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제209화 작은 전장 (3)
“그럼 크레본 제국과 프렌치아 왕국 간의 친선 대련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진행을 맡은 사제의 말에 관중석에서는 일제히 환호성이 일었다.
“어느 쪽이 이기려나?”
“당연히 제국이지. 친선 대련이라고는 하지만 흰 사자도 없이 프렌치아가 어찌 제국을 꺾겠는가.”
“하긴 3판 2선승이니, 무리이기는 하지.”
드러난 객관적인 전력과 명성만 보아도 제국의 우세가 명백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반대의 결과를 기대하는 이들도 꽤 되었다.
“프렌치아의 인사들이 바보도 아니고 뻔히 질 대련을 왜 하겠는가. 무언가 수가 있겠지.”
“그러니까. 그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게 단순한 친선 대련도 아니고.”
명목상으로야 친선이지, 이 대련은 제국과 프렌치아의 정면 승부나 다름이 없었다.
모두 이 대련을 전장의 축소판으로 보았다.
패배의 무게는 어느 누가 되었건 무겁게 짊어지게 될 터였다.
그럼에도 프렌치아는 이 대련에 응했다.
제국의 도발이 있었다지만, 물러서지 않고 대련을 받은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때문에 관중석은 열띤 토론장 같은 분위기였다.
하나, 이 이야기의 중심인 두 진영은 오히려 차분했다.
각기 상석에 앉은 베솔로인 후작과 이리엘에게선 조금의 긴장감도 보이지 않았다.
둘 모두 본인들의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건방진 계집 같으니라고.”
이리엘의 여유로운 태도를 본 후작의 입매가 사납게 비틀렸다.
여유를 가장한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승리를 자신하는 듯한 표정.
그런 이리엘을 당장에 짓밟아 주고 싶은 심경이다.
‘그 자신감이 언제까지 가나 보자.’
아무래도 대진표를 믿고 있는 거겠지.
마지막에 출전하는 제네스란 놈은 새파랗게 어린 자였다.
파케를 감당할 수 없으니 첫 번째와 두 번째에서 결판을 내겠다는 건데.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괘씸했다.
후작은 첫 번째 대련자인 보르고를 향해 말했다.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철저히 짓밟아 주거라.”
“반드시 승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보르고가 힘 있게 묵례하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 또한 초반에 끝내겠다는 적들의 건방진 계책을 알았다.
하나, 애초에 제국의 목표는 모든 대련에서의 승리.
그렇기에 보르고는 자신이 있었다.
익스퍼트 상급의 극의에 올라 있는 그는, 최상급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용 사냥꾼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상대할 만한 존재가 없었다.
“그럼 양측 첫 번째 대련자분들 입장해 주십시오.”
비장한 표정의 보르고가 연무장의 중심으로 걷는다.
비록 전력이 우위에 있다고는 하나 그에게는 일말의 방심도 없었다.
전심전력을 다한다.
그것이 그의 각오였다.
그리고 적진에서도 결연한 태도의 사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솨아.
흐르는 바람을 타고 적의 기세가 밀려온다.
보르고의 눈썹이 절로 꿈틀거렸다.
‘프렌치아에 저런 자가 있었나.’
생각보다 강맹한 기파였다.
아직 검을 뽑지도 않았는데 마치 칼끝이 심장에 겨눠지는 듯했다.
첨예하게 정제된 기파가 만만치 않다.
생각보다 날카로운 기세에, 보르고 또한 마음을 단단히 잡았다.
적의 전력이 가늠되지 않는 상황.
그저 가볍게 볼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럼 대련 시작하겠습니다.”
“잠깐.”
그가 대련을 진행하려는 사제의 말을 막아 세웠다. 모두의 관심이 그에게 집중되는 순간, 그의 입이 열렸다.
“첫 번째 대련은 기권하겠습니다.”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던 공기가 허무하게 흩어졌다.
모두의 눈가에는 물음표가 떠올라 있었다.
대련을 하지도 않고 기권하겠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였다.
“네?”
사제 또한 똑똑히 그 말을 들었음에도 반문하며 재차 의사를 확인해 왔다.
“이대로 기권한다면 첫 번째 대련은 프렌치아의 패배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기세만 마주해 보아도 제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군요. 기권하겠습니다.”
알렌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관중들은 그런 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금 전 꽤나 날카로운 기도를 만들어 냈었기에 더욱 그랬다.
당황스러운 건 보르고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기사란 자가 패배가 무서워 도망치는 것이냐!”
친선 대련에서 기권이라니.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작전상 첫 번째 대련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대련이었다.
세 번째 대련자인 호위대장, 파케를 새파란 애송이가 이길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예상치 못한 적들의 기권에, 제국의 진영에서도 소요가 일었다.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것인가?”
“우습군.”
후작은 프렌치아의 의도를 단숨에 꿰뚫은 듯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저들은 애초에 우리를 이길 생각이 없었던 게다. 그러니 그저 꼴사납게 지고 싶지 않은 거겠지.”
저들은 네더만에게 모든 것을 걸 작정으로 보였다. 그리고 나머지 두 대련을 기권패로 마무리한다면 적어도 꼴사납게 지지는 않을 테지.
하나, 그것은 완전한 오판이었다.
친선 대련에서 기권이라니.
아무리 처참하게 무너질지라도 정정당당하게 무너지는 것이 오히려 기사로서 명예를 지키는 일이었다.
“고작 이따위 짓을 하려고 그런 표정을 짓고 있던 게냐.”
어린 계집치고 의연하다 생각했거늘.
이렇게 자기 얼굴에 똥물을 끼얹을 줄이야.
관중들의 웅성거림이 귓가에 쌓였다.
“참 나. 이게 무슨 경우래?”
“기권을 한다고?”
“친선 대련을 하겠다는 거야 뭐야?”
“대체 무슨 생각이지?”
다들 프렌치아의 옹졸함을 비웃고 있었다. 승부의 향방이 안 그래도 우세했던 제국으로 완전히 기운다.
혹시나 프렌치아에 어떤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이들조차 혀를 차며 등을 돌렸다.
앞으로 남은 두 번의 승리를 자신하기에는 세 번째 대전자의 이름이 생소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흰 사자가 아닐까 하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새파랗게 젊은 얼굴을 보고 모두 버리는 패로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프렌치아가 첫 번째와 두 번째 대련에 승부를 걸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기권이라니.
관중들은 한껏 야유를 던지며 엄지를 뒤집었다.
“한심한 것들.”
싸늘한 말투와 달리 후작의 입꼬리가 기다랗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흡족했다.
본인들 스스로 무덤을 파는 모양새가 보기 좋았다.
대련에서 패배한 후 어떤 식으로 나올지가 벌써부터 궁금했다.
‘너희들은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처참하게 짓밟아 줄 것이다.
저 하찮은 것들로 인해 흠이 간 제국의 자존심을 회복해야 했다.
멀리서 들었던 제국의 패배보다, 눈앞에서 본 압도적인 제국의 승리가 관중들의 뇌리에 틀어박힐 것은 뻔한 이야기였으니.
“수고하셨어요. 통한 거 같은데요?”
“후.”
알렌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전력을 다한 허세신공이었다.
지난 2년간 갈고 닦아온 신공이 그 힘을 제대로 발휘했다.
익스퍼트 초급의 실력으로, 익스퍼트 상급에 이른 자도 동요할 만큼의 기세를 보였다. 검을 쥐지도 않은 상태였기에 알렌의 실력을 더욱 높이 평가했을 터였다.
모두 전략이었다.
네더만과 제네스가 아니고서는 어차피 그들을 이길 수 없다.
이미 버릴 패.
화끈하게 버리는 것이 낫다.
물론, 기권으로 잠깐의 소란은 있을 테지.
하지만.
프렌치아의 기사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 상황이 곧 완전히 뒤바뀌리란 것을.
“다음 대련자 입장해 주십시오!”
네더만이 여유로운 걸음을 옮겼다.
그를 상대할 자는 제국의 호위기사 중 두 번째로 강한 포아주란 기사였다.
그 또한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기사.
호위대장인 파케보다는 아래지만, 그 또한 상당한 실력자.
세간의 평가로는 네더만과 맞붙는다고 해도 승패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기사였다.
물론, 세간의 평가일 뿐이지만.
네더만과 마주한 포아주는 진중한 태도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프렌치아의 검.
그의 이름은 익히 들어 본 바 있었다.
드레어스 웨이브에 파병되었던 프렌치아의 기사들을 이끌었던 자이기도 했으니.
그 또한 익스퍼트 최상급에 올라 있다고 했다.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었다.
“네놈도 기권할 참이냐?”
포아주는 네더만의 심기를 건드리며 심리전을 유도했다.
오랜 전장을 헤친 자답게 쉽사리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그 또한 기사로서 프렌치아의 불명예스러운 기권에 부끄러움이 있을 터.
작은 한마디로도 충분히 심중을 흔들 만했다.
하지만 그는 기대와 달리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하하. 이런 내가 기권이라도 하길 바라는가? 그런데 더 이상 기권해 줄 수는 없다네. 미안하군. 하지만 기사 된 자가 그런 요행을 바라면 쓰나. 자고로 정정당당히 쟁취한 승리가 값진 걸세.”
뻔뻔하기 그지없는 그 태도에 포아주의 미간이 움찔거린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사제가 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서로를 바라보던 둘은 가벼운 묵례 후 간격을 벌리고 섰다.
포아주는 네더만에게 불만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대련을 앞둔 자의 행동거지가 여유로움을 넘어서 가볍기 그지없다. 표정과 언행도 그렇지만, 건들거리는 행동거지가 진지하지 못하다.
조금의 긴장감도 보이지 않는 태도.
자신을 만만히 보는 건지, 아니면 승리가 간절하지 않은 건지.
적의 일부만을 보고 상대를 얕볼 정도로 수행이 얕지는 않았으나, 전보다 그가 가벼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 끝낸다.’
검을 꺼내 든 포주아는 마음을 단단히 했다.
그런 그를 보며 네더만이 엄살을 부렸다.
“친선 대련인데 마음 편히 하게. 지금 자네 얼굴은 너무 사납다고. 거울이라도 보여 주고 싶은 심경이군.”
“그럼 대련 시작하겠습니다!”
두웅-!
커다란 북소리와 함께 시작된 대련.
이미 태세를 갖추고 있던 포주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쏘아졌다.
깔끔하게 정제된 은빛 섬광이 그의 허리께에서 폭발하듯 뻗어 나온다.
견제성이 섞인 찌르기였지만, 상당히 쾌속한 검격.
“오오!”
그의 검을 본 관중석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검을 배운 자든 배우지 않은 자든 절로 탄성을 불러 일으킬만한 검세였다.
쩌엉-!
하나, 네더만은 그것을 가볍게 튕겨 내며 젖혀 들었다.
칼날을 타고 이는 묵직함이 있었다.
네더만은 그 반발력을 누르며 검을 사선으로 그어 내렸다.
날에 걸리는 대기가 좌악, 찢어지며 굉음을 냈다. 포주아 또한 그 검격을 물러서지 않고 받았다.
콰과과과광!
오러를 피워 내지 않았음에도 묵직한 검격이 충돌하며 강한 후폭풍이 장내를 휘저었다.
한 치의 양보 없이 오가는 검투.
하지만 그 격전 속에서도 네더만은 여유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상대의 검은 분명 익스퍼트 최상급에 머무르고 있었다.
전에 상대했다면 부담이 느껴졌을 정도로 강맹한 검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가 그려 내는 궤적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훤히 보인다.
벽을 넘어 최상급의 검을 바라보는 건, 최상급의 경지에서 상급의 경지를 내려다보는 것과는 또 달랐다.
마치 익스퍼트 초급에 이른 알렌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그가 펼쳐 내는 모든 것이 훤히 읽힌다.
궤적에 담긴 의도부터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지.
또, 지금까지 어떤 검을 익혀 왔는지도.
그 모든 게 한눈에 담겼다.
그러니 이런 것도 가능한 것이겠지.
쿵!
땅을 강하게 차는 순간 칼끝에 바람이 휘감긴다.
손끝에서 일어난 참격이 적의 빈틈으로 빨려 들어가듯 쏘아진다.
동시에 일대의 공간을 옥죄어 오던 무수한 검의 그림자가 찢기며 흩날린다.
실처럼 얇은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 하나의 검이 공간을 열었다.
검의 그림자 뒤에 숨어 있던 포주아가 선명히 드러났다.
그의 눈동자는 믿을 수 없이 커져 있었다.
그 확장된 동공 안에서 은빛 섬광이 그어졌다.
“…….”
일순 장내에는 잠시간 침묵이 감돌았다.
네더만의 검이 포주아의 검격 사이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더니 어느새 그의 목에 겨눠져 있었다.
범인들은 제대로 볼 수조차 없는 검이었고, 그 검을 흐릿하게나마 본 이들은 네더만이 가진 격의 깊이에 말문이 막혔다.
“두 번째 대결은 프렌치아의 승리입니다.”
정신을 차린 사제가 결과를 발표하고 나서야 관중석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프렌치아가 그래도 저력은 있고만.”
“크으. 방금 건 진짜 기가 막히는군.”
“어쩌면 다음 소드 마스터도 프렌치아에서 나올지 모르겠는데?”
한 번의 기권과 한 번의 압도적인 승리.
완전히 대비되는 결과였다.
하지만 모두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이 극적인 반전을 주기 위해 프렌치아가 기권을 선택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당연했다.
곧 벌어질 마지막 대련자는 제네스라는 이름 모를 애송이.
새파랗게 어린 그에게는 어떤 기대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상대는 다름 아닌 ‘광란의 검’ 파케였으니까.
관중들의 마음속에서는 대진표가 나왔을 때부터 승패가 정해진 상태였다.
“그럼 다음 대련자분들 올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마지막 대련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