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6화
제206화 벽을 넘다 (2)
쿠왕-!
마법사의 시체를 중심으로 투명한 파동이 번졌다.
그것에 휩쓸린 시체들은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몬스터들의 사체 또한 마찬가지였다.
광풍이 휴리첸을 한차례 휩쓰는가 싶더니, 사체들은 바위가 풍화하듯 검은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그들을 이 세계에 붙들어 두던 이능의 주체가 사라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파스스슥.
찰나에 흩어지는 그것들을 보며 에로인은 뒤를 돌아보고는 혀를 찼다.
“무리하지 말라 했거늘.”
흰 사자의 무력을 가벼이 여기는 듯한 언행을 보일 때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짐작했다.
마법사 놈들의 쓸데없는 자존심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서 문제는 그의 죽음이 아니었다.
‘흰 사자가 이제 자유로워졌다는 건데.’
폭죽도 터졌으니 곧장 이곳으로 돌아올 터였다.
상황을 빠르게 마무리해야 했다.
흰 사자가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는 훤히 알았다. 이곳과의 거리가 상당했다.
대략 20분 정도의 거리.
흰 사자를 제외하고 가장 강한 용 사냥꾼을 베었으니 나머지들을 정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나, 다른 목표물을 향해 움직이려던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얕았나?”
분명 베었다고 생각한 네더만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검의 궤적이 가슴팍을 깊게 갈랐다고 여겼으나 아무래도 얕았나 보다.
좀처럼 하지 않는 실수였다.
그 실수가 녀석의 행운인지 아니면 실력인지는 확인해 봐야겠지.
파밧!
에로인의 신형이 흐릿하게 흩어졌다가 네더만의 앞에서 불쑥 솟아났다. 그 순간, 그의 검은 이미 사선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여지없이 네더만의 몸뚱이를 쪼개 놓을 거라 여겼다.
콰앙-!
하지만 예상과 다른 반동이 칼날에 담긴다.
네더만에게서 솟구친 검광이 그의 검을 쳐 낸 것이다. 뒤로 튕겨 나간 에로인은 두 걸음을 물리고 나서야 몸을 멈출 수 있었다.
칼날이 지잉 운다.
에로인이 자신의 칼날을 내려다보았다.
“호오. 아직 힘이 남아 있나 보군.”
“거, 이제 실랑이할 생각 없으니 그냥 가쇼. 곧 성질 더러운 놈이 올 거거든. 여기서 뒈지고 싶지 않으면 떠나는 게 좋을 거요.”
“걱정은 고맙네. 하지만 자네들을 벨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네.”
에로인의 자신감에 네더만은 픽 웃었다.
이 자식이 이번에도 농담인 줄 아나.
“마음대로.”
네더만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을 쥐었다.
솔직히 이번에는 안 갔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네더만은 검파를 꽈악 움켜잡았다.
조금 전까지 버겁기만 했던 에로인의 속도가 눈에 담긴다.
그 속도에 익숙해져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네더만의 손끝이 흔들리자 휘황한 검광이 인다.
콰아아아아아-!
창졸간에 공간을 자르며 짓쳐 드는 검격.
부상을 입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운 일격에 에로인은 눈을 크게 키웠다.
콰아앙-!
검을 맞댄 에로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번에는 적의 검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보다 힘은 부족할 수 있어도 검력에 담긴 날카로움은 오히려 예기를 더했다.
상당한 출혈이 있음에도 더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이제껏 힘을 감추고 있었을 리는 없고, 성장한 것이리라.
하나, 단순한 성장이라고 하기에는 그 상승의 폭이 깊다. 네더만의 상태를 파악한 에로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벽을 넘은 것인가.”
간혹 죽음을 앞둔 찰나의 순간에 경지를 넘는 자들이 존재한다.
그 또한 그런 기연을 맞이한 듯했다.
네더만은 에로인의 말에 긍정하듯 씩 웃었다.
벽을 넘었냐고?
사실 모르겠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딘 건 확실한 거 같다.
조금 전 에로인의 마지막 일격이 들이치던 순간, 네더만은 느려지다 못해 얼어붙은 세상을 감각했다.
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은 제네스가 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겠다는 각오로 집중에 집중을 더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평소와 달랐던 건 아니었다.
기사에게 결투란 언제나 생사를 오가는 외줄 타기이기에.
어쨌거나 네더만은 그 끝에서 죽음을 마주했다.
생을 가르며 들어오는 검격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네더만의 세계는 멈췄고, 그 얼어붙은 세계에서 제네스의 검을 떠올렸다.
아니, 그의 검이 의지와 상관없이 눈앞에서 촤르륵 펼쳐졌다.
이미 일전에 보아 왔던 검이었다.
초원의 들개와의 전투부터 최근의 전장까지.
옆에서 지켜보았던 그 무수한 궤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흐릿하던 적의 칼끝이 선명히 보였다.
그 덕분에 네더만은 에로인의 검격에서 비껴 나갈 수 있었고,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검흔을 얻었을지언정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 지금.
적을 마주하며 네더만은 확연히 깨달았다.
자신의 눈앞에 새로운 세계가 열려 있음을.
우습게도 부상을 입기 전보다 지금 더 자신감이 붙는다.
전신에 차오르는 고양감이 통증도 잊게 했다.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세상을 읽어 들이고 있었다. 마치 알을 깨고 나와 처음 세상을 바라본 새처럼 모든 존재가 새로운 존재감을 더한다.
매일 보고 듣고 느끼던 감각들마저 새로운 단면들이 보이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도, 새까만 밤하늘도, 그리고 그 하늘을 가득 채운 별빛들도.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선명한 입체감을 띠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몸의 내부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전신을 흐르는 핏물과 작은 근섬유 한 가닥 한 가닥이 세세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그것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근육을 조이는 것으로 가슴팍의 상처를 지혈할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여기서 끝장을 봐야겠군.”
에로인이 말했다.
네더만의 상태를 그는 쉬이 알아차렸다.
용 사냥꾼이 벽을 넘어섰다.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곧 소드 마스터 초입에 발을 디딜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프렌치아의 검이 더욱 날카로워질 터.
반드시 이 자리에서 제거해야 했다.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나. 난 여기서 죽어 줄 수 없는데 말이지.”
여유로운 태도와 달리 네더만의 눈매가 좁혀졌다.
에로인이 전력을 다해 들이닥치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속도감.
사고의 가속으로 굼벵이처럼 느려진 세상 속에서도 그는 빨랐다.
콰과과과과과광!
창졸간에 두 개의 검이 얽혀든다.
‘크윽.’
네더만은 신음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적의 공세가 폭풍과도 같았다. 생을 강탈하려는 검의 궤적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벽을 넘어섰으나, 그럼에도 감당할 수 없었다.
그저 버텨 내는 게 고작이었다. 하나, 그 또한 오래 버티지는 못할 터였다.
네더만은 곧장 후회했다.
‘조금 더 누워있을걸.’
전신에 차오르는 충만감에 고취되어 적의 코털을 건드리고 말았다.
“조금만 힘내세요! 네더만 씨!”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알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보기에도 자신이 위태로운 듯했다.
살가죽을 가르는 자상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었다. 고도로 예리해진 감각 때문에 어떻게든 비껴 쳐 내고 있지만, 어디 하나 절단 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네더만은 이를 악물고 맞섰다.
콰아앙-!
제네스가 올 때까지 버텨 내야 했다.
그것이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아무 책임 없이 자유롭던 전과는 달랐다.
동료의 목숨이, 부하들의 목숨이 자신의 어깨 위에 쌓여 있었다.
자신이 무너진다면 나머지들이 죽는 건 정말이지 순식간일 터.
그 책임감이 네더만을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이익!”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롭게 버티는 네더만을 보며 에로인이 이를 악물었다.
전력을 다하고 있음에도 녀석의 목을 치기가 쉽지 않다.
마치 자신의 검을 모두 읽어 내는 듯했다.
‘이런 의미였나.’
적과 검을 맞댈수록 눈앞에서 생생히 풀어졌던 제네스의 검격이 뇌리에 작렬하고 있었다.
녀석이 보여 준 수많은 궤적들.
그 압도적인 검격들.
그것에 비하면 눈앞에 있는 적의 검은 하찮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네더만은 그 검을 마주하며, 언젠가 제네스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한의 속검을 이기고 직속 친위대 둘을 상대했음에도 그들을 쉬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
검의 이해도와 신체의 강함에 대한 상관관계.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격의 차이.
에로인 또한 훌륭한 기사였지만, 검의 깊이는 지금의 네더만보다 깊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 속도와 담긴 거력은 감당하기 버거웠지만, 이상하게도 막아 낼 만했다.
네더만은 적의 검력에 담긴 불균형을 읽어 냈다.
그는 이능의 도움 없이 혼자의 힘으로 벽을 넘은 자였으니까.
그 차이가 네더만이 위태롭게나마 에로인의 검력을 버텨 낼 수 있는 이유였다.
콰앙-!
“끄윽!”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빨리 좀 와라, 이 자식아!
구오오오오오!
네더만의 부름에 응답하듯 저편에서 폭풍처럼 밀려오는 기운이 있었다.
그것을 느낀 순간, 에로인의 얼굴에 낭패 어린 기색이 씌워졌다.
네더만을 떨쳐 낸 그의 시선이 저편을 향한다.
“이렇게나 빠르다고?”
좀비들이 흩어진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그가 있었을 장소와 이곳의 거리를 생각했을 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속도를 체감하니 이해가 된다.
기운이 다가오는 속도가 정말이지 말도 안 되게 빨랐다.
콰아아앙-!
거뭇한 그림자가 순식간에 땅 위로 작렬했다.
거뭇한 벼락이 떨어진 듯했다.
흐릿한 그림자를 받아 낸 지반이 굉음과 함께 진동했고, 그 여파로 피어난 돌개바람이 사위를 사납게 휘저었다.
에로인은 검을 움켜잡은 채 그 중심을 바라보았다.
굳은 에로인의 낯빛과 달리 네더만의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간다.
“그러게 내가 가라고 했을 때 갔어야지.”
* * *
나를 보며 적에게 으스대는 네더만.
하지만 당당한 말과 달리 그는 넝마가 되어 있었다.
“성장했군.”
나는 그가 벽을 넘었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간혹 한순간에 벽을 넘는 기연을 맞는 경우가 있었다.
“뭐. 당연한 거 아니겠나! 음하하…… 아이고야.”
네더만은 호탕하게 웃다가 이내 가슴을 부여잡았다.
상처가 얕지 않았다.
나는 눈앞에 서 있는 적에게 시선을 옮겼다.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지만, 낯익은 자였다.
그들의 관계를 보았을 때, 어느 정도 예상하고는 있었다.
“이거, 멍청한 짓을 해 버리고 말았군.”
에로인은 굳은 낯빛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발렌시아 대륙에는 경공이 따로 없다.
내가 이렇게나 빨리 도달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그 실책으로 인해 녀석은 죽는다.
“애꿎은 이들이 많이 죽었다.”
시민들과 경비병들.
그들의 욕심으로 인해 무수히 많은 무고한 자들이 죽어 나갔다.
그는 내 말에 지지 않고 말했다.
“그러게 쉬이 목을 내주지 그랬나.”
녀석에게 그들의 죽음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이 자리를 어떻게 피해야 할지 고심하는 듯했다.
애초에 죄책감을 갖는 자라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겠지.
“많이 변했군.”
최초의 세계선에서 보았던 그는 다른 이를 위해 검을 들 줄 아는 자였다.
에로인은 아스라낙을 위해, 그리고 움파움파족을 위해 죽음을 각오했었다.
그때의 그는 적어도 무고한 자들의 목숨을 하찮게 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다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 앞에 놓인 다른 이들의 생은 그에게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눈앞의 에로인은 최초의 세계선에서 본 그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회귀를 하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나를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
나는 그 변화만으로도 그들이 지금껏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쉬이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최초의 세계선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길이었겠지.
내가 말했다.
“검을 들어라.”
내 말에 그는 각오를 다진 듯 눈빛을 가라앉혔다.
“폐하의 걸음을 막아서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쿵!
녀석이 전력을 다해 걸음을 박찬다.
발길이 지반을 찍는 순간, 단숨에 간격을 지워 냈다. 공간을 찢어발기듯 날아든 칼날이 찰나에 엇갈린다.
콰과과과과광!
은빛의 격류가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그의 검은 최초의 세계선에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예리해져 있었다.
네더만이 지금까지 버텨 낸 게 놀라울 지경.
물론 그렇다고 내 상대가 될 리는 만무했다.
콰앙-!
급류를 단숨에 갈라 버리는 검격이 녀석의 가슴팍을 활짝 열었다.
에로인의 눈동자가 일순 커다랗게 확장된다.
그리고 그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섬광이 있었다.
촤-악!
핏물이 뿜어지는 소리와 함께 대기의 일렁임이 수평으로 뻗어 나갔다.
검의 궤적을 따른 돌풍이 저택의 담벼락까지 훑고 지나간다.
일대를 갈라 버리는 무지막지한 참격.
나는 조금의 사정도 봐주지 않고 검을 그었다.
녀석의 머리통은 허공에서 빙그르르 돌고 있었고, 머리통을 잃은 몸은 힘없이 모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