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
제204화 아르에리아 (3)
새하얀 섬광이 어둠을 가른다.
은빛 물고기가 검은 강물을 거꾸로 거스르는 듯했다.
거대한 늑대가 그 빛 무리를 천천히 따랐다.
간혹 달려드는 몬스터들은 한입에 물어 멀찍이 던져 버렸다.
“눈 떠도 돼. 하나도 무섭지 않아.”
이리엘의 따뜻한 목소리에 유리아가 한쪽 눈을 빼꼼 떴다.
흉측하게 생긴 몬스터가 주변에 가득했다.
다리를 절거나 신체 하나가 없거나 썩어 문드러져 근육 조직과 뼈가 드러난 몬스터의 사체들.
그것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존재가 점점 멀어진다.
마치 하나의 투명한 벽이 앞에 놓여 있는 것처럼 그들은 그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쇠창살에 갇힌 몬스터를 구경하는 듯했다.
유리아는 마침내 두 눈을 뜨며 잔뜩 움츠렸던 몸까지 폈다.
그제야 세상이 제대로 보였다.
“와.”
그녀는 앞에서 흩어지는 빛 무리를 보았다.
빛줄기가 이슬과 부딪쳐 쪼개지듯, 찬란하게 산란하는 섬광들.
그녀의 눈에 제네스의 검은 그리 보였다.
꼭 칠흑 속에서 홀로 반짝이는 유리 조각 같았다.
“너무 멋있어…….”
제네스가 전장을 휘젓는 광경을 처음으로 목격한 그녀는, 자신이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공주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왕자님.
“이제 좀 괜찮아?”
어깨를 감싸 오는 따뜻함에 유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이리엘이 환히 웃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자 유리아는 꿈에서 퍼뜩 깨어났다.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외모.
질투마저 삼켜질 정도로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눈앞에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공주님을 보살펴 드렸어야 하는데…….”
유리아는 그제야 본인의 실책을 깨달았다.
공주를 챙겨야 할 시녀가 오히려 도움을 받고 있었다니. 한심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난 괜찮으니까 떨어지지 않게 잘 붙잡고 있어. 그럼 아무 일 없을 거야. 우리 앞에는 프렌치아에서, 아니 대륙에서 제일가는 검이 있잖니.”
“네!”
유리아는 두려움을 완전히 털어 내며 힘차게 대답했다.
이리엘의 말대로 눈앞에서 흐릿하게 번쩍이는 제네스의 검은 대륙 제일이었고, 그는 그 유명한 흰 사자였다.
프렌치아를 제국의 손아귀에서 구해 낸 영웅.
유리아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네스의 털을 꼬옥 붙잡았다.
그리고 눈에 제대로 담기지도 않게 움직이고 있는 제네스를 바라보았다.
이리엘 또한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당 앞의 눈을 쓸듯 휘두르는 검에 적들이 쓸려 나간다.
그는 적진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 일을 벌인 원흉에게 다가가고 있는 와중이었다. 지금 상황에 가장 위험한 곳을 제 발로 찾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제네스를 바라보며 자신이 가장 안전한 곳에 있음을 느꼈다.
* * *
되살아난 몬스터들을 치우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뒤는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보지 않고도 잘 따라오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던 몬스터의 물결이 끝났을 때 나는, 높다란 산등성이를 앞에 두고 있었다.
마기의 잔향이 대기 중에 흐른다.
나는 그것을 쫓아 걸음을 옮겼고, 그 끝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괴인을 만났다.
“네놈이 흰 사자구나.”
얼굴이 짙은 어둠에 잠길 만큼 후드를 깊게 눌러쓴 사내.
“내가 준비한 여흥이 어떠하더냐.”
건방진 태도였다.
저릿저릿한 기파가 일대에 흐르고 있었다.
일전에 마주했던 기억이 있는 불쾌한 기운.
끈적하고 농축된 액체가 대기에 흐르는 듯했다.
눈앞의 녀석이 뿜어내는 기운은 아니었다. 깊은 숲에서 범람하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안에 무언가 있음을 나는 쉬이 알았다.
그 또한 내 뒤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맛있는 먹잇감을 달고 왔군.”
“내 뒤가 가장 안전하니까.”
“자신감이 지나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의 말끝에서 차가운 웃음이 느껴졌다.
“프렌치아의 공주는 그래서 죽는다.”
로브에 숨겨져 있던 손이 드러나더니, 들어 올려졌다. 순간 수평을 가르는 궤적이 있었다.
내 손끝에서 핀 섬광이 창졸간에 적의 몸을 갈랐다.
촤-악!
하나, 손끝이 가볍다.
연기처럼 흩어졌다가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다시 형체를 이루는 녀석.
“네놈이 이-.”
촤-악!
“이 새끼가! 내 말-.”
촤-악!
“죽여라!”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한 녀석에게서 분에 받친 명령이 터져 나왔다.
스스스슷.
그제야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갑옷의 기사들.
그들의 존재는 예상대로였다.
바레인가에서 보았던 주르하의 강화기사들과 같은 기운이었으니까.
하지만 기운의 농도가 그때보다도 더 짙고 수 또한 상당히 많았다.
“크크큭. 모두 프렌치아의 선혈로 쌓아 올린 것들이니라.”
그사이, 완전히 형체를 이룬 녀석이 말했다.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였다.
녀석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다.
주르하의 연구의 결과로 이 세상에 나온 것들.
프렌치아 국민들의 끔찍한 죽음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그것들의 존재를 느낀 순간부터 이미 내 피는 싸늘히 식어 있었다.
북해의 해류처럼 차갑고 무거운 기운이 혈관을 질주한다.
화륵.
하나, 칼끝에서 타오른 건 시뻘건 불길.
천령신공 검법편.
열화의 장(章) 화룡(火龍).
나는 이들을 시체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태워 버릴 작정이었다.
* * *
오른쪽으로 쳐 낸 칼날이 몬스터의 목을 가르고, 좌측으로 당겨 와 떨어뜨린 칼날이 몬스터의 몸뚱이를 자르며 지나간다.
푸른 핏물이 궤적을 따라 선을 그렸다가 흩어지고, 무너진 몬스터의 사체 위로 새로운 것이 나타나 자리를 채운다.
끝없이 밀려드는 몬스터들은 아무리 베어 내도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무는 듯했다.
“아휴. 이 징그러운 새끼들.”
네더만은 분통을 터트리며 검을 긋고 있었다.
느릿하게 흐르는 세계 속에서 그만이 분주히 움직여 갔다.
그의 손짓에 따라 몬스터들의 물결이 점차 깎여 나가기 시작한다.
바깥에서 바라본 시선에서, 그는 잔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몬스터를 베어 가고 있었다.
정비된 저택에서는 불화살과 화염병을 던져 지원을 시작했다.
널따란 마당에 깔리기 시작하는 불바다.
고통을 모르는 그것들은 불길을 뒤집어쓴 채 알아서 옆의 것들에게 옮겼다.
역병처럼 퍼진 불꽃이 그것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휴. 이제 좀 살 것 같네.”
후끈한 열기에 이마에서 땀이 한 바가지가 흘렀지만, 그 덕분에 숨 돌릴 틈이 생겼다.
병사들은 그동안 무너진 가구와 몬스터의 사체를 이용해, 저택을 두르는 방어벽도 그 높이와 강도를 더했다.
조금만 지나면 꽤 그럴듯한 방어진이 형성될 듯했다.
상황은 긍정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몬스터들의 사체가 여전히 밀려오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거세지는 않았다.
아무리 이능이라 한들 능력의 한계가 있는 법.
혼자서 이 정도 규모의 군대를 불러일으킨 것만으로도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무언가 섬뜩한 기운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놀의 목을 단칼에 베어 낸 네더만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오싹함에 낯빛을 굳혔다.
“젠장.”
그의 시선이 다급히 저편을 좇았다.
목에 검이 겨눠진 것처럼 사타구니가 시려 온다.
북부의 한설처럼 심장을 얼릴 것만 같은 서늘한 기운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네더만은 몬스터를 베어 내며 침음을 흘렸다.
뇌가 빠르게 가속했다.
어림해 봐도 도저히 저 정도의 기운을 가진 무언가를 막아 낼 방도가 없었다.
“어찌해야 하나.”
정황상 제네스가 돌아올 때는 아니었다. 그의 도움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결국, 저것을 자신이 맡아야 한다는 건데.
‘도망칠까?’
어차피 이들은 주르아든 왕국의 사람들이 아닌가.
자신들을 노리고 온 것이라지만, 모두 제국의 짓이었다.
이들의 불행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자신이 아닌 제국 놈들이었다.
그러니까.
여기를 목숨 걸고 사수해야 할 이유는 없는 거다.
“알렌.”
네더만이 옆에서 고군분투하는 알렌을 불렀다.
“예! 왜요!”
아직 적의 기운을 느끼지 못한 알렌은 적들을 막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채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기사 중에서야 가장 실력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경비병들보다는 월등한 실력.
솔직히 이곳을 버리고자 마음먹는다면 자신들이 도망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네더만이 말했다.
“내 인성이 쓰레기까지는 아니지?”
“물론이죠!”
알렌이 소리치듯 답했다.
“하지만 뭐, 크게 다를 거 있겠습니까!”
역시.
자신의 인성이 썩 훌륭한 건 아닌 거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네더만은 알렌에게 사실을 고했다.
“아무래도 적의 지원군이 있는 것 같네.”
“예?”
“무시무시한 기운을 품은 자가 다가오고 있어.”
“젠장!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알렌이 미간을 잔뜩 구기며 소리쳤다.
네더만이 말했다.
“도망쳐야지.”
“예? 그럼 사람들은 어쩌고요!”
“그러니까 말일세. 어디 괜찮은 방법 없나? 자네는 머리가 좋아지는 꿀밤을 수도 없이 맞지 않았나.”
제네스의 말로는 그랬다.
진짜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알렌은 간혹 위기의 상황에 비상한 생각을 내놓고는 했다.
알렌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저라고 방법이 있겠습니까! 무조건 제네스 님을 불러야죠!”
“아, 하긴. 그 방법밖에 없겠군.”
네더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어깨에 쌓인 책임감에 눈이 멀었었다.
확실히 제네스의 꿀밤이 효과가 있기는 한가 보다.
“역시 자네에게 묻기를 잘했어.”
네더만은 자신의 실책을 쉬이 인정했다.
기댈 사람이 있는데 홀로 해결하려 하다니.
바보 같은 짓이었다.
혼자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적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자라면 여기 있는 모두 죽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일단 제네스를 부르고 봐야지.
그 자식이 어떻게든 해결해 주지 않겠나.
“당장! 제네스를 부르게!”
“어떻게요?!”
“살고 싶다면 재주껏! 아주 확실하게!”
“젠장! 알겠습니다!”
알렌은 등을 돌려 곧장 저택으로 달려갔다.
어떤 식으로든 제네스에게 지금의 위급함을 알리면 될 터였다.
“그 자식이 올 때까지만 어떻게든 버텨 봐야지.”
몬스터들의 무리가 멀리서부터 갈라지고 있었다.
적이 다가올수록 예민해진 기감이 더욱 격렬하게 반응한다.
벌써부터 거대한 칼날이 자신을 겨누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자가 눈앞에 도달했다.
그를 마주하는 순간, 네더만은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음을 깨달았다.
‘내 예상은 도박할 때만 빗나가는군.’
묵직한 기파가 사위를 짓누른다.
그저 존재감만으로 그랬다.
네더만은 그에게서 아득한 벽을 느낄 수 있었다.
황제의 직속 친위대 소속이 분명했다.
“자네가 용 사냥꾼인가.”
마주한 전력의 크기가 그러했다.
“반갑군. 저스티스 소속의 에로인이라고 하네.”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여유로운 태도.
강자의 풍모를 간직한 자였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네더만은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이거 자칫 잘못하면 여기서 뒈지게 생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