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1화
제211화 세계 정상회담 (1)
책상 위에 놓인 책과 깃펜, 책꽂이, 화분에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하나 후작은 그 죄 없는 것들을 일거에 쓸어버렸다.
그러고는 깨끗해진 책상을 뒤집어엎었다.
“크아아아-!”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은 후작은 가구들을 부수며 포효했다.
깔끔하게 꾸며져 있던 방은 금세 폭풍을 품은 듯 폐허가 되어 있었다.
후작은 그 중심에서 빈주먹을 쥐며 부르르 떨었다.
-사술이었다고 의심한 것은 내 사과하지.
아무렇지 않은 척 건네었지만, 속에서는 용암이 들끓고 있었다.
활화산을 집어삼킨 거 같다.
태어나 생전 처음으로 느껴 본 치욕스러운 굴욕감.
당장에라도 흰 사자를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은 심경이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이 감히 이 몸을……!”
후작이 콧잔등을 들썩이며 짓씹듯 각오를 다졌다.
그런 그의 눈가로 제네스의 오만방자한 얼굴이 생생히 그려진다.
한데.
‘대체 어떻게 그 나이에 그 경지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고작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30대 중반을 넘지는 못했을 터.
흰 사자가 그렇게 어린놈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다.
저리 새파란 놈이 레트로이나 6검을 단신으로 죽이고, 무한의 속검까지 넘어섰다니.
직접 그 검력을 보지 못했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
‘……어찌해야 한담.’
그의 검을 상기하는 순간, 터질 것처럼 끓어오르던 분노가 짜게 식는다.
지금으로서는 그 전력을 넘어설 방도가 없었다.
현역에서는 물러났지만, 그 또한 최상급 경지에 오른 기사.
흰 사자의 검력의 무게를 모르지 않았다.
그 파케마저 일검에 제압하는 위력의 검이라니.
마치 태양이 눈앞에서 피어나는 듯했다.
그만큼 강렬한 빛의 방출.
그 후에 이어진 땅을 꺼트리는 무지막지한 검압까지.
정말이지 압도적인 격이 차이.
그것은 들끓던 분노가 삼켜질 정도로, 도를 넘어선 아득함이었다.
‘그러나 프렌치아는 다르지.’
후작의 눈빛이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그래 봤자, 그는 혼자다.
아무리 그의 검이 하늘에 닿았다고 해도, 홀로 제국을 감당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프렌치아는 그의 발목을 잡는 무거운 족쇄가 될 터. 녀석이 프렌치아에 속해 있는 한 그는 목줄을 찬 사자 새끼나 다름이 없다.
후작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지금의 모욕감을 가슴에 새겼다.
‘어떻게 해서든 이 굴욕을 되갚아 주마!’
그리고 흰 사자의 등장에 세차게 동요하는 건 비단 후작뿐만이 아니었다.
아르에리아 전체가 크게 들썩일 정도로 흰 사자의 소문은 들불처럼 번져 가고 있었다.
“아니, 흰 사자가 그렇게나 젊다고?”
“20대 후반 정도라고 하더군.”
“그게 말이 되는가?”
흰 사자가 생각보다 훨씬 젊다는 사실도.
“그 파케를 일검에 제압했다네!”
“내 평생에 그런 검은 본 적도 없다고!”
“정말이지 세상이 폭발하는 줄 알았다니까!”
흰 사자가 파케를 제압한 방식도.
사람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이 아니어도 프렌치아와 제국과의 친선 대련에 관심이 몰려 있던 차였다.
대륙의 수많은 왕국의 인사들이 그 대련에 관심을 두었다.
그 와중에 베일에 싸여 있던 대륙 제일검이 등장했다.
모든 이목이 프렌치아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제국이 질 줄이야.”
“프렌치아의 저력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그려.”
“괜히 제국의 그늘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니까.”
비록 첫 번째 경기에서 기권했다지만, 그 사실은 이미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륙 제일검의 등장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프렌치아의 위상은 날이 갈수록 자연스레 높아지고만 있었다.
* * *
“이게 다 제가 아주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제네스 님의 정체를 까발린 덕분 아닙니까!”
알렌이 어깨를 들썩이며 한껏 으스댔다.
그의 말대로 알렌이 적당한 시점에 나서 주어 모든 상황이 부드럽게 흘러갔다.
“베솔로인 후작이 아무렇지 않은 척 사과하는 걸 들으니 그냥 10년 묵은 체증이 시원하게 내려가더군.”
“저도요. 어찌나 시원하던지. 면전에 대고 크게 웃고 싶더라니까요.”
이리엘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거렸다.
확실히 꼴좋기는 했다.
알렌이 말했다.
“이제 제네스 님이 흰 사자란 걸 대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겠죠?”
“저들이 모두 돌아간다면 그렇게 되겠지.”
대련을 보던 수많은 왕국의 인사들.
그들의 입은 알아서 오늘 있었던 일을 전할 것이다.
알렌의 말마따나 대륙에 내 존재를, 나아가 프렌치아를 모르는 이가 없게 될 테지.
“후작 덕분에 일이 엄청 쉬웠네요.”
이리엘이 환히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프렌치아가 하나의 자주국임을 알리기 위해 이곳에 왔다.
후작이 요란스럽게 판을 만들어 준 덕에 그 목적은 이미 달성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까 말일세. 이거 감사의 인사라도 해야 하나. 어떻게 이렇게 판을 잘 깔아 주었는지. 나는 전하께서 제국에 심어 놓은 사람인 줄 알았지 뭔가.”
네더만이 후작이 들으면 까무러칠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해 댔다.
하지만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가 이렇게 판을 키워 주지 않았다면 프렌치아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을 터였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네더만이 말을 이었다.
“지금쯤 그의 낯짝이 얼마나 구겨져 있을지 참으로 궁금하고만.”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우리는 다음 날 그의 낯짝을 볼 수 있었다.
너른 벽면에 각국의 국기가 일렬로 나열되어 있다.
그 앞으로는 회의를 진행할 의장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또 그 앞으로는 각국의 인사들이 앉을 좌석이 부채꼴처럼 펼쳐져 계단식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회담장에는 나와 이리엘만이 참여했다.
보좌관 한 명만을 대동할 수 있는 탓이다.
속속들이 도착하는 귀빈들이 모두 준비된 좌석에 착석해 갔다.
이미 각국의 자리는 정해져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후작을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우리를 본 체도 않고 그저 앞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다양한 감정을 섞어 놓은 얼굴을 가지고 있던 그와 달리, 오늘의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해 보였다. 각국의 인사들과 여유롭게 인사하며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하나, 그 속이 용광로처럼 부글거리고 있다는 걸 누가 모를까.
그렇게 모두가 착석하자, 잠시 후 의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성국가, 아르에리아의 교황 요하네.
순백의 옷에 새하얀 수염을 가진, 신성함의 결정체와 같은 분위기를 가진 자였다.
“그럼 제3회 세계 정상회담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긴 기도가 있은 후, 회담은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드레어스 웨이브가 발생할 때마다 진행되었던 세계 정상회담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세계 정상회담은 3일에 걸쳐 진행되는데, 첫째 날에는 안건들을 선정하여 투표하고 두 번째 날에는 투표 결과에 따라 진행할 사안들을 구체적으로 논의한다. 마지막 날에는 안건의 최종 발표가 있고, 인류의 평화를 위한 각국의 연설을 끝으로 회담은 마무리된다.
그리고 그 모든 일정의 주관은 신성왕국, 아르에리아가 맡게 된다.
회의를 통해 가결해 나가는 안건들은 추후에 있을 드레어스 웨이브의 대비는 물론이거니와 최초의 벽 보수 비용과 용병의 낙원 지원 금액부터 검은 숲의 연구를 위한 연구 비용 지원까지, 그 과제들이 다양했다.
하나 그럼에도 회의는 교황과 그를 보좌하는 대신관들에 의해 막힘없이 진행되어 갔다.
애초에 발언권을 가진 국가가 몇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신성왕국의 제안과 제국의 발언이 같다면 안건은 조금의 방지 턱도 없이 진행되었다.
사실 두 나라만 회의에 참여해도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렇다 보니 첫날의 안건 회의에서 가장 많은 목소리를 낸 건 베솔로인 후작이었다.
“고작 3천 정도의 병력을 파병한 것으로 국가의 의무를 질 수 있다? 그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오. 그 정도로 최소한의 의무를 수행했다니. 만약 이것이 선례로 남는다면 후에는 다들 각자의 사정을 말하며 파병을 기피할 것이 분명하오.”
그는 프렌치아를 겨냥하여 여러 안건에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하나, 그래 봤자 회담에서 가결되는 안건은 모두 다음부터 적용되는 사안.
그는 그저 프렌치아가 한 나라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점을 꼬집고 싶을 뿐이었다.
후작은 계속해서 모든 안건마다 프렌치아를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언급하며 물고 늘어졌다.
그런 부분에 있어 우리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따지고 들자면 할 말이 많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리 주절거려 봤자 그의 귓가에 닿을 리 만무했다.
그가 아무리 프렌치아를 깎아내리려 한들, 어차피 각국은 각국의 사정에 맞는 자신들만의 결론을 낼 것이다.
그리고 후작이 아무리 이곳에서 입을 놀려 봤자, 여기 있는 자들이 왕국으로 돌아가 전할 이야기는 어차피 프렌치아가 제국을 꺾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참 말이 많았다.
“참으로 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소. 나라의 권리도 갖지 못하는 자들이 이 자리에 섞여 있다니. 이것은 제국을 포함하여 다른 왕국을 무시하는 행태와도 같지 않소. 귀족들의 밥상에 천민이 껴서 앉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이오!”
어찌나 말이 많은지, 신의 말씀을 전하는 교황마저 질렸다는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제국의 의견은 잘 알았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고-.”
그렇게 첫째 날이 지나고 맞은 다음 날.
회의의 흐름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제국이 불만을 토로하면 아르에리아에서 중재하는 방식이었다.
나로서는 인내심을 시험당하는 지루한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날이 되었다.
“지금부터는 각국의 연설이 있겠습니다.”
각국의 인사들이 인류의 평화를 위해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겠다는 형식적인 입장을 발표하는 시간.
마침내 세계 정상회담의 마지막 행사였다.
이제 각국의 연설을 끝으로 세계 정상회담은 종료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르에리아 조약의 효력도 끝이 난다.
그 말인즉.
대륙의 전쟁을 억제하던 힘이 곧, 완전히 사라진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