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제212화 세계 정상회담 (2)
이리엘은 연단에 올라 각국의 인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프렌치아를 대표하여 이 자리에 서게 된 이리엘 세어 프렌치아입니다. 우선, 프렌치아가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도움을 주신-.”
이리엘은 담담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각국의 연설은 그저 의례적인 행사일 뿐이었다.
앞으로 인류를 위해 성심을 다할 것이란, 형식적인 말을 내뱉는 자리.
모두 이익을 셈하는 송곳니는 감춘 채, 인류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말들만 반복하고 있었다.
이리엘 전까지 연설한 모든 왕국의 대표들이 그러했고, 이리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딱, 지금까지는.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인체 실험이라는 끔찍한 죄악을 벌인 나라가 있습니다. 그들은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들을 납치하여 이지를 상실케 하고 근력을 강화하여 병기로 만들어 내는 연구를 자행했습니다.”
웅성웅성.
이리엘의 발언에 고요했던 회의장이 단숨에 깨어나기 시작했다.
다들 늘어지게 기대어 있던 등을 떼며 이리엘의 말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녀가 말하는 바가 제국을 겨냥하고 있음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는 명백히 대륙법을 위반하는 행위이며, 모든 인류가 힘을 합쳐 몬스터들을 검은 숲으로 몰아냈던 과거의 영광을 해치는 일이기도 합니다. 다른 국가의 국민 또한, 한 국가의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면 아무리 전쟁 중일지라도-.”
“지금 무슨 망발을 지껄이는 게냐!”
잠자코 듣고 있던 후작이 벌떡 일어나 고함을 쳤다.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오래 참았다.
제국이 인체 실험을 진행했다는 말은, 제국의 명예를 단번에 땅바닥에 처박을 만한 사안이었다.
그가 가만히 있을 리가.
게다가, 인체 실험은 황제의 직속 친위대인 저스티스 소속의 Dr. 주르하의 주도로 벌어진 일.
그 또한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일 터였다.
“감히 그따위 거짓을 내뱉고도 정녕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지금 한 모든 말에 대해서는 모두 증명이 가능하며, 아르에리아 법정에도 저희가 모은 증거들을 제출해 두었습니다.”
아르에리아 법정은 국가 간의 소송을 다루는 대법원이었다.
아르아나 교단의 교리를 따라 편찬된 대륙법으로 그 죄를 판결하기에, 아무리 제국이라도 그 판결 아래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하나, 그렇다고 대륙의 정세가 바뀔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로 드러난다 한들, 제국은 절대 아니라며 잡아뗄 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쌓아 올린 위상과 명예는 진창에 처박힐 것이다.
이리엘은 후작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외에도 그들이 벌인 만행은 이미 도를 넘어섰습니다. 그들의 압정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고한 프렌치아의 시민들을 학살한 행위가 지난 10년간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지금 어디서 미천한 혓바닥을 놀리는 것이야! 당장 저자를 끌어내거라!”
후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음에도 이리엘은 계속해서 말했다.
“하여 저희는 이와 같은 만행을 벌인 그들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좌시하지 않는다? 푸하하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후작은 억지로 과장된 웃음을 터트렸다.
“감히 근본도 없는 소국 따위가 제국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도 모자라, 제국을 겁박하려는 것이냐? 네깟 것들이 감히 제국에게 무엇을 할-.”
“프렌치아는 현 시간부로 제국을 향해!”
이리엘의 강단 있는 목소리가 후작의 말을 잘랐다.
그녀는 베솔로인 후작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었다.
“전쟁을 선포하는 바입니다.”
.
.
.
.
회담은 후작의 고성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프렌치아 또한 아르에리아 신성왕국으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았다.
평화 연설에서 전쟁 선포는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나, 우리는 이로써 이 회담에 참여하여 얻기로 한 것들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세우고.
제국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
그리고 제국을 향한 전쟁 선포까지.
모두 성공적이었다.
어차피 제국과의 전쟁은 프렌치아 입장에서는 피치 못할 일이었다.
그랬기에 먼저 제국의 만행을 알리고 전쟁 선포를 하며 주도권을 가져왔다.
만약 이 전쟁에서 프렌치아가 승리를 가져간다면.
더 이상 프렌치아의 저력을 의심하는 국가는 없을 터였다.
“후우. 이제 시작이네요.”
이리엘이 가슴께를 쓸며 말했다.
이곳에서의 일정은 모두 끝이 났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제국과의 전면전.
그것이 이제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 무엇도 되돌릴 수 없었다.
“좋은 날은 다 갔고만.”
네더만도 입맛을 다시며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 있던 알렌도 마찬가지.
“이제 진짜 제국 놈들과 결판을 지어야죠.”
알렌은 그 어느 때보다 비장했다.
“그 전에 프렌치아로 무사히 복귀하는 문제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요.”
그의 말대로 우리는 이제 프렌치아로 복귀해야 했다.
프렌치아가 전쟁을 선포했다는 사실은 금세 제국을 강타할 것이었고, 그들은 우리의 복귀를 좌시하지 않을 테지.
* * *
후작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방 안을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녔다.
화가 머리끝까지 끓어오르는 통에 좀처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다시 정돈되었던 방은 또 한 번 폐허가 되어 있었다.
녀석들을 짓밟겠다던 각오와 달리 성과가 하나 없었다.
순간의 모욕은 주었으나, 그것들은 모두 프렌치아를 향한 관심만을 촉진했을 뿐이었다.
온갖 오물과 치욕은 제국이 뒤집어쓴 꼴이 되었다.
그 또한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하나, 별다른 방도가 없다.
흰 사자의 무력을 감당할 수가 없는 탓이다.
때마침 문이 열리며 파케가 복귀했다.
후작이 다급히 물었다.
“어찌 되었느냐.”
“말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빠르게 본국으로 돌아간다.”
일단 지금까지의 일을 제국에 서신으로 보냈다.
하루가 급했다.
감히 미천한 것들이 제국에 전쟁 선포를 하다니.
몇 차례 승전으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의 속셈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이미 벌어질 전쟁.
어떻게든 주도권을 가져오자는 속셈이겠지.
하나, 모든 건 결국 결과가 말해 줄 터.
지금은 흰 사자 하나를 믿고 날뛰고 있다지만, 곧 제국의 압도적인 힘에 짓밟힐 나라였다.
아무리 흰 사자가 소드 마스터를 초월했다는 말이 나돈다고 하더라도, 제국과 프렌치아는 어른과 어린아이의 싸움이라 봐도 모자랄 정도로 병력의 차이가 컸다.
녀석이 그 수많은 병력을 홀로 어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파케가 나가고, 잠시 후.
후작을 비롯한 제국의 기사들은 곧장 제국으로 향했다.
프렌치아 놈들은 꽁지가 빠지게 아르에리아를 벗어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자신들 또한 하루 빨리 수도로 돌아가 이 상황을 정식으로 보고해야 했다.
서면에 차마 담지 못한 말들이 많았다.
이제 곧 전쟁이 벌어질 터였다.
걸음을 재촉한 이들이 아르에리아의 국경을 벗어나는 건 금방이었다.
제국의 문장을 품은 마차는 힘차게 나아갔고 그들의 뒤로 설원의 눈발이 휘날렸다.
“워워!”
지칠 줄 모르고 질주하던 마차가 갑작스레 속도를 줄였다.
“무슨 일이냐!”
후작이 신경질을 냈다.
창을 닫고 있었으나 설원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음을 알았다.
속도를 멈출 일이 없었다.
“그, 그것이 누군가 평원을 막고 있습니다.”
마부의 당황한 듯한 음색.
아니, 널따란 평원을 누군가 막고 있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황당해하는 후작에게 굳은 얼굴의 파케가 다가왔다.
“……아무래도 흰 사자인 거 같습니다.”
“뭐라!”
화들짝 놀란 후작은 체통도 잊은 채 창밖으로 목을 기다랗게 빼 정면을 바라보았다.
과연, 기사의 말대로 누군가 평원에 서 있었다.
아직 거리가 있었으나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비, 빌어먹을! 저 새끼가 왜 저기에!?”
당황한 그는 말까지 더듬었다.
흰 사자가 자신들을 쫓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다급히 프렌치아로 향하는 길에 올랐을 거라 여겼으니까.
또한, 혹시나 하여 그들이 먼저 떠났음을 확인하고 출발했다.
그런데 그 흰 사자가 길목을 막고 있다니.
마치 하늘 위에 먹구름이 인 듯했다.
이 너른 평원에서 저자를 피해 갈 방법은 없었다.
스릉, 스르렁.
곳곳에서 검이 뽑히는 소리가 울었다.
후작 또한 검을 쥐고 마차에서 내렸다.
저 멀리 있던 흰 사자는 어느새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참으로 귀신같은 움직임.
긴장감으로 팽팽히 당겨진 적막이 흐른다.
온 세상이 그의 등장에 숨을 죽인 듯했다.
뿌옇게 흩어지는 입김 사이로 서늘한 목소리가 흘렀다.
“프렌치아를 모욕한 죄를 받으러 왔다.”
아르에리아에서 수없이 마주친 흰 사자였지만, 그를 제어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설원에서 마주치니 맨손으로 포식자 앞에 선 기분이다.
명백한 죽음이 눈앞에 있었다.
저자의 발톱을 피해 낼 방도는 어디에도 없다.
후작은 호흡을 깊게 내쉬며 검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의 검력을 알았다.
여기 있는 누구도 살아서 설원을 벗어날 수 없으리라.
죽음을 예감한 후작은 지지 않고 소리쳤다.
“감히 제국의 길을 막고 있는 저 천한 것의 목을 베어라!”
기사들 또한 후작의 명을 따라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에게 쏘아졌다.
모두 죽음을 도외시한 전력을 뿜어냈다.
흰 사자는 여유로운 태도로 그들을 맞이했다.
수는 적지만 제국의 정예들.
쉽게 마주할 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에 맞서 흰 사자의 검이 그어진다.
일검에 공간 자체를 짓눌러 버리던 그 무지막지한 검력이 다시금 폭발했다.
콰과과과과광-!
설원을 가르는 무자비한 검격.
빛의 해일이 눈발을 밀어버리며 쏟아졌다.
그 궤적을 따라 새하얀 설원이 갈라지고 붉은 핏물이 점점이 번진다.
날 선 검을 품었던 기사들이 핏덩이가 되어 설원 위에 내렸다.
순식간에 흰 사자와 다수의 기사들이 얽혀 든다.
후작까지 포함하면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자만 해도 무려 셋이었다.
칼날의 부딪침이 천둥이 되어 설원을 울렸다.
고요했던 설원이 묵직한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하나, 승부의 추는 빠르게 기울었다.
설원을 밝히는 섬광이 명멸할 때마다 기사의 머릿수는 하나 이상씩 줄어 갔다.
콰르르릉-!
그때 새하얀 설원을 가로지르며 뻗어 가는 섬광이 있었다.
쭉 뻗어 가는 광채를 따라 새하얀 눈발이 말려 올라가 휘날린다.
널따란 설원에 두 다리로 서 있는 건 어느새 베솔로인 후작밖에 없었다.
“……감히 네놈이 이따위 짓을 벌이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입가로 검붉은 핏물을 흘리며 후작이 짓씹듯 말했다.
충혈된 눈동자가 흰 사자를 죽일 듯 직시한다.
죽음 앞에서도 그의 분노와 오만함은 여전했다.
흰 사자는 검으로 답을 대신했다.
촤악-!
수평으로 뻗어진 검격이 후작의 목을 치고 지나갔다.
분리된 머리통은 붉은 핏물에 감기며 허공으로 치솟았고, 생을 잃은 몸뚱이는 모로 기울어져 설원에 힘없이 쓰러졌다.
제네스의 입가로 뿌연 입김이 흩어졌다.
상황을 마무리한 제네스는 고개를 돌려 저편을 바라보았다.
일행들이 그곳에 있었다.
프렌치아로 돌아가는 길은 주르아든 왕국을 통해 가지 않을 셈이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제국의 테논스 항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