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화
제210화 작은 전장 (4)
후작은 패배 후 들어오는 포주아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네더만의 위명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패배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포주아의 입가에서 변명이 맴돌았지만, 밖으로 뱉어 낼 수 없었다.
마지막 그 검격.
바람이 절벽의 틈새로 불어닥치듯이 빈틈을 찾아 빨려 들어오던.
그 한 번의 궤적으로 포주아는 상대가 자신보다 한참 윗줄의 기사임을 알았다.
솔직히 호위대장인 파케가 나섰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던 상황.
오히려 자신이 나서서 패배한 게 제국으로서는 이득이었다.
“수고했다.”
파케의 말에 포주아는 고개를 숙였다.
파케 또한 네더만의 격을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물론, 후작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프렌치아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후작은 그것이 매우 불쾌했다.
“이번에는 기권을 절대 받지 않을 것이야. 제국의 격을 여기 있는 모두에게 확실히 각인시켜 주거라.”
“네. 알겠습니다.”
파케는 묵례하며 각오를 다졌다.
제네스란 애송이를 마지막 대련 상대로 뽑은 선택을 철저히 후회하게 만들어 줄 작정이었다.
그는 각오를 다지며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맞은편에서는 연회장에서 보았던 젊은 사내가 올라오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은 무심한 표정.
그에게선 일말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기권하려는 속셈이겠지.’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둘 자신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기권을 받지 않을 것이오.”
파케는 그가 기권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사제에게 말했다. 사제는 반사적으로 제네스를 돌아보았고 제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케의 눈빛에 의문이 스쳤다.
기권을 막았음에도 일말의 동요조차 없다.
만약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 있는 것이라면 그 배포만큼은 인정할 만하다.
“그럼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두 분 자리로 가 주십시오.”
간단한 규칙을 이야기한 사제가 둘의 간격을 벌렸다.
파케는 물러서기 전, 냉엄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프렌치아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주마.”
“할 수 있다면.”
이 건방진 자식이.
파케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빠직 솟아올랐다.
참으로 오만방자한 태도였다. 무심히 돌아가는 제네스를 보며 파케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 틀림없었다.
프렌치아 같은 놈이 따로 없다.
파케는 잘됐다는 생각을 하며 검을 꺼내 들었다.
설설 기며 오줌을 지리는 것보다야 기고만장하게 덤벼드는 것이 나을 터였다.
그래야 짓밟는 맛이 살 게 아닌가.
“그럼 대련 시작하겠습니다!”
두웅!
커다란 북소리와 함께 시작된 대련.
하나, 둘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관중석은 어수선했다.
이미 대련의 결판이 났다고 보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다들 대련에 집중하기보다 제네스가 얼마나 무참히 짓밟힐는지를 가늠하며 떠들고 있었다.
앞으로 그려질 그림은 빤했으니까.
예상대로 제네스란 애송이는 발이 얼어붙었는지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가만히 서서 뭐 하는 게냐.”
파케가 그 모습을 보며 이죽거렸다.
여전히 표정 변화는 없지만, 자신의 기세에 짓눌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전력을 다해 검을 뿌려도 모자랄 판에 고목처럼 멀뚱히 서 있는 꼴이라니.
“그런 넌 가만히 서서 뭐 하는데.”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끝 모를 무례함이었다.
파케의 얼굴이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다.
“선수를 양보해 주려 했건만,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받겠다면 어쩔 수 없-.”
발끝에 힘을 주고 적에게 쇄도하려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대기를 자르며 들어오는 검격이 있었다.
슈아아아아악!
적의 검이었다.
준비 동작도 없었다.
녀석의 신형이 먼지처럼 흩어지는 순간, 검이 눈앞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흐릿한 빛 무리가 망막에서 흔들린다.
그리고 어느새 칼날은 그의 목에 겨눠져 있었다.
콰아아-!
검의 궤적에 끌려온 바람이 연무장 전체를 휩쓸며 널따랗게 퍼졌다.
멀리 떨어진 관중들의 머리칼을 일제히 들어 올릴 정도의 엄청난 돌풍.
마치 기다란 바람이 일대를 훑고 지나간 듯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이지 창졸간의 일이었다.
“…….”
장내에 분 바람이 소리까지 끌고 갔는지, 관중석은 짙은 적막에 잠겼다.
눈 깜박하기도 전에 승부가 갈렸다.
그 누구도 지금 상황을 제대로 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일련의 과정 없이 결말이 정해졌다.
길가다 뺨이라도 후려 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더군다나 그 상대는 파케였다.
제국의 호위대장을 맡고 있으며, 최상급의 극의에 이른 자.
여기 있는 누구도 그의 이름값을 모르지 않았다.
한데, 그런 그를.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가.
이름 한번 들어 본 적 없는 그 애송이가.
일 검에 제압해 버렸다.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게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서서히 관중들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웅성거림이 이곳저곳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하나, 이 상황이 가장 당황스러운 건 바로 파케 본인이었다.
그래, 방심한 건 맞다.
적을 자신의 한참 아래로 생각하고 있었다.
적의 공격에 대한 대비도 전혀 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억울하기도 하다.
말하고 있는데 검을 휘두르다니.
하지만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술에 맛이 간 상태에서 주정을 부리고 있었을지언정.
이렇게 지는 게 말이 되는가?
단, 일검에?
“승부는 난 거 같은데.”
“아아. 예.”
제네스의 말에 벙쪄 있던 사제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이번 대련의 스, 승자는 프렌치아입니다!”
사제의 우렁찬 목소리에 제네스는 그제야 검을 거두었다.
승패가 판가름 났음에도 박수와 함성은 없었다.
파케는 돌아서서 멀어지는 제네스를 엉거주춤한 자세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입술이 달싹이는데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멈춰라-!”
그때, 뒤편에서 베솔로인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사술을 쓰는 것이야!”
그는 얼굴을 붉힌 채 연무장 위까지 오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마력을 품은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후작 또한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기사.
비록 나이가 들어 기량이 정점을 지나 하향세를 그리는 중이나, 그는 여전히 건재했다.
하나, 파케는 그런 그보다도 강한 제국의 검이었다.
그런데 저딴 애송이에게 일검에 당한다고?
사술이 분명했다.
어떤 수작을 부리지 않고서는 절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제네스의 싸늘한 시선이 뒤로 돌았다.
“어떤 사술을 썼다는 거지?”
“네놈들의 얄팍하고 더러운 수를 어찌 알까! 하나, 이 결과가 말도 안 된다는 것쯤은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음이야!”
귀족의 품위에 어긋나는 억지스러운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 그 누구도 후작을 비방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요가 일고 있었다.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파케를 일검에 제압했다는 것보다 사술을 부렸다는 후작의 주장이 더 믿음직했으니까.
픽 웃은 제네스는 선심 쓰듯 말을 이었다.
“못 믿겠다면 한 번 더 보여 줄 수 있는데. 네가 대신 검을 들 테냐?”
“뭐? 너? 이런 무례한 종자를 보았나.”
감히 자신에게 반말을 뱉어 대는 제네스에 베솔로인 후작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베솔로인 후작님!”
파케가 당장 검을 쥐려는 그를 자중시켰다.
제네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뭐, 내가 넓은 아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도록 하지. 둘 중 아무나 덤벼도 좋다. 원한다면 둘이 함께 덤벼도 되고.”
참으로 모욕적인 언사였다.
그들 사이에 낀 사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었다.
화를 꾹 누른 파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회를 준다면 내가 한 번 더 하지.”
베솔로인 후작도 화를 억지로 삭이고 있었다.
건방진 자식이 본인의 입으로 한 번 더 대련의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수치스럽지만 지금 이 치욕을 갚기 위해서는 그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 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사제가 제네스의 눈치를 살폈다.
제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대로 마무리한다면 사술이 어쩌고저쩌고 하며 뭘 증명하겠답시고 복잡해진다.
깔끔하게 한 번 더 보여 주는 게 낫다.
이들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뭐, 패배를 해 놓고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떼를 쓰니 어쩔 수 없지.”
파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쨌거나 패한 건 사실.
굴욕적이지만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 똑똑히 지켜보고 있으니 사술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좋은 생각이군. 단, 만약 이번에도 내가 승리할 경우 정식으로 사과를 해 줘야겠는데.”
“뭐라?”
“져 놓고 사술이라고 몰아가다니. 제국의 치졸함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난 거 아닌가? 그럼에도 사과도 않고 넘어가겠다고? 당신의 입은 그 정도로 가볍나?”
파케는 후작에게 눈빛을 보냈다. 자신을 믿어 달라는 의미였다.
후작은 제네스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리해 주지.”
그는 제네스가 사술을 썼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만약 이번에도 사술을 쓴다면 어떻게든 그것을 밝혀내고자 했다.
제네스가 사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사제는 크게 소리쳤다.
“그럼 재대결을 시작하겠습니다!”
사제의 선언에 관중석이 한차례 일렁였다.
하나, 이내 적막이 찾아든다.
기대 하나 없던 일전과 달리 모두 두 눈을 부릅뜨고 연무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두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 엄청난 사달이 일어날 거란 걸.
둥!
다시 북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파케의 칼날에서 오러가 피어올랐다.
그의 몸짓에서는 절대 방심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다.
최상급 극의에 오른 자의 전력에, 대기가 요동치듯 울었다.
다들 그 막대한 기파를 느끼며 숨을 죽였다.
쾅-!
전력을 다해 내달리는 파케.
그의 걸음 뒤로 동그란 충격파가 터지는 동시에, 몸이 증발하듯 사라진다.
뿌연 분진이 날리고, 제네스 앞에서 불쑥 솟아난 그는 어느새 검을 그어 가고 있었다.
그런 파케의 움직임을 좇은 이들은 일제히 헛숨을 들이켰다.
처음부터 전력을 쏟아부은 일검.
환히 타오르는 섬광이 금방이라도 제네스의 몸뚱이를 조각낼 듯했다.
그때였다.
제네스의 손아귀에서 휘황한 섬광이 피어난 것은.
시야를 삽시간에 채우는 빛 무리가 한순간에 폭발했다.
‘?’
전력을 다해 검을 그어 가던 파케는 눈앞에서 솟구치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온 세상이 빛으로 가득 차는 듯했다.
동시에 온몸을 짓누르는 압력이 전해진다.
전력을 다하던 검격이 일순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세상이 멈춰 버린 것도 같았고 하늘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몸이 무거운 쇳덩이들을 매달고 심해에 가라앉는 듯하다.
그저 눈앞을 가득 채운 빛 무리를 바라보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내, 그 찬란한 섬광이 촛불 꺼지듯 훅 사라졌다.
쿠와아아아앙!
일대의 지반이 통째로 가라앉으며 굉음이 일었다.
그로 인한 충격파가 널따랗게 퍼지며 세찬 돌풍을 동반했다.
관중들 모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릴 정도로 거셌다.
분진을 품은 모래바람이 폭풍처럼 지나갔다.
멍한 눈을 끔벅거리는 관중들의 머리칼이 멋대로 헝클어져 있었다.
“…….”
장내는 다시금 고요를 되찾았다.
그 중심에 선 파케는 어느새 자신의 목에 겨눠져 있는 서늘한 검날을 볼 수 있었다.
분진이 가라앉고 서서히 드러나는 연무장.
주변의 바닥이 거대한 무언가에 짓눌린 듯 푹 꺼져 있었다.
검압만으로 만들어 낸 말도 안 되는 전경.
이게 가능해?
다들 꿈을 꾸는 것처럼 그 장관을 바라보았다.
지독한 적막 속에서 제네스가 말했다.
“이봐.”
“아. 예예!”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몸을 부르르 떤 사제는, 다시 한번 제네스의 승리를 알렸다.
“우와아아아-!”
이어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관중석에서 터져 나왔다.
프렌치아의 승리를 축하하는 환호가 아니었다.
눈앞에서 본 그 무지막지한 검력에 절로 환호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검을 익히지 않은 자도 제네스가 보여 준 검이 무지막지하다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대체 무슨?”
베솔로인 후작은 그 광경을 전 재산이라도 잃은 도박꾼처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동공이 파르르 흔들린다.
그 또한 똑똑히 보았다.
일대를 집어삼키는 말도 안 되는 검력을.
그것은 사술로 벌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해가 안 된다.
저 새파란 애송이가 대체 어떻게?
그때 프렌치아 진영에서 한 사내가 연무장으로 올라오며 소리쳤다.
“사술이 아닙니다!”
마력을 품은 그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레 집중되었다.
그는 프렌치아 진영에서 나왔던 첫 번째 대련자.
모두 그의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다들 지금 상황에 대해 알고 싶은 점이 많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입이 열렸다.
“이분이 바로! 프렌치아에서 흰 사자로 불리는 대륙 제일검이십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