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제195화 세계의 그림자 (3)
아스라낙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네 병사들인가.”
“병사들? 그게 무슨 말이지?”
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멍청한 표정에는 거짓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질문을 바꿨다.
“너를 쫓는 무리가 있나.”
내 물음에 그의 표정이 싸늘히 식는다.
“나를 쫓는 무리야 무수히 많지.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적들은 다급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스라낙의 표정을 봤을 때 녀석을 따르는 무리로 보이지 않았다.
“꽤 많은 병력이 도시로 다가오고 있다. 네 기사들을 불러라. 움파움파족을 지켜.”
“저-.”
녀석의 말은 걸음 뒤에서 흩어졌다.
나는 도시를 향해 빠르게 가까워져 오고 있는 이들에게 향했다.
수가 꽤 많았다.
“뭐, 뭐야?”
적들의 움직임을 발견한 움파움파족의 당혹스러운 음성이 스친다.
나는 이미 그 앞에 있었다.
검광이 흩뿌려지는 순간 일대가 폭발한다.
콰과과과광!
선명한 빛줄기에 휩쓸린 이들은 모조리 피를 뿜으며 절명했다.
“황자를 찾아라-!”
수풀을 헤치며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는 기사들.
아스라낙을 뒤쫓아 온 이들이 맞는 듯했다.
수가 많았다.
움파움파족과 함께 있다는 걸 사전에 파악했을 확률이 높았다.
아무래도 아스라낙과 함께 온 이들 중 간자가 있는 듯했다.
“모조리 죽-.”
고함치는 자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나는 녀석을 스치듯 지나쳤다. 검이 쉴 틈이 없었다.
“이 무슨?”
아스라낙의 기사들 또한 소요를 듣고 빠르게 입구로 모여들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마을 사람들을 제단 쪽으로 모아라. 그들을 지켜. 저들은 내가 막지.”
적의 걸음을 막을 목책도 없었다.
입구의 반경이 넓어 혼자서는 손이 모자랐다.
“아니, 혼자서 어쩌려-.”
에로인의 염려를 검으로 묵살했다.
검을 쥔 팔이 흐릿해지는 순간 빛 무리가 번진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쏘아진 빛살이 풀숲에서 튀어나오는 적들의 심장을 단숨에 꿰뚫었다.
여럿의 몸이 동시다발적으로 뒤집어졌다.
“가라면 가.”
“아, 알겠소.”
에로인과 기사들이 떠나고, 나는 잠시간 그 앞을 막고 있었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수풀을 넘는 적들을 수평으로 집어삼켰다.
한바탕 쓸듯이 지나갔다.
그로 인해 잠깐의 틈은 벌 수 있었다.
나는 움파움파족들의 움직임을 감각하며 걸음을 물렸다.
그들 또한 위기를 감지했는지 에로인과 기사들의 통제를 잘 따르고 있었다.
잠시 적들의 공세를 늦춘 나는 뒤편의 높은 건물 위에 올랐다.
도시의 전반적인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적들을 베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지금은 움파움파족을 지키는 게 우선.
기파를 만두피처럼 얇게 저며 일대에 퍼트렸다.
세심히 퍼진 기의 표면 위로 파동이 인다.
그 속에서 움파움파족과 적을 구분하는 건 내게 일도 아니었다.
뇌운검의 검광이 허리춤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늘어뜨렸다.
그리고 연주가 시작됐다.
파앙-!
튕겨진 손가락에서 쏘아진 탄지공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 적의 머리통을 부순다.
거리가 상당함에도 그랬다.
앞을 막아 오는 벽이 있으면 그대로 뚫고 지나갔다. 움파움파족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이들을 우선했다.
위기를 막고 요인을 격살하기 위함이었다.
파바바바방-!
나는 탄금을 연주하듯 손가락을 튕겨 냈다.
손짓에 맞춰 이곳저곳에서 붉은 꽃이 피었다.
“저쪽이다!”
“저놈을 막아!”
내 위치를 파악하고 몰려드는 이들.
어중이떠중이 용병들이 아니었다.
조직력을 갖춘 자들.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검을 벼려 왔음이 쉬이 느껴졌다.
탄지공을 쉽게 파훼하며 적들은 다가왔다.
거리가 멀었고 공격 궤도가 단순했다.
경계한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을 터였다.
적들이 거리를 좁혀 왔을 때, 나는 손을 내리고 검을 뽑아 들었다.
적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이 정도면 움파움파족이 몸을 피할 시간은 충분했다.
“뒈져라-!”
사방에서 들이치는 자들.
일순 손끝에서 강렬한 빛이 번쩍였다.
푸-확!
궤적을 따라 넓게 피어나는 피 구름.
나는 적들을 베어 내며 제단의 입구로 향했다.
앞을 막아 오는 자들은 모두 가볍게 치워 냈다.
이제 막 아스라낙의 기사들과 적들의 교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
“입구는 여기 하나뿐일세.”
족장의 말이었다.
에로인을 비롯한 기사들은 움파움파족이 들어간 제단의 입구를 막고 섰다.
입구가 컸다.
열여덟 명의 기사가 모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움파움파족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준 덕에 사망자는 없었다.
문제는 이제 저들을 막아야 한다는 건데.
한눈에 봐도 그 수가 아군보다 월등히 많았다.
“전하! 안쪽으로 어서 드십시오! 이곳은 위험합니다!”
에로인은 뒤편에서 걸어오는 아스라낙을 보고 화들짝 놀라 말했다.
하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나를 죽이러 온 자들이다. 어차피 너희들이 모두 죽으면 나 혼자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음이야. 그러니 죽어도 여기서 죽는 게 맞다.”
“…….”
에로인은 입술을 꾹 물었다.
황자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도시 전체가 포위되어 있었고, 적들의 수가 많았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자신의 실책이었다. 설마하니 적들이 여기까지 쫓아올 줄이야.
이곳은 프렌치아와 가까운 바다였다.
여기까지 여러 척의 범선을 가지고 왔다는 건 현 상황을 정확히 가늠하고 온 것이란 이야기.
내부에 배신자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여기는 위험합니다.”
아스라낙 또한 에로인이 염려하고 있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너희들을 의심할 생각은 없다.”
아스라낙이 기사들을 주욱 훑었다.
황제의 자리를 노릴 때부터 모든 걸 잃고 황궁을 나서는 순간까지 자신을 수행하겠다며 따라나선 이들이다.
지금까지 무수한 전장을 함께 넘어온 동료들.
누구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게 다른 방도가 있었겠지.”
간자 외에도 경우의 수는 많았다.
그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저들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는 것. 적어도 우리 때문에 움파움파족이 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움파움파족을 모른 척하고 도주할 수도 있었다.
하나 황자는 이곳을 자신의 무덤으로 정했다.
탈출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타인의 희생을 당연시하지 않는 사람.
국민들을 소중히 하는 사람.
그렇기에 그를 따랐다.
에로인은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막을 수 있을까?’
사실상 불가능했다.
적의 수는 대충 가늠해도 백을 훌쩍 넘어갔다.
거의 10배에 이르는 전력 차이.
게다가 면면을 살펴보아도 만만한 자가 없다.
하나같이 익스퍼트에 오른 기사들.
적의 덫을 빠져나갈 방도는 없었다.
하지만 왜인지 여기서 죽을 것 같지 않다.
“대체 저 녀석 얼마나 강한 거지?”
“그러게 말입니다…….”
저편에서 굉음이 일고 있었다.
아직도 전장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적들은 고작 한 사내를 넘어서지 못해 고전했다.
에로인은 아까 전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흩뿌려진 검광에 꼬치처럼 꿰이던 적들.
그는 적들을 허수아비 베듯 쉬이 베어 넘겼다.
익스퍼트를 넘어선 기사들임에도 그랬다.
거기에 손가락을 튕겨 사람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기까지.
그것도 수십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경지가 가늠되지 않는 무력이었다.
적어도 익스퍼트 최상급에는 올랐을 테지.
그런 그가 자신들의 편에 선 이상, 이 싸움에 승산이 없는 건 아니었다.
“크큭. 여기에 계셨군요.”
아스라낙을 발견하고 서늘한 웃음을 흘리는 자들.
적들이 앞으로 깔리기 시작한다.
입구를 겹겹이 둘러싸는 자들.
그들의 기세가 사위를 짓눌러 왔다.
에로인은 검을 꽉 움켜잡으며 각오를 다잡았다.
이곳은 자신의 무덤이 될지언정, 황자의 무덤이 되지는 않을 터였다.
그때 눈앞으로 하나의 등이 솟아난다.
그 존재를 따른 세찬 바람이 머리칼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모두 피신시켰나?”
그 뒤를 따라 한 점의 호흡도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하늘이 열린다.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적의 기파가 단숨에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 그렇다.”
에로인은 존댓말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눌렀다.
아스라낙이 씁쓸한 태도로 말했다.
“내 목을 노리는 자들이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군. 모두 내 불찰이다.”
“됐다.”
“그리 말해 주니 마음은 편하군.”
아스라낙이 어깨를 으쓱하자 적진에서 웃음이 흘렀다.
“하늘에 가장 가까운 황자께서 쥐새끼 등 뒤에 숨어 뭐 하시는 겁니까.”
기사들이 갈라지며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볼에 기다란 흉을 가진 중년의 사내.
들어 올려지는 입꼬리를 따라 그 흉이 일그러진다.
“이제 마땅히 도망칠 곳이 없나 봅니다.”
* * *
적들은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병력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죽었겠지.
아마 이 녀석들 때문인 듯하다.
족장이 아스라낙에게 회귀의 권능을 넘겨준 이유.
움파움파족이 모두 죽는다면 회귀의 권능은 이어지지 못할 터.
족장에게 움파움파족의 몰살은, 세계의 멸망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어쩔 수 없었을 테지.
그들이 아니면 인류는 회귀의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니.
그러니까 이 녀석들만 막아 낸다면 아스라낙이 회귀의 권능을 얻게 되는 일은 없을 터였다.
“쳐라-!”
검을 쥐고 쇄도해 오는 이들.
파츠츠츠츳!
그에 맞서 흐르는 검에 뇌전이 담긴다.
천령신공 검법편.
벽력의 장(章) 뇌정(雷霆).
번갯불이 번쩍하더니 갈가리 찢어진 뇌전 줄기가 사방으로 내달렸다.
쿠과과과과광-!
압도적인 뇌력에 단숨에 초토화되는 전방.
짙은 먼지 구름이 흩어지고 드러난 자리에는 뇌전의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 위로 붉은 핏물이 빗물처럼 흘러든다.
“…….”
한 번의 일격에 깊은 적막이 흘렀다.
앞에서 으스대던 기사 녀석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시체를 찾을 수도 없었다.
뇌전의 흐름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딱딱하게 굳은 채 주변을 살폈다.
일대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멀었다.
현실이 와닿지 않은가 보다.
나는 그에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칼끝이 흔들릴 때마다 하나의 생이 잘려 나갔다.
“노, 놈을 막아라!”
나는 그들의 무리를 단신으로 휘저었다.
고도의 훈련을 거친 자들답게 도망치는 자는 없었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도 칼을 들이밀었다.
나는 그들의 목을 쉬이 베며 생을 갈취했다.
뿌옇게 이지러진 칼날이 끊이지 않는 선을 그렸다.
나를 지나쳐 간 이들도 있었으나, 쫓지 않았다.
아스라낙의 부하들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적들의 전열을 마음껏 유린했다.
푸확!
치솟는 핏물과 함께 시체가 넘어간다.
내 주위로는 더 이상 서 있는 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전장에 지독한 고요가 내린다.
“자네는 대체 누구인가?”
에로인이 흐릿한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나는 녀석의 멍청한 질문에 답하지 않고 그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아스라낙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노리는 적들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 자였다.
전장이 압도적으로 흘러간다고 해서 걸음을 물렸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가 보이지 않는다.
“아스라낙은 어디 있지?”
“응?”
녀석들도 그제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녀석들을 지나쳐 안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적에게 납치될 확률은 없었다.
제단 밖으로 나갔을 확률도 없었다.
그가 움직일 수 있는 방향은 하나뿐이었다.
“누구인가-!”
“제네스잖아!”
“아!”
“막아 낸 건가?!”
안으로 들어가자 한곳에 모여 기도하고 있는 움파움파족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무리를 빠르게 훑었다.
“족장은 어디 있지?”
“족장님?”
그들의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역시나 족장도 아스라낙도 모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제단의 심처를 향해 걸음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