘의 시선은 저편을 향하고 있었다. 제국이 있는 방면이었다.
“아직 황궁에는 도착하지 못했겠죠?”
“아직은 이르긴 하네만. 그래도 그 자식 속도라면 또 모르지.”
마음만 먹으면 새보다도 빠르게 날 수 있는 녀석이었다. 지금쯤 어디에 이르렀을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네더만의 말에, 알렌이 입맛을 다셨다.
“그렇겠죠. 하. 함께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네요. 홀로 황궁을 무너뜨리는 걸 직접 두 눈으로 봐야 하는데.”
유리아 또한 눈에 불을 켜며 앞섶을 부여잡았다.
“그러니까요! 저도 마그네트에서 느꼈던 감동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구요!”
“그 자식의 검을 직접 못 본 게 아쉽게는 하군.”
네더만도 혀를 차며 아쉬운 티를 팍팍 냈다. 제네스의 검을 통해 벽을 넘을 수 있었다. 그의 검은 네더만에게 보물 창고와 다름없는 것. 직접 보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을 수밖에.
다들 미련을 뚝뚝 떨어뜨리는 사이, 저편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슬슬 프렌치아가 보입니다!”
감격에 찬 목소리.
다급히 달려온 헨손이 저편을 가리키며 활짝 웃고 있었다.
일행들의 고개가 일제히 헨손의 손짓을 따랐다.
저 멀리 육지가 보이고 있었다.
“괜찮겠죠?”
이리엘이 알렌을 보며 물었다.
프렌치아를 보면서도 제네스 생각뿐인 그녀였다.
알렌은 조금의 틈도 없이 답했다.
“그럼! 제네스 님인걸!”
“하긴.”
알렌의 확신에 이리엘 또한 픽 웃으며 염려를 놓았다. 잠시나마 품었던 걱정이 금세 의미 없이 흩어진다.
‘맞아. 제네스 님인걸.’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그가 여태까지 보여 준 행보는 그가 무사히 돌아올 것임을 선명히 증명하고 있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야 믿지 못했지만, 사실 지금도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믿는다.
제네스의 말은 지금까지 한 번의 어긋남도 없었다.
그의 검은 언제 어디서나 절대적이었다.
“괴물 같은 놈. 우리는 그놈이 아니라 오히려 제국을 걱정해 줘야 할 판이라고.”
네더만의 말에 이리엘은 기다란 미소를 지었다.
제국을 걱정할 일은 없겠지만,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안다.
제네스는 지금까지 눈앞에서 보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불가능한 일들을 계속해서 벌여 왔다.
그것도 상처 하나 없이.
자신들에게는 절대 오를 수 없을 거라 느껴지는 거대한 산악도, 그 앞에서는 그저 작은 둔덕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자신들에게 프렌치아를 되찾아 줬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빨리 이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어요.”
이제 마지막이었다.
황제의 목만 베면, 제국과의 전쟁은 자연스레 마무리가 될 거다.
흰 사자를 품은 프렌치아다.
홀로 황제의 목도 베는 사내인데.
그 누가 프렌치아를 건드린단 말인가.
이번만 견뎌 낸다면 프렌치아는 흰 사자라는 압도적인 전쟁 억제력을 갖게 될 터.
그가 건재한 이상 그 누구도 프렌치아를 넘보지 못할 거였다.
이리엘은 가만히 생각했다.
소드 마스터가 하나의 군단이라면, 그랜드 소드 마스터는 하나의 국가와 같을 것이라고.
* * *
세월의 고고함을 품은 드높은 성벽이 기다랗게 깔려 있었다.
장중하게 솟은 파도가 굳어 돌벽이 된 듯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압도감이 전해질 정도의 거대한 규모.
그 창공에서 제국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 파에로안트.
과연 그 위상에 걸맞은 성이었다.
나는 성문을 향해 걸었다.
성문 앞으로는 말을 탄 기사들이 대오를 정렬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황금빛 갑옷 위로 햇살이 부서진다.
그 수가 기백을 넘어가고 있었다.
특임 기사단의 하나이자 황궁을 대표하는 황궁 기사단, 드래곤하트.
구오오오오오!
그들의 기세가 하나로 벼려져 거대한 칼날처럼 겨눠진다.
맹렬한 적의가 폐부를 날카롭게 찔러 오고 있었다.
단단한 성벽을 뒤에 두고도 성문 밖으로 나와 나를 맞이하려는 자들.
그들 또한 내게 성벽의 높이와 성문의 단단함은 아무런 장벽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일 거다.
나는 적들의 기세를 온몸으로 받으며 걸었다.
가볍게 걷는 듯 보이겠지만, 한 걸음에 수 미터씩 간격이 지워지고 있었다.
적들에게서 함성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돌겨억-!!”
앞 열에 서 있던 군마들이 투레질하며 힘차게 걸음을 내딛는다. 적들의 전열이 빠르게 밀려왔다. 전력을 다해 달려오는 말발굽이 땅을 세차게 두드렸다.
땅이 진동하고 있었다.
나는 뇌운검을 단단히 쥐었다.
이곳에 다다르기 전 체력과 내력은 모두 회복한 상황.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마주해 나갔다.
걸음이 깃털처럼 가뿐하다.
그때 적들의 전열에서 대기를 찢는 굉음이 일었다. 적들의 진영에서 솟아오른 검은 가시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내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화살이 아닌 창.
전방위를 가두는 창이 그물망처럼 활짝 펼쳐져 떨어져 내린다. 하나하나에 담긴 거력이 묵직하다.
나는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천령신공 보법편.
제1장 산운(散雲).
구름처럼 흩어지는 신형을 거뭇한 궤적이 뚫고 지나간다.
그림자를 찢으며 바닥에 깊게 꽂히는 창격들.
몰이사냥을 하듯 공간을 점차로 가두며 쏟아진다. 하나 내게는 나아가야 할 길이 훤히 보였다.
콰과과과과광!
적들의 창이 걸음 뒤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지반에 깊게 박히는 창들이 내 걸음 뒤를 바짝 쫓아왔다.
그들의 창은 내게 닿을 듯 닿지 못하고 있었다.
일부러 그리했다.
갈 길이 멀다. 황제에게 닿기 위해서는 많은 난관을 넘어야 할 터.
이건 고작 첫 번째 관문.
무리하게 힘을 소진할 필요는 없었다.
최소한의 힘을 들여 적들을 무너뜨려야 했다.
미리 이와 같은 안배가 필요할 정도로 황제의 검은 날카로웠다.
그렇게 검은 폭풍이 한차례 지나가자, 적들이 내 앞에 있었다.
마치 단단한 벽이 밀려오는 듯하다.
나는 그런 이들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검을 쥔 손이 뒤로 당겨지며 팔 근육이 단단하게 압축되었다가 폭발하듯 뻗어졌다.
천령신공 검법편.
제2장 흑관섬(黑貫閃).
칼끝이 창졸간에 점을 찍는 순간, 적의 전열을 관통하는 섬광이 있었다.
일순 세상을 푸르게 칠할 정도의 맹렬한 빛줄기.
그 빛살에, 앞에 놓인 것들이 모조리 쓸려 나가며 전방이 뻥 뚫린다.
후두두두둑!
휑해진 공간 위로 붉은 핏물과 함께 조각난 살점들이 떨어진다.
붉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적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열을 두 개로 나누어 양쪽에서 내게 쇄도해 왔다.
말을 탄 이들의 높이가 시야를 완전히 가린다.
양 측면에서 높은 파도가 밀려드는 것 같았다.
나는 칼날에 바람을 감았다.
천령신공 검법편.
광풍의 장(章) 승천(昇天).
세찬 바람이 그것들을 찢어발겼다.
칼날의 궤적을 따라 딸려 오는 대기.
마치 세계가 검 안으로 감겨드는 듯하다.
그 후폭풍으로 만들어진 흐름이 세찬 광풍으로 화해 주변을 휩쓸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
단숨에 적의 전열을 붕괴시키는 바람의 칼날.
바람을 품은 반투명한 검기가 무자비하게 전열을 휩쓸고 있었다.
적들은 내가 일으킨 폭풍에 잘려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금 세상이 고요해졌을 때, 나는 홀로 서 있었다.
산 자는 있었으나, 두 발로 서 있는 자는 없었다.
나는 다시금 앞으로 나아갔다.
적들의 진영에서는 또 다른 자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렇게 나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질 작정이겠지.
나는 발끝으로 지반을 밀었다.
쿵!
신형이 연기처럼 흩어지며 쏘아진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내 뒤를 따랐다.
하나하나 상대할 이유가 없다.
나는 이대로 적진을 뚫을 예정이었다.
이 길의 끝에 황제가 있다. 모든 일의 원흉이 눈앞에 있었다.
내가 나라를, 부모님을, 그리고 내 삶을 잃어야 했던 원흉이자.
중원에서 환생하여 천하 제일인이 된 나를 이 자리에 돌아오게끔 만든 자.
그 모든 일의 근원.
이제 곧 녀석의 목을 벨 터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프렌치아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거다.
그렇게 되면 나 또한 전생의 짐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게 되겠지.
나는 지금 그 길의 종착에 서 있었다.
* * *
황궁 기사단, 드래곤하트.
그들의 창은 지금껏 황제와 황성을 굳건히 지켜 왔다.
제국을 넘어 대륙을 압도하던 황제의 창.
그들의 위명은 대륙의 정점에 올라 있었다.
하나, 지금은 그 명성의 파편만이 허무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
성벽 위에 선 병사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눈에 똑똑히 새겼다.
하나의 검이 금빛 물결을 헤집는 광경.
청색의 섬광이 명멸할 때마다 금빛 물결이 기다랗게 쪼개어진다.
찰나에 피어나 찰나에 흩어지는 빛 무리.
그것은 항상 붉은 피 구름을 동반했다.
땅이 갈라지고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굉음이 인다.
황궁 기사단의 창은 단단했고 드높았고 날카로웠다.
그들의 영광은 결코 헛것이 아니었다.
하나, 그럼에도 그들은 흰 사자를 막지 못했다.
무수한 기사들이 쓰러지고 흰 사자만이 홀로 남았을 때, 깊은 적막이 흐른다.
제국이 자랑하던 황궁 기사단이 허무하게 쓰러졌다.
병사들의 눈가에 의문이 어린다.
기백에 이르는 황궁 기사단을 한 끼 식사처럼 쉬이 무너뜨리는 이자를 과연, 제국의 기사들은 막아 낼 수 있을까?
그의 검을 직접 보는 순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굳건한 믿음이 흔들린다.
제국이 한 남자에게 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함이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한 번도 적의 침입을 허락했던 적이 없는 성문이었다.
500년을 넘어가는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외부의 침략을 받아 본 적 없는 성벽이었다.
제국을 노리던 칼날은 무수히 많았지만, 그 어떤 검도 수도까지 들이닥친 적은 없었다.
하나, 이번에는 달랐다.
적국의 검이 수도, 파에로안트의 성문 앞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앙-!
귀청을 찢는 듯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
성문 위로 겹겹이 쌓여 있던 보안 마법이 깨지며 세찬 돌풍으로 흩어지고, 동그란 충격파가 물결의 파문처럼 일었다.
성문이 있던 자리에서 뿌연 먼지구름이 올라온다.
그것이 바람에 걷히며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전경.
성문이 있던 자리가 휑했다.
저벅저벅.
흰 사자가 그 사이를 거닐었다.
그는 지금 막, 난공불락의 성문을 넘었다.
너무나도 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