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5화
제205화 벽을 넘다 (1)
집사를 따라 창고로 온 알렌은 먼지가 가득 쌓인 상자를 건네받을 수 있었다.
“여기 있군. 전에 축제 때 사용하려 했었던 건데 마침 비가 와서 사용하지 못했었다네. 이걸 기억해 내다니, 나도 아직 죽지 않았어. 큼큼.”
집사가 아랫입술을 올리며 뿌듯해했다.
그가 건넨 상자에는 폭죽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알렌의 얼굴이 환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상자를 품에 안은 알렌은 뒤도 보지 않고 곧장 저택의 상층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스쳐 지나가는 창가로 바깥 풍경이 보인다.
저편에서 다가오는 무언가를 알렌은 그제야 볼 수 있었다.
“젠장!”
입에서 험한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제야 적의 기운이 피부에 와닿기 시작한 까닭이다.
네더만은 이것을 진즉에 느낀 것이겠지.
마치 죽음이 전신을 더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금방이라도 목에 칼날이 박힐 것 같은 서늘함에 아랫도리가 시큰해져 왔다.
동시에 다리가 굳는다. 마치 종아리에 납덩이가 매달린 것 같다. 저택 안에 있음에도 막대한 기파가 일대를 짓눌러 오고 있었다.
창문의 이음새도 몸을 부르르 떨 지경이었다.
‘제네스 님! 빨리 오셔야 합니다!’
이러다가는.
‘네더만 씨가 저세상 가게 생겼다구요!’
알렌은 아직 부르지도 않은 제네스를 찾으며 이를 악물었다.
쾅!
문을 박차고 지붕에 오르니 몬스터들의 바다가 한눈에 담긴다.
하지만 그것들은 더 이상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저 몬스터들을 모두 다 합친 것보다 한 사내가 풍겨 오는 기운이 훨씬 위협적이었다.
몬스터 무리를 헤치며 걸어온 사내는 어느새 네더만과 조우해 있었다.
네더만은 짐짓 반가운 사람이라도 만난 것처럼 허세를 부렸다.
“이거 용 사냥꾼이라는 허명을 알아봐 주어 고맙구만. 황제의 직속 친위대에 속한 양반이 나를 알아보다니, 이거 정말이지 가문의 영광이 따로 없네. 내 명성이 거기까지 퍼졌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든.”
술자리에서 합석이라도 한 것처럼 편히 말을 건네고 있는 네더만의 속은, 사실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여기서 죽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검을 맞대면 열이면 열, 패한다.
조금의 여지도 없다.
저 시커먼 녀석의 기파가 그것을 선명히 말하고 있었다.
당장의 위기를 벗어날 방법은 단 하나다.
제네스가 올 때까지 버티는 것.
그러니 그 전까지는 자신이 가장 자랑하는 장기를 필사적으로 활용할 수밖에.
네더만은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내 친구를 찾아온 것 같네만. 맞는가? 흰 사자라고 대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 내가 그 녀석과 잘 알고 있는 사이일세.”
“혀가 긴 놈이로구나.”
에로인의 입가에서 서늘한 음성이 흘렀다.
그의 손이 허리춤에 메여 있는 칼자루로 향한다.
그는 시간을 끌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네더만은 그것을 보고는 질색하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허어!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대화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법일세. 뭐든 검으로 해결하는 건 필히 고쳐야 할 문제라고. 우리는 기사이기 전에 또 지성인이 아닌가. 에로인이라고 했나? 자네가 흰 사자를 찾아왔음을 잘 알고 있네. 뭐, 우리 프렌치아의 하나뿐인 공주님을 찾아왔어도 상관없네. 둘은 모두 여기 없거든.”
네더만은 친절하고 상세히 상황을 전했다.
“그 녀석과는 아까 헤어졌네. 동문으로 갔지. 우리 공주님께서도 함께 갔네. 공주님이 기르는 애완용 늑대가 있거든. 아주 날쌘 놈이지. 아마 오다가 자네와 길이 엇갈린 듯하니, 어여 쫓아가 보게. 지금 가면 충분히 만날 수 있을 걸세.”
“필요 없다.”
하나, 그의 친절한 설명에도 에로인은 결국 검을 뽑았다. 백색의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을 짓누르던 대기가 날카롭게 일어선다.
솨아아아아.
동시에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온몸이 낭자되는 듯한 기파였다.
온 세계가 검날처럼 예리하게 벼려지는 듯했다.
그가 말했다.
“나는 네놈들을 죽이러 온 것이니까.”
이런 빌어먹을 새끼.
네더만은 적에게 조금의 여지도 없음을 쉬이 깨달았다.
그는 곧장 태도를 바꾸었다.
한껏 수그리고 있던 태도를 순식간에 당당히 했다. 그의 기세가 적에 맞서 날카로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네더만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 손님이었던 듯하군. 나, 네더만, 너에게 기사의 이름을 걸고 정정당당한 승부를 제안한다.”
“이제야 정신을 차렸군.”
에로인의 말에 네더만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좋다. 그럼 기사로서 정정당당한 승부를 위해 결투는 30분 뒤에 하도록 하지. 내가 지금까지 좀비들을 베어 내느라 체력이 많이 빠졌거든. 그 정도 배려는 해 줄 수 있겠지?”
지붕 위에서 폭죽이 터진 건 그때였다.
퍼버버버벙!
밤하늘로 솟아올라 울긋불긋한 불꽃으로 터져 나가는 폭죽들.
새까만 밤이 일순 환해질 정도로 강렬한 빛무리였다.
뒤편에 늘어서 있던 몬스터들도 모두 고개를 들어 바라볼 정도였다.
곳곳에서 타오르는 불길과 밤하늘에서 터져 나가는 폭죽.
참으로 화려한 밤이었다.
제네스 또한 이 불꽃을 보았을 테지.
네더만은 황홀한 표정으로 터져 나가는 불꽃을 가리켰다.
“참으로 멋지지 않나. 밤하늘도 꼭 우리의 정정당당한 결투를 축하해 주는 듯하군. 그럼 30분 뒤에 보도록 하지.”
하지만 에로인은 말없이 검을 겨눌 뿐이었다.
빌어먹을.
네더만은 그를 보며 억지로 검을 들어 올렸다.
“허, 이것 참. 정정당당함이 무엇인지 모르는 친구로구만.”
역시나 기사란 놈들은 대화가 통하는 새끼들이 없다.
* * *
입을 쩍 벌린 화룡이 일대를 집어삼키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검의 궤적을 따라 기다랗게 출렁이는 시뻘건 불길이 일대를 집어삼킨다.
그것에 베인 강화기사들은 갑옷째로 잘려 나가 불타올랐다. 불꽃은 그들의 육체를 금세 시꺼먼 재로 만들어 버렸다.
콰아아아앙!
검끝을 따른 불꽃이 수직으로 꽂히며 거대한 폭발이 있었다.
불길이 용암이 분출되듯 높이 치솟아 올랐다.
그 압도적인 광경 속에서도 강화기사들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팔이 날아가도 발이 통째로 뜯겨도 그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의 이성도 남아 있지 않은 인형들.
몸의 강도는 강철만큼이나 단단했고, 움직임은 익스퍼트 중급을 상회하고 있었다.
하나, 수가 많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큰 이점으로 자리하지 않았다.
대규모의 전열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세밀한 훈련이 필요하다.
이성을 잃은 이들이 구현해 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가진 전력은 우수했다.
단순히 힘의 세기로만 비교한다면 제국의 기사단이었던 글리머 기사단 못지않을 터였다.
불꽃을 무시하고 일제히 달려드는 녀석들에, 나는 칼날에 깃든 속성을 바꿨다.
천령신공 검법편.
벽력의 장(章) 뇌정(雷霆).
불꽃의 일렁임 사이로 뇌전이 들이친다.
콰과과과과과!
폭포수처럼 쏟아지며 공간 자체를 찢어발기는 압도적인 뇌력.
사방으로 갈라진 벼락 줄기들이 적들의 몸뚱이에 작렬한다.
숲 전체가 떨 정도로 거대한 천둥이 울었다.
구오오오오.
분진이 걷히며 드러난 광경은 처참했다.
불꽃에 삼켜지고 뇌력에 짓뭉개진 시체들이 길가의 돌멩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살아남은 자들을 누비었다.
다시금 칼날에 불꽃이 피어났다.
예리한 화검이 적들의 몸뚱이를 갈랐다.
두 번의 검은 필요치 않았다.
절명하지 않은 자들은 환부를 타고 오른 불꽃에 숯덩이가 되었다.
“뒈져라!”
무너져 내리는 강화기사들의 몸뚱이 사이로 검은 창이 튀어나왔다.
흑마법으로 빚어진 마기의 창.
그것들이 살아 있는 듯 기사들의 틈새를 비집고 휘어 들어왔다.
콰과과광!
나는 그것들을 쉬이 쳐 냈다.
맥없이 흩어져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들.
예상컨대 저자의 흑마법은 죽은 것들을 소환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는 듯했다.
공격 마법은 주르하보다 한참 아래였다.
검을 긋자 마법을 준비하던 녀석의 몸뚱이가 반으로 갈라진다.
화르르륵!
순식간에 로브마저 집어삼키는 불길.
하나, 그는 다시금 저편에서 솟아났다.
그때였다.
퍼벙! 퍼버버벙!
저 멀리서 무언가 터지는 소음이 귓가에 담겼다.
이리엘이 소리쳤다.
“폭죽이에요!”
도시에서 터진 듯했다.
승리를 알리기 위한 것은 아닐 터였다.
아무래도 내 도움이 필요한 듯한데.
“푸하하핫!”
흑마법사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도시에 닥친 위협을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
“곧 동료들이 무참히 죽어 나가겠구나. 구하러 갈 수 있겠나?”
녀석들의 수작은 빤했다.
일행들을 위협함으로써 나를 조급하게 만들려는 듯했다.
네더만이 있음에도 저런 식의 신호를 보냈다면 단순한 위협은 아닐 터.
내가 말했다.
“구하러 못 갈 이유가 없지.”
이미 강화기사들의 태반은 빈 갑옷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누가 나의 발목을 잡을 수 있을까.
“…….”
흑마법사 또한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웃었다.
“움하하! 이 몸의 힘이 고작 이 정도인 줄 아느냐!”
녀석의 손짓을 따라 바닥에서 죽은 것들이 일어서기 시작한다.
그것은 불에 탄 육체가 아니었다. 저자에게 저당 잡힌 영혼들. 그것이 세계의 그림자처럼 까만 연기가 되어 일렁였다.
“네놈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음이야.”
저자를 베기 전까지는 저것들이 계속해서 내 발목을 붙잡아 올 터였다.
불멸의 군대만큼은 아니지만, 만만히 볼 전력은 아니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창을 쥐었다.
이제 녀석의 목숨을 끝내야 할 때가 온 거다.
한 번 던졌다 받으며 무게를 가늠하고, 저편을 향해 던졌다.
부와아아아앙!
공기를 짓뭉개며 날아간 창이, 바위까지 꿰뚫고 반이나 박혀 들었다.
“쿠, 쿨럭!”
저편에서 핏물을 토해 내는 기침이 들렸다.
창이 깊게 박힌 자리에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창은 그의 가슴팍을 관통한 뒤 바위에 박혀 있었다.
그의 허망한 눈길이 나를 향한다.
내가 말했다.
“이미 진즉에 알고 있었다.”
이자의 위치는 처음부터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다수의 시체를 일으킬 때 나는 놈의 위치를 정확히 가늠할 수 있었다.
무극천승심결이 극성에 다다르며 개방된 상단전.
나의 감각은 이미 예견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녀석이 몸을 숨긴다고 해도 내 이목은 피할 수 없다.
* * *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제멋대로 갈라진 지반.
지면 위에 새겨져 있는 기다란 흔적들.
검으로 새겼다고 하기에는 굵고 깊은 궤적들이 사납게 엉켜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피범벅이 된 네더만이 엎어져 있었다.
“여흥 정도는 되었다.”
그 앞에 선 에로인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런 그를 내려다보았다.
지붕 위에 있던 알렌이 벌어진 입을 손으로 막았다.
네더만의 검은 강렬했다.
눈에 희뿌옇게 보이는 그 궤적은, 과거 불멸의 도시에서 보았던 그의 검보다도 날카로웠다.
그의 경지를 정확히 가늠하는 것이 불가능한 자신에게도 확연히 달라 보일 만큼 매서운 검격이었다.
하나, 적의 검은 더욱 압도적이었다.
네더만이 뿜어낸 녹색의 빛살은 적을 꿰뚫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가슴팍에서 핏물을 뿜어내며 쓰러졌다.
몸뚱이가 절단 나지는 않았으나, 마무리된 상황을 보고 유추했을 때 결코 얕게 들어간 검격이 아니었다.
“네더만 씨-!”
알렌은 미친놈처럼 그에게 뛰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