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화
제216화 테논스 해전 (4)
밤바다가 붉게 타올랐다.
불붙은 군함이 곳곳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비명과 군함이 부서지는 굉음이 계속해서 바다를 울렸다.
나는 언제나 그 소음의 중심에 있었다.
타오르는 화염이 칼날에 휘감겨 풀어진다.
거대한 화룡이 밤바다를 마음껏 누볐다. 화룡의 몸부림에 군함은 부서지고, 불태워지며, 스러졌다.
적들의 군함은 무수히 많았다.
하나, 한 척도 프렌치아를 향하는 일행들에게 배를 붙이지 못했다.
내가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아니, 부러뜨렸다.
무너진 군함들이 불타는 장벽을 세웠다.
불의 장벽은 군함의 진로를 막았고, 진로가 막힌 군함들은 저들끼리 엉키며 충돌했다.
그렇게 장벽은 두꺼워져만 갔고.
그들이 그 장벽 앞에서 결국 군함을 세웠을 때, 나 또한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수평선에 늘어선 불길을 보았다.
적들이 회군하고 있었다.
일행들의 배는 어둠에 잠겨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못 쫓을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뒤를 잡고자 마음먹는다면 그렇게 되리라.
하나, 나는 이곳에 남았다.
애초부터 그럴 작정이었으니까.
프렌치아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제국에 남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옥좌에 앉은 황제는 텅 빈 대전을 응시했다.
아무 소리도 없는 적막한 공간에서 그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우선 에로인을 잃었다.
‘조심하라 했거늘.’
같지만 다른 무수한 삶 속에서 언제나 그의 곁을 지켰던 충신.
그런 그가 죽었다.
더 이상 회귀를 할 수 없기에 그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아니, 그는 단 한 번도 되살아난 적이 없었다.
자신이 그를 다시 만나게 될 뿐이지.
하나 이번에는 그럴 수조차 없을 거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실감 나지 않는다.
다시는 회귀할 수 없다는 것이.
언제든 되돌릴 수 있는 삶이었으니까.
작은 실패가 있을 때마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되돌려 왔으니까.
하지만 알고는 있다.
사실 선연하게 느껴진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그의 죽음이 실감 나지 않으면서도 아프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그 감정이 생소하지만, 이것은 분명 슬픔이었다.
그리고 또 분노였다.
‘새삼스럽군.’
깊게 묻혀 있던 감정이 고개를 들어, 무겁게 자리해 있던 이성을 흔들고 있었다.
사건은 에로인을 잃은 것뿐만이 아니었다.
세계 정상회담에서 얻은 정보 또한 상당한 충격이었다.
베솔로인 후작의 서면 보고와 아르에리아에 추가로 파견된 이들이 당시의 상황을 빈틈없이 재구성하여 가지고 왔다.
후작의 죽음?
솔직히 아무런 충격도 없다.
하나, 당시의 상황을 보면 흰 사자가 새파랗게 어린 자라고 했다.
고작 20대 후반 정도로 보인다지.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또한 권능을 가진 것인가?’
합리적인 의심이었고,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나이대에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오를 수는 없다.
여러 삶을 거치며 이 자리까지 왔기에 알고 있다.
검은 결코 재능만으로 높게 쌓아 올릴 수 없다.
훌륭한 스승이 필요하고, 상승의 검술이 필요하고, 무수한 실전 경험 또한 필요하다.
끊임없는 노력 또한 기본이고.
거기에 그 모든 것들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세밀하고 다양한 조건들이 칼날 위에서 단단하게 엮일 때, 검은 날카로워진다.
그렇게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간다.
20대의 나이로 그랜드 소드 마스터?
그것도 갑작스레 난데없는 등장.
그런 일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지금껏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던 존재.
자신이 알지 못하는 권능이 대륙에 숨겨져 있었다고 보는 게 가장 합리적이었다.
‘하나,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지.’
그가 어떻게 힘을 얻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문제는 고작 그 한 놈을 어쩌지 못해 제국의 자존심이.
지금까지 공들여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거다.
거기에 최근 테논스 항구에서의 완패까지.
국민들의 동요가 컸다.
당연했다.
제국의 손꼽히는 명가, 메로안의 수장 베솔로인 후작의 목을 벤 자다.
그런 그가 테논스 항구로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파악했고, 포위망을 구축했다.
‘군함이 수평선을 가득 메웠다지.’
항구 자체를 봉쇄한 작전.
하나 적들은 아군의 군함이 정박하고 있는 군항의 배를 이용해 포위망을 뚫는 것에 성공했다.
적의 기발한 작전 때문에 놓친 게 아니다.
‘차라리 그런 것이었다면 이 정도로 소요가 일지 않았을 테지.’
그들이 테논스 항구를 벗어난 이유는 단 하나.
수많은 군함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정도로 흰 사자의 무력이 너무나 압도적이라서.
그날 밤바다에서 피어난 불꽃과 제국의 패전에 관한 소문은 제국에 급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혼자서 군단마저 압도하는 그를 대체 어느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혼란이 이는 건 당연했다.
그의 무력은 하늘에 닿아 있었다.
과연, 역천의 대가는 컸다.
그것은 그저 외면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
그리고 그런 그가 황궁을 향해 오고 있다.
흰 사자의 소문은 그의 걸음보다도 빠르게 황궁에 닿아 있었다.
하나, 섣부르게 움직일 필요는 없다.
어차피 결과는 하나다.
자신이 죽든, 흰 사자가 죽든.
그것에 따라 제국과 프렌치아 사이에 승부가 갈릴 것이다.
그리고 흰 사자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테지.
결국, 자신이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황제는 동요하지 않았다.
무수한 삶 속에서 쌓아 온 무력이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권능을 가졌다 한들, 그가 무한의 속검마저 뛰어넘었다 한들.
그는 자신 앞에서 무릎 꿇고 말 것이다.
이번 역천의 대가는 날카로웠지만, 그 해법은 오히려 간단했다.
녀석의 목만 베면 되는 일이니.
그렇기에 황제는 그저 가만히 그를 기다렸다.
* * *
인파의 웅성거림이 한 건물을 감싸고 있었다.
마치 역병의 발원지인 것처럼 겹겹이 쌓인 병력들.
그 뒤에 늘어선 시민들은 발뒤꿈치를 들고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불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평온했던 도시가 한순간에 북새통이 되어 있었다.
“아니, 정말 저자가 흰 사자란 말인가?”
“흰 사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저런 짓을 하겠어.”
“말세군, 말세야.”
“그러니까 말일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만.”
“어쩌겠나. 저자를 막을 방도가 없으니.”
시민들은 너도나도 혀를 차며 한마디씩을 뱉었다.
세계 정상회담이 끝난 지도 어느새 한 달이 훌쩍 넘었다.
프렌치아가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베솔로인 후작의 죽음과 테논스 항구에서의 패배 또한 마찬가지.
그리고.
흰 사자가 제국을 종단하며 황성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까지.
그럼에도 제국은 그 흰 사자 한 명을 막지 못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 영주님이 어떻게 나서겠나. 지금 영지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으로는 턱도 없지.”
“맞는 말이야. 혼자서 군단도 쓸어버린다는데.”
“그렇다고 이건 아니지 않나!”
프렌치아를 대표하는 자가 제국의 성에서 태연하게 밥을 처먹고 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그 광경을 눈앞에 두고도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모두의 시선이 모인 조용한 홀에서는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작은 소음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집중하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음에도, 지독한 적막에 휩싸인 이곳에서는 그것이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에 여관의 주인장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화들짝 놀랐다.
본인이 낸 소리였음에도 그랬다.
본래는 자신 있게 홀을 누비고 있어야 할 그는, 현재 종업원과 함께 구석에 처박혀 마치 본인이 주인인 양 식당 전체를 홀로 쓰고 있는 손님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손님이 아니라 재앙이었다.
뒤편의 창가로 일대를 포위하고 있는 경비병들이 보인다.
‘젠장! 나 좀 살려 달라고!’
경비대라는 것들이 검만 꼬나쥐고 있지 멀뚱히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다.
이게 포위를 한 건지 아니면 호위를 하고 있는 건지…….
하지만 그들의 심경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저 인간이 다름 아닌 흰 사자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제국을 뒤흔들고 있는 사내.
‘그런 놈이 왜 우리 집에 처온 거야!’
근처에 다른 식당도 여럿 있고만!
그는 금방이라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나저나 저렇게 새파랗게 어리다니.’
자신의 불운에 한차례 비명을 지른 주인장은, 태연하게 식사 중인 흰 사자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머리칼에 새하얀 피부.
무심한 듯 차가운 그의 인상은 귀족가의 오만함을 품은 듯했다.
보기에는 그저 어느 명문가 자제로 보인다.
그런데 저자가 홀로 제국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전부 짓밟은 남자라고?
정말?
자신의 반 정도 살았을 녀석이 대륙 제일검?
말이 돼?
보고 있어도 믿기지 않지만, 그의 정체를 의심할 수는 없다.
‘참 다행이었지.’
세상 물정 모르던 자신이 나서기도 전에 먼저 나서 준 이들이 있었으니까.
지금은 없지만.
그들은 모두 창밖으로 날아가 유명을 달리했다.
그들을 처리하는 속도가 자신이 상을 닦는 시간보다도 빨랐다.
여관을 차린 지 20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테이블을 정리하라고 해도 할 수 없을 거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했다.
물론 많이 다른 경우지만, 어쨌든 주인장은 그것을 통해 저 새파란 놈이 검에 통달했음을 쉬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애초부터 흰 사자가 아니라면 어떤 미X놈이 저딴 걸 들고 다닐 수 있겠나.
‘자살하는데도 여러 방법이 있다지만, 근래에 제국에서 자살하는 방법 중에는 저것이 가장 깔끔할 거 같은데.’
주인장은 테이블 옆에 기대어진 기다란 막대로 시선을 옮겼다.
큼직한 천이 그 상단에 매여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프렌치아의 국기였다.
‘저런 미X놈.’
적국의 국기를 들고 제국을 가로지를 생각을 하다니.
대체 얼마나 간이 배 밖으로 나와야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런데 문제는!
저딴 짓을 하면서도 이렇게 태연히 도시를 드나들고 밥까지 처먹고 있다는 거다.
제국은 저자를 막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런 그를 막기 위해 나선 자들이 많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소식이 들려왔지.’
근방의 가문이 연합하여 포위망을 구축해 보기도 하고 여러 군단이 그의 앞길을 막아 보기도 했다.
하나, 모두 뚫렸다.
게다가 흰 사자의 이동 속도는 상상을 불허했다.
홀로 움직이는 탓에 기동성이 좋아 포위망이 두꺼워지기도 전에 그것을 뚫고 지나갔다.
그러니 들려오는 소식은 매번 패전, 패전, 패전.
언젠가부터 여관이면서 식당이면서 주점인 이 홀에서는 한탄과 탄식과 분노가 들끓었다.
그 다양한 감정의 방향은 모두 흰 사자를 향해 있었고.
그런데.
‘큰소리치던 새끼들 다 어디 갔어?’
입만 열었다 하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며 흰 사자를 잡을 방법에 대해 나불거리던 것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입만 산 자식들.
뭐 실망할 것도 없다.
어차피 그런 것들의 말은 믿지도 않았으니.
그때였다.
탁.
드디어 흰 사자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잘 먹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주인장은 여관 밖으로 향하는 흰 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도 돈은 내야지, 새끼야!’
하나,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여관이 멀쩡한 게 어딘가.
자신의 목이 붙어 있는 게 어딘가!
그저 녀석이 멀리, 아주 멀리 꺼져 주기만 하면 더는 바랄 게 없는 주인장이었다.
제네스는 그런 주인장의 바람대로 여관의 문을 천천히 나섰다.
처저저적!
문을 열기 무섭게 경계하던 경비병들이 무기를 겨눠 온다.
하나 그 누구도 그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그저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을 뿐.
제네스는 마치 앞에 아무도 없는 양 걸었다.
그런 그의 걸음을 따라 인파가 좌우로 갈라지며 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