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제203화 아르에리아 (2)
“저 빌어먹을 자식들은 잠도 없나!”
네더만이 죽는소리를 내었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적의 습격에 이골이 난 탓이다.
그들의 암습은 먹잇감을 쫓는 오크 떼처럼 악랄한 구석이 있었다.
“휴. 이제 곧 휴리첸입니다. 저들도 도시에서는 어쩔 수 없을 거예요.”
휴리첸은 주르아든 왕국의 작은 소도시였다.
큰 마을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의 작은 도시였으나, 성벽도 둘려진 데다 경비대도 꾸려진 옹골찬 도시라고 했다.
적들도 도시에서는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할 터.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방심을 노린 암습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먹는 음식부터 화장실까지 철저히 확인하도록.”
중원에서 한창 벌거벗은 원숭이처럼 날뛰었을 때 살수들에게 시달려 봐서 안다.
그런 종자들에게 쫓길 때는 뒷간에서조차 방심할 수 없다.
이곳의 암살자도 다르지 않을 테지.
하나, 아무리 경지에 오른 은신 수법이라 해도 내 감각은 피하지 못한다.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알렌이 물었다.
눈 밑이 퀭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녀석뿐만 아니라 다들 피곤에 절어 있었다.
사망자는 아직 없지만, 다들 크고 작은 부상들은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끊임없는 전투로 얻은 피로가 이들의 몸뚱이에 눌어붙어 있었다.
이대로 전투가 지속된다면 그 정도는 더욱 심해지겠지.
내가 말했다.
“아르에리아에 도착할 때까지.”
아르에리아 왕국의 영토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는 아르에리아의 법적 보호를 받게 된다. 제국이라고 해도 꼬리를 드러낼 만한 일은 만들지 않을 터였다.
내 말에 알렌은 곧장 죽을상을 썼다.
나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계속해서 몰아칠 여력은 없을 거다.”
이곳은 제국이 아니다.
제국 쪽에서 작정하고 암살자들을 투입한 듯하지만, 먼 거리만큼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분명 암살자들을 지휘하는 자가 따로 있을 터.
이 정도로 병력을 소비하면서까지 우리의 진을 빠지게 했다면, 슬슬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되었다.
그때 그자의 목을 베면 마무리될 일이다.
“머, 멈추시오!”
휴리첸의 성문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우리의 몰골을 보고는 학을 떼었다.
핏물과 먼지를 뒤집어쓴 아군의 상태는 처참했다.
덕분에 우리는 생각보다 더 오래 성문에 붙들려 있어야 했다.
“후아! 이제야 살 것 같네!”
알렌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부른 배를 팡팡 두드렸다. 간만에 목욕과 식사를 마친 일행의 얼굴에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다들 정말 고생하셨어요.”
이리엘이 염려 섞인 눈짓으로 모두를 챙겼다.
그녀야 마차 안에서 안락한 평화를 누렸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거였다.
성격 같아서는 본인도 함께 싸우고 싶었을 테니.
“넌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다.”
“칫.”
이리엘은 내게 눈을 한번 흘기고는 창가로 보이는 도시의 정경을 보았다.
“도시가 조용하네요.”
휴리첸은 많은 사람이 오가는 도시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고요한 느낌이었다.
덕분에 경계를 서기에는 편할 듯했다.
“여기는 안전한 거 같은데?”
네더만이 말했다.
식사를 마친 녀석은 기사 몇을 데리고 일대를 수색하고 온 참이었다.
내 감각에도 수상한 자는 없었다.
네더만이 턱을 쓸며 말했다.
“너무 조용하니 오히려 불안한데.”
나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폭풍처럼 몰아치던 적들이 아무런 낌새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쌓아 놓은 피로를 풀 시간을 줄 이유가 적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수상하다.
내가 말했다.
“기사들을 푹 쉬게 해라. 경계는 내가 서지.”
“혼자서 괜찮겠나.”
“물론.”
숙소 구석구석은 이미 수색한 터였다. 외부만 경계하면 되니 일대는 나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동안 피곤했을 테니 최대한 휴식을 갖게끔 했다.
앞으로 갈 길이 멀었다.
회복할 수 있을 때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
나야 조금의 피곤함도 없었다.
내게 적들은 번거로운 날파리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네더만이 기지개를 한껏 켜며 말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고만. 간만에 푹 쉴 수 있겠어. 으자자.”
식사를 끝낸 이들은 모두 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기다란 복도에 의자를 놓고 앉아 눈을 감았다.
감각은 널따랗게 퍼져 여관 일대를 덮고 있었다.
곳곳에 얇은 감각의 실이 풀어졌다.
그 무엇이라도 그 실을 완전히 피해 여관에 도달할 수 없을 터였다.
적어도 여관 근방의 모든 움직임은 내 손아귀에 있었다.
“꺄아악!”
비명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여관에서 나온 비명이 아니었다.
저 멀리서 들려온 소리.
여관 근방을 집중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 먼 곳의 소란을 이제야 느낄 수 있었다.
화아악-!
감각을 확장하자, 마력의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널따랗게 퍼져 간다.
나는 그 안에 담기는 이질적인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곧장 복도 끝에 난 창을 통해 지붕 위로 올랐다.
우뚝 솟은 건물은 아니었기에 시야가 다른 건물들로 막혀 있었다.
하나,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불의 고리 안에 갇힌 듯했다.
“정신이 나갔군.”
제국의 짓이 분명했다.
아무리 소도시라지만, 우리를 잡기 위해서 도시 하나를 통째로 날릴 생각을 하다니.
“크어어어!”
도시를 삼켜 오는 적의 병력은 살아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몬스터들의 사체들이 산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숲에서 만났던 그림자들과는 달랐다.
아무래도 흑마법의 일종인 듯한데.
그것들의 수가 상당했다.
“대체 무슨 일인가?”
네더만도 소란을 느꼈는지 지붕 위로 올랐다.
이어 도시의 상황을 발견한 그는 평소와 달리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정녕 황제가 미치기라도 한 것인가?”
아무리 제국의 힘이 막강하다지만, 주르아든 왕국의 소도시를 통째로 봉쇄할 생각을 하다니.
한마디로 정신 나간 짓이었다.
만약 시민들과 우리 일행들까지 살인멸구 한다 해도 그 원흉으로 제국이 지목되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들은 그렇게 했다.
“너는 기사들을 데리고 일단 경비병들을 도와.”
“어쩌려고?”
물론 우리끼리 포위망을 뚫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적들도 그것을 알고 있을 터.
하지만 도시의 시민들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다.
그것이 이들이 노리는 바라고 해도 그랬고, 프렌치아 국민이 아닐지라도 그랬다.
단순한 정의감 때문은 아니었다.
이대로 도망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적들의 추격은 계속해서 이어질 터.
나는 이 자리에서 일을 꾸민 원흉의 목을 벨 작정이었다.
우리끼리만 적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휴리첸의 경비병들과 함께한다면 나쁠 것도 없었다.
“다들 조를 이뤄서 움직이도록. 그리고 이리엘과 유리아는 네스를 타고 내 곁을 따른다.”
이미 다들 여관 밖으로 몸을 빼낸 상태였다.
소란은 이미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네스!”
이리엘의 말에 네스는 곧장 본체화를 했다.
유리아와 이리엘은 등에 올랐다.
일행들은 동, 서, 남, 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동쪽을 택했다.
그곳은 우리가 넘어온 성문이기도 했고, 적의 밀집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너머의 저편에서 음울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을 따라가면 이 일의 원흉을 만나게 될 터였다.
파밧.
나는 적장을 향해 발을 굴렀다.
네스는 그런 내 뒤를 따랐다.
적들의 목적이 이리엘이라도 내 옆이 가장 안전하다.
“도망쳐!”
“쿠어어어!”
“이쪽으로 오시오!”
나는 쉬이 전장의 최전선에 도달했다.
도시의 경비병들이 몬스터들을 막아 내며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하나, 그들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그런 이들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과과과과광-!
동시에 소나기처럼 쏟아진 검격이 일대를 초토화한다.
“가, 감사합니다!”
경비대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가 내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낯빛이 얼어붙어 있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정신을 반쯤 놓아 버린 듯했다.
“대피할 장소는 있나.”
“아, 네. 대피소로 사용할 만한 저택이 있어 그쪽으로 안내 중입니다.”
“시민들을 신경 쓰도록. 이쪽은 내가 맡지.”
“혼자서 가능하시…….”
나를 멍청하게 바라보던 그는 내가 일격에 만든 광경을 다시 보고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병사들을 통솔하기 위해 다급히 몸을 틀던 그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헉 소리를 내었다. 옆에는 네스가 내려서 있었다.
“기르는 개다.”
“이, 이걸요?”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네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 텐데.”
“아!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사가 다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몬스터들의 사체가 성문을 넘어 밀려오고 있었다.
이미 그 규모가 흑마법으로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다.
아마 이능이겠지.
천령신공 검법편.
제2장 흑관섬(黑貫閃).
콰과과과과과!
문스터들의 전열을 일직선으로 뚫고 나아가는 휘황한 빛줄기.
기다랗게 뻗어 나간 섬광이 눈앞에 놓인 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며 전진했다.
* * *
“과연 무지막지하군.”
성문이 멀찍이 보이는 구릉.
그 위에 두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검을 허리에 찬 기사와, 온몸을 덮는 기다란 로브에 얼굴까지 깊게 가리는 후드를 쓴 자.
개중 기사로 보이는 자가 시선을 내리깐 채 감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거리가 있어 흰 사자의 검격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으나, 터져 나오는 빛 무리와 그것을 따라 갈라지는 몬스터들의 전열만 보아도 검격의 강맹함을 쉬이 예측할 수 있었다.
“그래 봤자이지요.”
짙은 어둠이 깔린 로브 안에서 낮게 깔린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혼자 힘으로는 모두를 지킬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의 목숨은 제가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리하지 말게.”
에로인 스왈로이트.
황제 직속 친위대 소속이자 황제의 검이라 불리는 자.
그가 말했다.
흑마법사인 고르딘은 흰 사자의 무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의 목적은 녀석의 손발을 잘라 내는 것에 있으니.”
고르딘은 묵례로 답했다.
그 도한 흰 사자의 무력에 대해 익히 들어 왔다.
그에게 직속 친위대의 태반이 갈려 나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기존의 대원 중 남은 이들은 고작 넷뿐.
그중 둘이 이곳에 왔다.
하나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고르딘의 등 뒤로는 흑빛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어둠처럼 깔려 있었다.
물경, 2백에 이르는 강화기사들.
과거 주르하가 완성한 연구의 결과로 나온 것들이었다.
* * *
몬스터들의 움직임은 빠르지 않았다.
죽은 것들이기에 그런 듯했고, 대부분이 고블린급의 소형 몬스터였다. 간혹 중형 몬스터도 있었지만, 그다지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것이 번거로울 뿐.
물론, 그건 기사들의 입장에서였다.
일반인들에게는 그들의 존재는 매우 위협적이었고, 끝없이 밀려드는 물량은 경비병들과 기사들의 체력을 빠르게 갉아먹고 있었다.
“이쪽으로!”
그래도 다행인 점은 대피할 만한 저택이 있다는 거다. 시장의 것이라는데, 저택 주변을 두른 돌담이 그나마 작은 저지선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휴.”
알렌이 젖은 이마를 훔치며 말했다.
“시민들은 거의 다 대피시킨 거 같아요.”
그는 몇몇의 기사들과 함께 일대를 훑고 온 차였다. 네더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목재 가구들은 모두 집 밖으로 던지라고 해.”
잡다한 가구들을 쌓아 대강 목책이라도 만들 작정이었다.
저택은 부상당한 이들의 신음과 가족을 찾는 이들의 고성으로 정신이 하나 없었다.
난데없는 몬스터들의 습격이었다.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소규모 도시의 경비대에서 제대로 된 대처가 될 리 없었다.
지휘권은 자연스레 네더만에게 넘어가 있었다.
“아무래도 이능인 거 같죠?”
“그렇겠지.”
알렌의 말에 네더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들의 수가 많았다. 사체들을 일으키는 흑마법에 대해서는 들어 본 바 있다.
하지만 군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병력이라니.
인간의 마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황제의 직속 친위대가 온 듯했다.
제네스를 막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이 일을 주도한 녀석의 모가지를 베는 것이 이 상황을 벗어날 해결책이 될 듯했다.
“우리는 이곳을 사수하는 것에 집중해 보자고.”
네더만의 눈길이 저편을 향한다.
“나머지는 저놈이 알아서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