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제197화 지금 살아가고 있는 (1)
황제는 눈을 번쩍 뜨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비단같이 부드러운 이불이 흐트러졌다.
그의 손은 자연스레 심장께를 부여잡고 있었다.
‘뭐지?’
몸 안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쑥 하고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상태창.”
이름 : [아스라낙 윈 크레본]
권능 : [공백]
특성 : [이능 부여][압도적인 위엄][제왕의 검]……
일순 말문이 막혔다.
[회귀]가 표기되어 있던 권능란이 빈칸이었다.
갑자기 왜?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흐릿한 기억이 있었다.
꿈결처럼 멀고 뿌연 장면.
그 안에서 한 사내가 검을 늘어뜨린 채 서 있다.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흐릿하게 보이는 그가 쥔 검의 형태는 대륙의 것과 달랐다.
황제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 녀석이 흰 사자?’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흐릿한 의식 속에서 자신은 분명 그와 조우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는 모르겠다.
하나, 그자로 인해 회귀의 권능이 사라진 것은 확실했다.
그냥 알았다.
두근, 두근.
황제는 세차게 뛰고 있는 심장의 박동을 들었다.
심방이 정말 오랜만에 다시 뛰고 있었다.
심장께가 시큰하다.
칼날이 목에 드리웠을 때도 이만큼 서늘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회귀할 수 있었으니까.
그에게 죽음은 새로운 시작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
다음은 없다.
다음이…… 없다.
그것을 선연히 깨닫는 순간, 권태로웠던 삶에 생기가 칠해진다.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동시다발적으로 태동하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 삶이라는 걸 깨닫게 된 지금 이 순간.
황제는 꼭 잃어버렸던 삶을 되찾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뇌가 깨이고 집중력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벼려진다.
왜일까.
분명 궁지에 몰렸음에도 그것이 기껍다.
황제는 생소하지만 익숙한 감정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냐. 한번 제대로 붙어 보자꾸나.”
* * *
온통 새하얗게 칠해진 공간.
나는 그곳에 서 있었다.
“수고했다.”
가짜 왕세자가 격려하며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다 지켜보고 있었다고.”
“그건 뭐였지?”
“세계의 그림자.”
그림자?
“간단해.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역천의 대가를 이겨 내야 하는 것처럼, 과거를 바꾸기 위해서도 세계의 관성을 이겨 내야 하는 거지.”
최초의 세계선을 뒤틀 때마다 그에 반하여 일어나는 힘.
미래를 바꾸려 할 때는 역천의 대가가.
과거를 바꾸려 할 때는 세계의 그림자를 이겨 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황제가 쌓아 온 무력의 그림자랄까?”
나는 아스라낙에 덧씌워져 있던 그림자를 떠올렸다.
그는 분명 자신은 아스라낙 윈 크레본이라 칭했었다.
“황제가 그 정도로 강하다는 건가.”
“아마 더 강하겠지.”
황제의 무력은 예상외였다.
그것이 전력이 아니라면 무한의 속검을 넘어서는 것도 모자라 천마까지도 넘어설 듯했다.
전생을 통틀어도 최강의 적.
가짜 왕세자는 내가 아무 말도 않고 있자 혼자 찔렸는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도 차원의 관리자가 되면서 갑작스레 얻은 지식이야. 그 녀석을 보고 나서야 세계의 그림자가 있다는 걸 알았다고. 일부러 말 안 해 준 게 아니라.”
“일단 이제 끝난 건가?”
어차피 세계의 그림자든 뭐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래. 이제 황제는 회귀할 수 없어.”
“다시 얻을 수는 없겠지?”
나침반까지 빼앗았지만, 혹시 몰랐다.
아스라낙은 본래 최초의 세계선에서 회귀의 권능을 얻고 죽을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회귀의 권능을 얻지 못한 대신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 세계에서 그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알 수 없는 바였다.
가짜 왕세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일은 없어. 이미 권능이 발동된 상태에서 그 문을 닫은 거야. 누구든 최소 300년은 지나야 권능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지금이라면 움파움파족의 족장도 건네줄 수 없어.”
그럼 되었다.
이제 같은 과거는 반복되지 않을 거다.
“이제 돌아가겠다.”
“좋은 생각이야. 나도 네 얼굴을 보는 게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거든.”
가짜 왕세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눈앞에 푸른 포털이 생겨났다.
“잘 가라. 다시는 오지 말고.”
나는 별 대꾸 없이 포털을 넘었다.
이 자식이야 알아서 잘 살아가겠지.
솨아아아.
몸을 훑는 청명한 감각과 동시에 나는 어느새 제단의 상층부에 서 있었다.
세상은 깜깜했다.
하나 나는 내가 본래의 세계로 돌아왔음을 쉬이 알 수 있었다.
제단 아래에 깔린 움파움파족의 마을이 달랐다.
할렌트에게 한 번 빼앗겼다가 되찾았기 때문.
이제 나는 내가 살아가던 본래의 세계에 와 있었다.
이제 마그네트로 돌아갈 때였다.
나는 곧장 족장의 거처부터 찾았다.
잠에서 깨 눈을 비빈 족장은 나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엇! 자네는!”
“예. 다녀왔습니다.”
“수고했네. 꽤 오래 걸렸구만.”
사안이 중대해서일까.
그는 웬일로 나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군. 그래, 여기는 어쩐 일인가?”
그럼 그렇지.
내 존재 외에는 까맣게 잊은 듯했다.
나는 지금껏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말했다. 어차피 자세히 설명해 봐야 다 까먹을 테니.
“그런 일이 있었다니. 어쨌든 수고 많았네. 자네는 우리 움파움파족의 은인일세! 아니, 이 세계의 은인이지!”
“저는 그만 가 보겠습니다.”
“연회는!”
“필요 없습니다.”
나는 곧장 족장의 거처를 나섰다.
하루빨리 마그네트로 돌아가야 했다.
지금쯤이면 다음으로 나아갈 준비는 모두 끝이 났을 터였다.
아르에리아 조약으로 얻은 귀중한 시간.
한시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그래야 나도 내 삶을 찾을 수 있을 테니.
곧장 배를 띄운 나는, 일주일가량의 항해 끝에 포르센 항구에 도착했고, 육로를 통해 마그네트로 향했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마그네트의 기다란 성벽 앞에 서 있었다.
* * *
왕의 집무실을 밝히는 빛은 낮이고 밤이고 사그라들 줄 몰랐다. 루시안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갔던 일은 잘됐어?”
루시안이 물었다.
나는 그와 대면하고 있었다.
“답은 얻었지.”
“거기는 왜 다녀온 건데?”
떠나기 전, 나는 그에게 다녀와서 이 이야기에 관해 말해 주겠다고 했었다.
그럴 생각이기도 했고.
“불멸의 도시 해석본 때문인 거지? 뭐 특별한 내용이라도 있었어?”
“그저 뜬소문이더군. 괜히 너까지 신경 쓸 거 없다.”
하나 나는 그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황제의 회귀에 대해.
그로 인해 우리가 빼앗긴 삶에 대해.
전쟁을 겪지 않았을 프렌치아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알아서 좋을 게 하나 없는 이야기니까.
우리의 현실은 이곳에 있었다.
그것은 어떤 이유로도 달라지지 않는 명백한 사실.
우리가 누렸어야 할 삶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헛것에 지나지 않았다.
루시안은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일 거다.
그에게는 시답잖은 일에 관심을 가질 만큼 여유가 없었다.
나는 피곤에 전 루시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연회에서 본 녀석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때의 루시안이 잘 가꾸어진 정원의 꽃과 같다면, 지금의 루시안은 들꽃이었다.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고난 속에서 피어난.
화려함은 덜할지라도 단단하고 억세다.
내가 말했다.
“준비는?”
“다 됐지.”
루시안이 내게 두루마리를 건넸다.
펼쳐 보니 수많은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내가 앞으로 죽여야 할 이들.
나라를 팔아먹고 제국의 붙은 놈들이 이리 많았다.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이 명단에 올라 있는 자들을 모조리 죽일 생각이었다.
그들이 쌓아 올린 부와 권력.
그리고 그들의 가문은 모두 먼지가 되어 흩어질 것이다.
“좀 많지?”
“2년 뒤에는 프렌치아가 좀 깨끗해지겠지.”
“그렇게 될 거다. 반드시.”
루시안이 씩 웃어 보였다.
그와 대화를 마무리한 나는 거처로 돌아왔다.
내 거처는 왕성의 별궁에 마련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왔음에도 방은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몸을 정갈히 한 나는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누였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기포처럼 하나둘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하지만 어차피 결론은 하나.
황제의 목을 베는 것.
그러나 그 이전에 프렌치아의 기틀을 잡는 게 우선이다.
녀석은 그다음.
아르에리아의 조약이 끝난 후에.
그리고 그 모든 일이 끝나면 나 또한 자유로워질 테지.
“제네스 니임!”
이른 아침부터 알렌의 목소리가 복도부터 울려 퍼졌다.
나는 녀석이 건물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벌컥!
빡!
“끄악!”
하여간.
알렌은 제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주저앉았다.
그 와중에도 내게 반가운 눈길을 보낸다.
이제 이 정도로는 끄떡도 없다.
“끙. 어제저녁에 오셨다면서요!”
“그래.”
“제가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왔다니까요!”
“슬슬 떠날 채비나 해.”
“예?”
“이틀 후에 출발할 거다.”
“드디어!”
알렌은 감격에 찬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평소의 제네스 님답지 않으시네요.”
본래의 나라면 당장, 아니면 늦어도 내일 아침에 출발했을 거다.
하지만 나도 사람이다.
여태 이리저리 죽어라 달렸는데, 휴식도 취해야지.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죠? 그래도 저를 버리지 않으셨네요! 드디어 함께 간다니. 저는 제네스 님이 저를 놔두고 다른-.”
빡!
“끄악!”
간만에 여정을 함께할 생각에 들뜬 알렌을 치우고, 나는 네더만을 찾았다.
정확히는 네더만이 있는 훈련장을 찾았다.
“여, 왔는가. 소식 들었네. 하하!”
네더만은 손을 들며 호탕한 미소를 지었다. 부둣가에서 손을 흔들며 배웅하던 녀석을 생각하니 퍽 우습다.
“훈련은 제대로 시켜 놨겠지?”
“하. 물론이지. 이 몸을 뭘로 보고.”
네더만은 제 가슴팍을 치며 큰소리를 쳤다.
내가 잠시 맡고 있었던 레오니랜서의 후보 기사들.
나는 그들의 훈련을 네더만에게 맡겨 둔 상태였다.
돌아와서 확인하겠다는 협박도 잊지 않았었다.
“뭐, 보면 알겠지.”
나는 멀뚱히 상황을 지켜보는 후보생들에게 턱짓했다.
“한 놈씩 봐 줄 테니 줄 세워.”
“호오. 그런 수고까지 한다고?”
네더만은 내 적극적인 태도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기초 훈련이기는 했다만 잠시나마 내 손이 닿았던 자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왕궁 기사단, 레오니랜서를 이을 자들.
내가 기억하는 그 이름의 무게에 걸맞은 실력을 가져야 할 터였다.
내가 떠나고 나면 내가 아닌 이들이 이 나라를 지켜야 하니까.
그것이 내가 여기까지 친히 나선 이유였다.
“전력을 다하라고 해.”
“하. 걱정 말라고. 죽일 각오로 달려들라고 하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더만은 한 곳으로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자, 지금부터 저 녀석이 대련 상대를 해 준단다. 여태까지 해 온 지옥 훈련의 결과를 보여 줄 차례다.”
“네? 저자가 저희 전부를 혼자 상대하겠다고요?”
다들 황당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게, 또래로 보이는 자가 혼자 자신들 전부를 상대하겠다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눈 부릅뜨고 온몸으로 검을 느껴 보거라. 앞으로 평생 지침이 되어 줄 거다.”
네더만의 말이 사실이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지금은 내 검에서 많은 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경지가 오르고 시야가 트일수록 그 가치를 점차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나아갈 방향이 되어 줄 테지.
상승의 검도를 보고 몸으로 느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얻게 되리라.
그것은 모두 개인의 몫이기는 하지만.
“예…….”
후보생들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네더만의 말이니 따르기는 하겠다만 다들 지금 상황이 탐탁지 않은 느낌이었다.
괜히 본인이 더 들떠 있던 네더만은, 훈련생들의 눈빛이 반짝이지 않자 제 이마를 쳤다.
그리고 말했다.
“저놈이 흰 사자다.”
“예에?!”
후보생들에게서 일제히 반문이 터졌다.
흐느적거리던 몸짓이 일제히 발딱 선다.
“이제 좀 감이 오나?”
네더만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죽일 각오로 물고 늘어지라고. 뭐 하나라도 얻어 가고 싶다면.”
잠시 후.
나는 날이 없는 수련검을 쥔 채 훈련생 중 한 명을 앞에 두고 있었다.
첫 번째 대련자였다.
내게 깍듯이 인사하는 녀석.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뜨겁다 못해 세차게 불타오르고 있다.
“그럼 시작하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 타작은 시작됐다.
퍼버버버벅!
“끄아악!”
열망으로 들끓던 연무장에 시원한 타격음과 함께 처절한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