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제214화 테논스 해전 (2)
잠시 후 상기된 얼굴의 알렌이 돌아왔다.
네더만과 함께였고, 새로운 인물이 끼어 있었다. 왠지 낯익은 얼굴이다.
녀석도 나를 아는지 친근하게 입을 열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하하. 여기서 보니 감회가 새롭군요.”
“누구지?”
“……저 헨손입니다. 굽이치는 해협의 포르센 지부장…….”
어디서 봤나 했더니.
말을 들으니 이제야 기억이 났다.
녀석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저 기억하시죠?”
“앉기나 해.”
“하하. 제네스 님이 모르실 리가요. 장난친 거죠.”
알렌이 축 늘어진 그의 등을 위로해 주었다.
내가 말했다.
“언제부터 와 있었지?”
“저 1년 되었습니다. 오늘을 위해 진즉 자리 잡고 있었죠.”
헨손이 서운함을 털어 내며 비장하게 굴었다.
테논스 항구를 통해 복귀하는 계획은 세계 정상회담에 참여하고자 했을 때부터 준비해 놓은 경로.
미리 대비한 것들이 있을 듯했다.
“준비된 배가 있나?”
“아니요.”
“적들의 눈을 피할 방법은?”
“현재 제국의 군함이 200척이 넘습니다. 테논스 항구가 꽉꽉 막혔다고 봐야지요.”
내가 듣고자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방법은 없습니다.”
참으로 당당한 태도였다.
“그럼 넌 지금껏 여기서 뭘 한 거지?”
“……그게 배를 준비해 놓았으나, 항구를 막으면서 어선의 출항을 모조리 금지해 버렸습니다. 제가 1년 동안 뼈 빠지게 일하면서 어부들과 안면도 트고 접대도 하면서 현지에 적응한 건데…… 이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적들의 대응은 우리의 예상보다 빨랐다.
우리가 테논스 항구를 이용할 거란 건 그들의 입장에서 불확실한 정보였다.
우리의 위치를 정확히 가늠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테논스 항구를 완전히 봉쇄했다.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을 작정인가 본데.
지금까지 당한 게 많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내가 말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도 없이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럴 리가요!”
헨손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이쪽 바다의 항로는 물론이거니와 검은 군단의 군항의 내부까지! 그동안 꾸준히 들락거리면서 빠삭하게 익혀 두었지요! 제가 1년 동안 놀고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요!”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는 것으로 답을 요구했다.
“우선 저희가 프렌치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일러스터 해류를 타야 됩니다. 제가 해군에 속했던 시간만 20년이 됩니다! 해류만 타면 프렌치아까지는 끄떡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제국의 군함의 속도가 상상 이상이라는 거죠! 제국의 선박 제조 기술은 이미 세계 제일의 수준. 어선으로는 그들의 포위망을 뚫는다고 해도 금방 따라잡히고 말 겁니다. 배를 구해도 문제! 포위망을 뚫어도 문제라는 거죠!”
뚫는 것도 문제지만, 뚫고 나서도 문제였다.
프렌치아로 향하는 해류를 탄다고 해도 적들의 군함을 따돌릴 만큼 빨리 나아가지 못하면 금세 뒤를 잡힐 터.
바다 위에서 포위당하면 답도 없다.
이 상황에 해법은 하나뿐이다.
“우리도 군함을 타야겠군.”
“예. 바로 그겁니다.”
헨손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적들의 포위를 뚫고 이곳을 벗어나려면 적의 군함을 탈취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테논스 항구는 꽉꽉 막혀 있지만, 적들이 이용하는 군항을 이용한다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적들의 군항에 정박해 있는 군함을 탈취한다라.
배를 빼앗는 건 쉽다. 군함 안에 있는 제국군을 모조리 베어 내면 그만이니. 하나, 그러는 동안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금세 포위될 테지.
바다에서 포위되면 끝이다.
나도 이들 모두를 지킬 수는 없다.
“그래서 제가 요 며칠 동안 머리를 계속 굴려 봤는데요, 별다른 수가 없더라고요. 잠입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배를 어떻게 띄우냐 이거죠. 하, 어떻게 해야 할까요?”
헨손이 세상 진지한 눈빛을 내게 던졌다.
나는 간만에 알렌이 아닌 녀석의 머리통을 두드렸다.
빡!
“끄아악!”
알렌이 괜히 옆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그냥 괘씸해서 때렸지만, 사실 헨손에게 이 난관을 뚫을 해법은 없었다.
아니, 그가 아닌 누구에게도 없다.
우리는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다. 아무리 획기적인 계책을 꾸민다고 해도 전원이 이곳을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만큼 항구를 막은 적의 포위망은 단단했다.
지금 상황에 해결책은 어차피 하나뿐이다.
틈이 없다면 강제로 벌려야겠지.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내 무력에 기대어 돌파구를 찾아내는 것이다.
매우 단순하지만, 그 작전은 언제나 성공할 수밖에 없다.
* * *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각.
노을빛이 수면을 밟고 내려서 있었다.
활짝 날개를 펴고 테논스 항구를 포위한 군함의 전열이 붉게 물든다.
“하. 흰 사자 오는 거 맞아?”
포위망을 구축한 지 어느덧 3일 차. 서서히 병사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일기 시작했다.
24시간 동안 돌아가면서 고요한 항구를 경계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동안 흰 사자는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차라리 지금처럼 지루한 게 낫지.”
“아무리 흰 사자라도 이렇게 포위망을 구축했는데 어떻게 오겠어. 오던 길도 돌아가야지.”
“뭘 모르는 소리하네. 상대는 흰 사자야. 대륙 제일검이라고. 익스퍼트 중급만 넘어가도 인간이 아닌데, 녀석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고.”
병사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맴돌고 있었다.
흰 사자가 꽁무니 뺐다는 자들도 있었고, 흰 사자의 등장을 두려워하는 이들도, 또 그가 오는 것을 오히려 기다리는 자들도 있었다.
바다에 멍하니 떠 있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의미 없는 잡담을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그때, 한 병사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근데 저거 뭐냐? 뭐가 오는데?”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저 멀리서부터 무언가가 파도를 거슬러 오고 있었다.
“뭐야? 배인 거 같은데? 떠밀려 온 건가?”
강가에서나 타고 놀 법한 작은 배였다.
“사람이 탄 거 같은데?”
“어이! 이봐!”
“들리겠냐.”
거리가 멀었다. 아직 작은 점처럼 보였다.
하나, 시간이 갈수록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점차 선명해지는 실루엣에 뱃머리에서 소요가 일었다. 잠시 후 지휘관급 기사들이 뱃머리로 나섰다.
“멈춰라-!”
마력을 품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바다를 울린다.
“현재 테논스항의 운항은 금지되어 있다! 뱃머리를 돌리지 않으면 활을 쏘겠다!”
천둥이 울리는 것처럼 목청이 커다랬다.
하나, 그럼에도 배는 멈추지 않았다.
분명 사람이 타고 있음에도 그랬다.
누군가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런 동요 없이 다가오는 배를 보며 병사들의 낯빛이 서서히 굳기 시작한다.
“……뭐지?”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은 탓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예상 가는 인물이 있을 터였지만, 그들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기피했다.
“발사-!”
지휘관의 명령에 맞춰 화살 비가 노을빛을 갈랐다. 주변은 발 디딜 곳 없는 바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피할 수는 없을 터였다.
고슴도치가 되는 게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머리칼을 뒤집는 돌풍이 일기 전까지는.
화아악-!
작은 배로부터 불어온 세찬 바람이 찰나에 온몸을 휩쓸고 지나간다. 정면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세찬 바람. 한차례 광풍이 지나고, 다들 얼굴에 드리웠던 팔을 치웠다.
“…….”
쏘아졌던 화살들이 수면 위에 둥둥 떠 있었다.
병사들의 눈이 일제히 크게 뜨였다.
동그랗게 뜬 동공이 균열이 인 것처럼 파르르 흔들렸다.
힘없이 흩어진 화살 때문이 아니었다.
“비, 빌어먹을! 흰 사자다아아!!!”
하나의 그림자가 수면을 박차며 군함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바다를 밟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다가오는 그 속도 또한 인간이라고 볼 수 없었다.
저 멀리 있던 존재가 어느새 코앞이었다.
그의 뒤로 세찬 물보라가 인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흰 사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콰아아아-!
세찬 돌풍과 함께 거뭇한 그림자가 군함 사이를 가로질렀다. 다들 그 그림자를 쫓기 위해 우왕좌왕했다.
그때 굉음과 함께 선체가 기우뚱 기울었다.
쿠와아아아앙!
거대한 물기둥이 하늘 위로 솟아오른다.
마치 지축이 뒤틀리는 듯했다. 진폭이 큰 너울거림에 다들 균형을 잃고 나자빠지며 바닥을 굴렀다.
“왼쪽이다!”
“측면에 있다!”
“흰 사자다!”
지휘관들의 고함이 곳곳에서 정신없이 터져 나왔다. 병사들은 흰 사자의 그림자도 제대로 보지 못했으나 이미 패닉 상태였다.
“…….”
그런 소란이 아주 잠시 적막에 잠겼다.
모두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토, 토네이도?”
휘말려 솟은 물줄기가 하늘을 향해 뻗어 가며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군함을 삼킬 정도로 거대해진다.
콰아아아아아아-!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바닷물과 주변의 군함들을 끌어들이며 기하급수적으로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뛰어내려-!!”
빠르게 딸려 가는 군함.
휘말려 올라간 물기둥의 크기는 어느새 군함을 집어삼키고 남을 정도로 거대해져 있었다.
그것에 뱃머리가 부딪치기 전에 수많은 병사들이 바다로 뛰어내렸다.
쿠우우웅웅!
물기둥에 딸려간 군함들이 부딪치며 굉음을 내었다. 집채만 한 배들이 순식간에 박살 나며 그 잔해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눈앞에서 재앙이 불어닥치고 있는 듯했다.
갑작스레 바다에 내던져진 병사들은 무슨 상황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그 반경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태반이 그 잔해에 휩쓸려 바닷물에 수장되고 있었다.
“대체 이, 이게 무슨.”
운이 좋게 그 지옥에서 벗어난 병사들은 둥둥 떠다니는 잔해에 매달려 작금의 상황을 볼 수 있었다. 기다랗게 펼쳐져 있던 포위망의 한쪽 날개가 빠른 속도로 붕괴되고 있었다.
그러나 흰 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군함에 비하면 인간은 벌레만큼 작았다.
그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있다.
저편에서 새파란 섬광이 수면 위를 가로지른다.
길게 뻗어 가는 섬광에 바닷물이 짓눌렸다가 그 궤적을 따라 말려 올라갔다.
노을에 물든 세계를 일순 새하얗게 태울 정도의 강렬한 빛 무리.
그리고 이어진 결과는 절로 입을 쩍 벌리게 했다.
저택만 한 군함이 반으로 두 동강이 난 채, 선두와 선미가 각자 반대 방향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절단 난 군함이 수면에 부딪치며 높은 물보라가 인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2m도 되지 않는 칼날로 이루어진 검이 저 거대한 군함을 동강 내다니.
“…….”
물살에 의해 멀찍이 떠밀려 간 제국군들은 그 압도적인 광경에 그대로 몸이 굳었다.
어디론가 도망갈 생각조차 들지 못할 정도로 그 전경에는 현실성이 없었다.
“비상! 비상!”
한편, 흰 사자의 출현 소식에 군항에서 대기 중이던 병력들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새 어둡게 물들어 가는 해변.
저편에서 피어오른 거센 불길이 몰려오는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빨리 움직여-!!”
군항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정박해 있던 군함 위로 빠르게 올랐다.
흰 사자의 출현은 제국군 쪽에서도 대비하고 있던 상황.
그들 또한 흰 사자의 무력을 모르지 않았다.
포위망을 더욱 두껍게 해야 한다.
녀석이 아무리 날뛴다 한들, 이곳을 벗어날 수 없게 완전히 봉쇄해야 했다.
“다들 배에 올라!”
지휘관들은 고함을 지르며 안 그래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병력들을 더욱 재촉했다.
“…….”
소란스럽게 들썩이는 군항.
그 혼란을 틈 타 군항에 잠입하는 자들이 있었다.
도둑고양이처럼 기민하게 움직이는 이들.
제네스를 제외한 일행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