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8화
제218화 제국 종단 (2)
내 앞에 검을 늘어뜨리고 서 있는 자.
마주하기 전부터 진즉 그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휴레인 바스티스.
제국의 소드 마스터.
높이 솟은 기파가 그것을 증명했다.
백발을 단정히 넘긴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마땅히, 대륙 제일검이다.”
“눈은 제대로 박혀 있군.”
내 검을 보았을 거다. 격의 차이를 모를 리 없겠지. 그는 이미 본인의 패배를 확신하고 있었다. 하나 그럼에도 그는 내게 승리를 말했다.
“긴 말은 필요 없겠지. 너의 걸음은 여기까지다.”
투쟁하는 것에 익숙한 자로 보였다.
막다른 벽을 마주했을 때 무릎을 꿇는 자가 있는 반면,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드는 자도 있다.
그는 후자의 사람이었다.
소드 마스터에 이르렀음에도 평생을 2인자로 살아온 그였다.
무한의 속검의 그림자에 갇혀 살아왔겠지.
언제나 누군가의 등을 보며 여기까지 걸어왔고, 언제나 한 보 앞선 천재가 그린 업적에 짓눌려 살아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검은 꼿꼿이 서 있었다.
많은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왔을 것임에도 그랬다.
그러니 벽을 마주했음에도.
본인의 패배를 직감했음에도.
그는 내게 본인의 검을 온전히 세울 수 있는 것이겠지.
투지로 불타오르는 그 눈을 보며 나는, 그의 인생을, 그리고 그가 벼려 온 검을 쉬이 알 수 있었다.
나는 여기까지란 그의 말에, 검을 드는 것으로 답했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훅 꺼지듯 흩어졌다.
어느새 검이 머리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태산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묵직한 검격.
일대를 짓누르는 압력이 상당했다.
친선대련에서 내가 파케를 상대했던 것과 같은 중검(重劍).
이것이 바스티스 가문의 검이겠지.
자유롭지만 하늘이 가라앉는 듯한 묵직한 검격.
좋은 검이다.
나는 그 검을 정면으로 올려쳤다.
하늘이 찢기는 굉음과 함께 검이 솟구친다.
그리고 두 개의 검이 맞닿았다.
콰아아아앙-!
투명한 충격파가 동심원을 그리며 터져 나간다.
벼락처럼 내리꽂히던 검이 그보다도 빠르게 튕겨 나갔다. 뇌운검이 세찬 울음을 터트린다. 나는 손끝을 타고 오르는 여운을 느끼며 그의 경지를 가늠했다.
극의(極意).
그는 소드 마스터의 끝자락에 다다라 있었다.
과연, 제국의 검은 날카로웠다.
바르안 알센도르와 휴레인 바스티스.
제국의 정점에 올라서 있던 두 개의 검.
나는 그들의 검력만으로 제국의 저력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대륙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괜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건재한 제국을 상대할 왕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였다.
나는 몸을 비틀며 바닥에 내려서는 그에게 쇄도했다.
찰나에 간격을 지운 칼날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
쿠구구구구구궁!
힘과 힘의 정면충돌.
나 또한 칼날에 무게를 실었다.
적의 중검에 중검으로 맞선 것.
창과 창의 대결이었고, 맹수와 맹수, 포식자와 포식자 간의 대결이라 봐도 무방했다.
서로를 집어삼키려는 검이 연거푸 펼쳐진다.
쿠르르르르릉!
그때마다 지반은 뒤틀리고 뭉개지며 큰 울음을 토해 냈다.
그의 검은 무거웠다.
이능에 기대지 않은 채 홀로 쌓아 올린 검.
끝없이 투쟁하며 스스로 굳건해진 검.
마치 머리 위로 하늘이 겹겹이 쌓이는 듯하다.
그의 검은 그토록 무거웠다.
하지만 나의 검은 그가 만들어 낸 하늘 위에 존재했다.
그의 검이 지반을 둘러싸고 짓누르는 하늘과 같다면, 나의 검은 삼라만상을 품은 하나의 세계였다.
그가 펼쳐 낸 하늘 또한, 그 세계 안에 담겨 있었다.
그의 검이 나의 검 아래 삼켜진다.
콰드드드드드등!
휴레인의 검이 거칠게 반항했다.
삼켜지지 않겠다는 몸부림.
그는 필사적으로 내가 만든 세계에서 벗어나려 했다.
날카롭게 모인 투기가 치솟아 오른다.
하늘 위에 그려 놓은 하늘을 자르기 위해.
그가 지금껏 걸어온 길이자 벼려 온 칼날.
그리고 가장 자신 있는 검.
그의 검은 언제나 본인보다 높은 격의 존재를 베기 위해 겨눠져 있었다.
그것은 그의 숙명을 품은 칼날이었다.
하나의 삶이 녹아내려 벼려진 검은 단단했고, 날카로웠다. 내가 만든 검압을 찢어 내고 내게 검을 들이밀 만큼.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콰아아아아앙-!
그의 검은 결국 부러졌다.
투쟁으로 벼려 낸 칼날은 내 앞에서 꺾였다.
나는 그의 검을 부수고 나아가 그의 가슴팍마저 갈랐다.
“…….”
반으로 부러진 검을 쥔 채 선 그가 나를 바라본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무심한 시선. 하나 어딘가 모르게 개운한 표정이었다.
푸확!
일순 가슴팍에서 붉은 핏물이 솟구치며 그는, 허물어졌다.
나는 휴레인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 산 자들이 많았다.
하나, 더 이상 내 앞을 막아 오는 이들은 없었다.
* * *
황궁으로 계속해서 패전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럼에도 황제의 표정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만 주억거릴 뿐이었다.
제국의 명예가 바닥에 처박히고 있는데도, 흰 사자가 황궁에 다다르고 있음에도 그는, 언제나처럼 동요하지 않았다.
황제에게 흰 사자는 운명을 거스른 대가였다.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들의 대가.
미래를 높이 쌓아 올린 만큼, 그 대가 또한 무거운 것은 당연했다.
“이제 곧 수도에 도달하겠군.”
제국을 가로지르는 속도를 보았을 때, 머지않아 수도에 도착할 터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이 결판나겠지.
과연 흰 사자는 자신의 앞에 놓인 모든 벽을 뚫고 여기에 이를 수 있을까?
‘능히 그럴 테지.’
눈앞에 흰 사자의 그림자가 담긴다.
흰 사자 탈을 쓰고 검을 늘어뜨린 남자.
황제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그의 모습은 그러했다.
그런 그가 대전에 서 있다.
자신의 앞에서 검을 겨누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현실이 될 터였다.
황제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저 감이 아니라, 자신의 검을 토대로 그의 강함을 가늠한 결과였다.
자신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또한 할 수 있는 게 당연했다.
투쟁심이 치솟는 동시에, 마음이 편안하다.
승리하든 패배하든, 상관없을 거 같다.
어느 쪽이든 괜찮았다.
어찌 되었건 자신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결론에 도달할 테니까.
* * *
루시안은 저편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되려나.”
그의 시선은 저 멀리 제국을 향하고 있었다.
세계 정상회담의 결과는 이미 보고를 받았다.
모든 것은 수월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이리엘을 비롯한 네더만, 유리아, 알렌이 군함을 타고 테논스항을 빠져나갔다는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의 정보가 왕궁에 닿기까지의 시간을 생각하면, 이리엘과 일행들은 현재 소해를 건너 프렌치아에 거의 도달해 있을 터.
레이크가 말했다.
“아마 우리가 원하는 결과겠지요.”
“하긴. 언제나 녀석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으니까. 그럼에도 믿기지 않지만.”
제네스는 지금쯤 홀로 황궁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터였다.
제국을 가로질러 황제의 목을 베겠다니.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다.
그를 지키고 있는 벽들은 대륙에서 가장 드높고 단단한 것들이었다.
-내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야.
그럼에도 제네스는 그리 말했다.
대체 어디서 그런 녀석이 프렌치아에 뚝 떨어졌는지.
“이 모든 게 꿈은 아니겠지?”
루시안은 문득문득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지금 이 모든 순간이 꿈은 아닐까 하는.
생생하고 기나긴 꿈.
그런 말을 하는 루시안의 심정을 레이크는 잘 알고 있었다.
“말이 안 되기는 합니다.”
제네스의 전력은 그만큼 말이 되지 않으니까.
그가 소드 마스터보다 위의 경지라고 했을 때도 이 정도로 강력한 검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저 하나의 강력한 군단이 생긴 것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난데없이 체스판에 떨어진 말 하나가, 판을 흔든 정도가 아니라 그 판 자체를 뒤집어엎었다.
레이크가 말을 이었다.
“꿈이라고 생각해도 허황할 지경이죠.”
그만한 인물이 갑작스레 자신들에게 날아와 프렌치아를 되찾아 주었다.
직접 겪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맞아. 소설이라고 해도 뭔 이딴 꿈같은 소설이 다 있냐면서 작가를 욕했겠지.”
“하지만 꿈은 아닐 겁니다.”
레이크는 언제나처럼 건조하게 답했다.
“그동안 정말 죽을 뻔했으니까요.”
그의 말에 루시안이 박장대소했다.
그 어느 때보다 뼈가 담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루시안 또한 깊이 공감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젠장. 이게 꿈이라면, 여태까지 꿈이란 걸 모른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야.”
아르에리아 조약으로 인해 얻은 3년의 귀중한 시간.
그 안에 변절자들을 처단하고 국민들의 민생을 챙기며 새로운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제국과의 전쟁을 대비했어야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무를 돌봤다.
정말이지, 분신이라도 만들고 싶을 것 같던 순간들.
그런데 그 끔찍한 고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웃음을 모두 뱉은 루시안의 표정은 어느새 진중해져 있었다.
“이번만 넘기면 돼.”
제국의 병력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곧 프렌치아를 향할 터였다.
국토가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겠지.
평야를 메우고도 남을 제국군을 지금까지 쌓아 올린 프렌치아의 힘만으로 막아 내야 한다.
제네스가 황제의 목을 베고 돌아오기 전까지 버텨야 했다.
목표는 단순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3년간 칼을 간 것은 프렌치아만이 아니니까.
제국 또한 프렌치아를 침략하기 위해 여러 준비를 했을 터였다.
병력의 수가 압도적으로 뒤지는 상황에서 그들을 막아 내는 건 수많은 국민의 목숨을 갈아 넣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반드시 해내야겠지.”
“예.”
제네스가 올 때까지 버티는 건 일단 1차 목표다.
물론, 그가 온다고 전황이 한 번에 뒤집히지는 않을 거다.
전장은 수없이 많은 곳에서 펼쳐질 테니.
제네스가 아무리 이리저리 뛰어 봐야 국토 전역에서 일어나는 불길은 끌 수 없다.
하지만 제네스의 존재는 단순히 압도적인 무력에만 있지 않았다.
그가 프렌치아에 당도했다는 의미는, 황제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이야기니까.
그것은 적진에 엄청난 균열을 가져올 터였다.
제국군은 제국의 이름 아래 묶여 있지만, 그 안에 속한 기사들과 병력들은 각기 가문에 속한 이들이기도 했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황제가 살아 있을 때는 그 모든 게 단단히 통합되어 있었겠지만, 황제가 죽었다.
그렇다면 다음 황제는?
다음 권력의 추는 어디로 이동할까?
제국 내부에 균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 그들이 프렌치아를 공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흰 사자와 대적해서 그들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황제의 죽음으로 제국군은 약해질 것이다.
각 군의 사령관들은 이득 없는 프렌치아를 공략하는 것보다 제국에서 발생한 권력의 공백을 더 무겁게 생각할 터였다.
흰 사자와 대적해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건 패전밖에 없기에.
당연한 이야기였다.
제국을 단신으로 가로질러 황제의 목까지 벤 자를 누가 감히 감당할 수 있겠나.
그러니까 제네스가 황제의 목만 베어 준다면 이 전쟁.
무수한 병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프렌치아가 승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