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제213화 테논스 해전 (1)
설원을 내달리던 말들이 일제히 멈춰 선다.
투레질하는 말을 달래며 땅에 내려서는 무리.
연락이 끊긴 베솔로인 후작의 흔적을 쫓기 위해 파견된, 제국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
주변을 둘러본 이들은 드러난 전경에 잠시 말을 잃었다.
헤집어진 땅과 시체들, 그리고 제국의 문장을 품은 마차의 잔해까지.
하얀 눈밭에 반쯤 덮여 있으나,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쉬이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믿기 어려운 일이군.”
일대를 눈으로 훑어본 조장의 입가로 짙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동공이 파르르 떨린다.
대략적인 상황을 봤을 때, 모두 한 자리에서 전멸한 듯했다.
기다랗게 파이고 쪼개져 뒤집힌 지반들.
고작 빙산의 일각만을 보았음에도 이곳에서 얼마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정정해야겠다.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마찬가지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부조장이 입을 열었다.
“인간이 펼친 검이라고 믿을 수 없는 지경이군요.”
“흰 사자가 소드 마스터를 초월했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조장이 옅은 침음을 흘렸다. 설원에 남아 있는 조각들은 다수와 다수가 전투를 벌인 흔적이 아니었다. 한 명의 강자가 다수와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홀로 압도했다.
제국의 정예들로 구성된 이들임에도 그랬다.
주변에 남은 흔적들의 대부분은, 흰 사자가 만들어 낸 검흔이었다.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른 자가 무려 셋이나 포함된 행렬이었음에도 그들이 남긴 흔적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제대로 된 검격도 펼치지 못한 채 무너져 버린 것이다.
개활지인 설원에서 기습이 이뤄졌을 리는 없고.
정면으로 맞붙었음에도 그랬다.
“그저 흔적만으로도 압도되는 기분이라니.”
위협적인 맹수의 발자국을 발견한 듯하다.
남은 흔적을 보고 가늠되는 존재의 크기가 온몸에 전율을 돋게 했다.
직접 검을 마주하지 않았음에도 압도되는 기분.
일대를 샅샅이 수색한 기사들이 다시 말에 올랐다.
“돌아가자.”
후작을 비롯한 이들은 모두 사망했다.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하나, 그것이 없었어도 쉬이 확신할 수 있었을 터였다.
이 광활한 설원에서 흰 사자의 검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흰 사자가 제국으로 향한 걸까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본 그대로 보고해야겠지.”
여기까지 오는 와중, 수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설원에서 제국 쪽으로 향하는 흔적들.
처음에는 후작의 것인 줄 알고 추적했으나 후작의 것이 아니었다. 하나 그 흔적은 후작과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 흔적을 거슬러 이곳에 다다랐다.
어쩌면 흰 사자는 제국을 통해 프렌치아로 돌아갈 작정일지도 몰랐다.
적국을 통해 본국으로 귀환한다는 발상이 터무니없지만, 흰 사자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지만.
* * *
“자, 출발하죠!”
이리엘이 씩씩하게 말의 고삐를 잡았다.
“네, 네스야, 잘 부탁해…….”
유리아는 네스의 등에 반쯤 묶인 채 올라타 있었다.
현재 우리는 마차를 버리고 말을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인원은 나와 네더만, 알렌, 이리엘 그리고 유리아.
총 다섯뿐.
호위 기사들은 모두 아르에리아에서 출발할 때 헤어졌다. 그들은 주르아든 왕국을 통해 복귀할 것이고, 각기 흩어져 프렌치아로 향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제국에서 그들을 추격하기도 어렵거니와, 아마 추격하려고 하지도 않을 거다.
제국의 시선은 어차피 우리에게 쏠리게 돼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베솔로인 후작의 죽음도 파악했을 테지.
그렇다면 아마 우리의 흔적도 발견했을 확률이 높았다.
광활한 설원을 가로지르는 중에 모든 흔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은밀함보다는 속도에 치중했다.
아마 적들은 우리가 제국을 통해 프렌치아로 복귀하려 한다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럼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알렌이 가장 앞서 달리자,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말발굽에 부딪힌 눈발이 하얀 구름처럼 일어났다.
저 멀리 새하얀 산맥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크레본 제국의 북부의 정경.
우리는 최대한 도시에 들르지 않고 남하하고 있었다. 성문을 넘을 신분은 모두 준비되어 있었으나,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이곳은 말 그대로 적진.
외각이라고는 하나 우리의 위치가 탄로 난다면 위험할 수밖에 없다.
과거, 로드르 헤이어서를 구출할 때처럼 전방위적으로 포위당한다면 지금의 전력으로는 위험하다.
물론 제국의 북부 항구인 테논스 항구에 도달할 때까지 그럴 일이 발생할 확률은 적었다.
후작의 죽음을 파악하고 우리의 목적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했을 때 아마 우리는 이미 항구에 도착해 있을 터였다.
물론 도착 이후가 문제이기는 하지만.
* * *
테논스 항구 근방에 주둔하고 있는 검은 고래 군단의 지휘부가 갑작스레 날아든 서신에 크게 들썩였다.
“흰 사자가 오고 있다고?!”
군단장, 오리칸의 시선이 날 선 칼을 품는다.
“아무래도 테논스 항구를 통해서 프렌치아로 향할 생각인 듯합니다.”
“정말이지, 제국의 위상이 바닥에 처박혀 버렸구나.”
책상을 강하게 내리친 그의 커다란 주먹이 부르르 떨린다.
흰 사자는 제국의 사절인 베솔로인 후작과 그 호위대를 전멸시킨 자였다.
일전에 지은 죄들은 또 어떠한가.
사지를 찢어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중죄들이었다.
흰 사자 또한 본인의 죄를 모르지 않을 터.
그런데 그런 자가 감히 제국의 땅을 밟았다.
“우리를 코볼트 새끼들로 보는가 보군.”
오리칸은 눈살을 찌푸리며 분노를 뿜어냈다.
“제깟 놈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혼자서 뭘 어쩔 셈인 거지?”
흰 사자의 위명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근래 제국에서 그를 모르는 자가 있을까.
그의 검이 대륙 제일이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혼자. 게다가 일행 중에는 프렌치아의 공주도 있다지.
그런 것들을 줄줄이 달고 제국의 포위망을 뚫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는 것이 심히 괘씸했다.
이제 제국의 위엄을 보여 줄 차례였다.
“항구를 모두 봉쇄하도록.”
더군다나 이곳은 바다.
검은 고래 군단은 소해의 북부를 지배하는 무수한 함대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녀석이 대륙 제일이라 해도 바다 위에서는 제대로 된 힘을 쓸 수 없을 터.
바다 위에서 육지 위의 맹수가 날뛰어 봤자지.
“녀석을 테논스 앞바다에 수장시킨다.”
그의 검이 아무리 드높다 한들, 군함의 포위망을 뚫고 프렌치아로 갈 수는 없을 터였다.
절대 그렇게 둘 수도 없고.
“허. 이게 무슨 일이람.”
테논스 항구의 앞바다.
기다랗게 펼쳐진 수평선이 무수한 군함으로 덮이고 있었다. 군함이 아치형의 대열을 이루며 항구를 완전히 봉쇄하자 시민들이 크게 동요했다.
“대체 뭐 때문에 이 난리랴?”
특히나 그 때문에 생계가 위협당한 이들은 더욱이 분통을 터트렸다.
당장 오늘부터 배를 띄울 수 없다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프렌치아와 전쟁이라도 하려나?”
“아니, 근데 왜 여기를 막냐고.”
“하긴, 그렇지.”
프렌치아는 소해 건너에 있었다.
한데, 항구를 포위한 군함들은 모두 테논스 항구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내부를 경계하는 모양새.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언제까지 저런다던가?”
“몰라. 경비대에서도 기한을 모른다더만.”
“지X 났네, 지X 났어.”
그리 동요하던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상황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흰 사자가 이리로 온다더구만!”
“나도 들었네!”
“아니, 흰 사자가 여기는 왜?”
“나도 모르지. 아무튼 그래서 난리도 아니래.”
흰 사자가 온다는 소식이 퍼지자, 도시에는 커다란 소요가 일었다.
“아니, 흰 사자라니.”
“그럼 어떻게 되는 거?”
“우리 다 죽는 거 아니야?”
“죽기는 왜 죽어!”
제국에서 무한의 속검의 위명은 지독히 무거웠다. 제국의 자부심이라 불리던 검이었다.
압도적인 대륙 제일검이 바로 그였다.
그의 위명은 거의 신격화되어 퍼져 있었다.
흰 사자는 그런 그를 꺾었다.
제국의 국민들은 흰 사자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게다가 제국의 본토는 지금껏 전쟁터가 된 적이 없다.
그들은 무수히 많은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었으나, 전쟁은 모두 적국에서 이루어졌다.
시민들이 동요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테논스 항구의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했다.
* * *
저벅저벅.
다급함을 숨긴 발걸음이 낡은 복도에 울려 퍼진다. 망설임 없는 걸음이 하나의 방문을 벌컥 열고 사라졌다.
“다녀왔습니다.”
알렌이 비장한 태도로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흐릿한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빡!
“끄악!”
알렌이 머리통을 부여잡고 눈을 부릅떴다.
그러곤 이내 낑낑거리며 입을 열었다.
“끙. 적들의 방어벽이 단단하던데요?”
“그렇겠지.”
우리는 현재 테논스 항구에 도착해 있었다.
창가로 너른 바다를 둘러싼 적들의 배가 잘 보였다. 빠져나갈 틈은 없었다. 그물코를 촘촘히 짠 모양새다.
우리의 행보로 인해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터.
“이제 조만간 저희한테도 손길이 뻗칠 거 같아요.”
현재 검은 고래 군단에서 외부인들을 철저히 조사하고 있다고 했다. 곧 우리에게도 그 손길이 미칠 터. 그들이 포위망을 구축하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바다에 군함들이 배치되고 있었다.
배를 타고 뚫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적들이 단단히 마음을 먹은 거 같아요. 다들 제네스 님을 찾으며 이를 갈고 있더라니까요.”
알렌이 입술을 잘근거리며 초조함을 드러냈다.
“그래 봤자 제네스 님을 어쩌지는 못할 테지만요.”
어차피 이 정도의 대응을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저희들이 문제죠. 저희도 함께 살아서 나갈 수 있겠죠?”
“죽으러 왔냐?”
어차피 저 군함만 뚫고 지나가면 될 일.
“네더만이나 불러와.”
주먹을 들자 알렌이 부리나케 방을 뛰쳐나갔다.
물론 적들의 포위망을 뚫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프렌치아까지 가기 위해서는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항해해야 한다.
조그만 통통배로는 소해를 건널 수 없다.
튼튼한 배가 필요했다.
하나, 항구가 완전히 봉쇄된 상황.
적의 눈을 피해 배를 띄울 방법은 없었다.
적들의 포위망을 뚫는 것이야 내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귀찮은 것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서 그렇지.
조력자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