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제191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3)
국민들의 삶을 잠시 훑어본 나는, 요기를 마치고 다시 여정에 올랐다.
이 세계의 국민들의 평안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만히 쉬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남하하며 마을을, 도시를 훑고 내려갔다.
당연히 제국의 그림자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두 세계의 차이는 점점 더 극명하게 색을 더했다.
나는 그 차이를 보며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국민들의 평안과 일상.
그것이 가지는 무게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국민이 아닌, 잃어버린 나의 삶 또한 직접 볼 수 있을 터였다.
살랑.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고 지나간다. 나는 드높게 솟은 마그네트의 성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굳건히 세워진 성벽.
그리고 그 위에서 펄럭이는 프렌치아의 국기.
나는 그 광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내가 알던, 내가 기억하던 프렌치아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이 벽 너머에는 전생의 내가 있을 터였다.
안으로 들어오니, 활기찬 도시의 풍경이 펼쳐졌다.
폐허가 된 마그네트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
그리고 폐허가 되기 전보다 익숙하고 정겨운 분위기.
제국의 색이 빠진, 내가 기억하고 전생의 내가 살아갔던 그 프렌치아가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져 있었다.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랬다.
물론 달라진 부분도 많았다.
기억하는 곳보다 기억나지 않는 곳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이질적이지 않다.
프렌치아의 정취가 도시 전역에 짙게 묻어 있었다.
나는 기억을 하나씩 더듬으며 천천히 내가 알던 그 도시를 걸었다.
“역시 없네.”
‘하라브의 아침’이 있던 곳에는 ‘정겨운 저녁’이라는 여관이 자리해 있었다.
하라브는 세리어스가의 사람이었기에 세리어스 가문이 멸문하지 않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관의 종업원도 마찬가지로 유리아가 아니었다.
나는 걸음을 돌렸다.
“빨리빨리 움직여!”
“저쪽에 달고!”
“조금 오른쪽!”
도착한 테나스타 광장에는 높이 솟은 시계탑이 없었다. 저편에서 화단과 다양한 장식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곳곳에서 프렌치아 국기가 펄럭였다.
축제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바로 내일이 건국 기념일이기 때문이다.
기막힌 우연이었다.
게다가 내일은 왕궁의 절반을 개방한다고 하니 많은 인파가 왕궁으로 몰릴 터였다.
안 그래도 미래의 나를 보고 싶었는데.
그 바람이 이루어질 듯했다.
나는 하라브의 아침이 있던 곳에 자리한 정겨운 저녁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저녁 내내 창가로 음악 소리가 흘러들었다.
전야제의 밤은 활기찼다.
도시 전체가 구름 위에 두둥실 떠올라 있는 것 같았다.
매년 있는, 프렌치아에서 가장 커다란 축제였다.
나 또한 건국 기념일을 좋아했다.
모두가 하나 되어 즐기던 축제.
그저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흥겨운 노랫소리만 듣고 있어도 절로 마음이 충만해진다.
그 소음을 따라, 무의식에 잠겨 있던 오래전의 기억이 수면 위로 하나둘 떠올라 입가에 맺혔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왕성으로 향했다.
웅성웅성.
왕성에 가까워질수록 대로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년에 한 번 왕성이 개방되는 날이다.
아버지의 어깨에 목마를 탄 아이들도 보이고, 손을 꼭 잡은 연인들과 다 함께 나온 가족들도 보였다.
시민들이 줄줄이 마그네트에 입성하고 있었다.
전생의 나는 이 광경을 높이 솟은 아르센 첨탑에서 구경하고는 했었다.
“천천히 움직이세요!”
“줄 서십시오!”
그런데 그 풍경 속에 직접 들어가 있으니 생각보다 그리 따뜻한 경험은 아니었다.
바쁘게 인파를 통제하는 경비병들과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
굳이 순서를 기다릴 생각이 없던 나는 빼곡한 인파를 여유롭게 거슬러 올랐다.
“푸하! 이제 좀 살겠네!”
왕성에 들어서자 곳곳에서 숨을 터트리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꽉 막혀 정체된 입구와 달리 너른 왕성은 여유롭게 걸음을 옮길 정도로 널널했다.
나는 그 왕궁을 슬며시 훑었다.
왕궁은 새 건물들을 올린 총독부와 달리, 어렸을 적 지내 왔던 왕궁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천천히 걸으며 그 풍경을 눈에 담았다.
반듯이 다듬어진 관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꽃과 푸름을 품은 화단이 그 사이사이에서 생동감을 품는다.
정갈하고 기품 있는 정원.
곳곳에 간헐적으로 경비병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산책하듯 그 거리를 거닐었다.
작게 흐르는 인공 천의 물빛이 푸르게 일렁인다.
“엄마, 이것 봐요.”
“이게 아일라 꽃이란 거야. 엄청 예쁘지?”
“저 조각상은 뭐예요?”
가족끼리 삼삼오오 모여 걷는 이들.
이 또한 두 세계의 차이점이기도 했다.
작금의 프렌치아에는 가족 구성원이 온전한 경우가 적었으니까.
한 집만 건너도 부모를 잃은, 자식을 잃은, 배우자를 잃은 이들이 넘쳐났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의 빈자리가 반드시 있었다.
전쟁의 후유증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널따란 정원.
그 안에 사람들이 이미 가득 차 있었고, 저 멀리 높게 쌓인 연단이 있었다.
왕이 연설할 자리였다.
그리고 그 양옆으로는 왕족과 연례행사에 참여한 귀족들이 앉을 자리가 있었다.
나는 앞으로 걸어갔다.
맨 앞자리까지.
귀족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 자도 있었고, 얼굴이 익숙한 이도 있었다.
그들을 보며 전생의 기억이 꿈틀거리며 생동감을 찾아간다. 마치 시간이 당겨지며 그때 그 시절로 당겨지는 듯했다. 알 수 없는 끌림이 저 먼 곳에서부터 나를 끌어당겼다.
“하.”
나는 누군가를 보며 짧게 실소했다.
연단을 보호하기 위해 배치된 왕국을 대표하는 기사단, 레오니랜서.
그중 지금 막 장내로 들어서는 남자의 얼굴이 익숙했다.
리포드.
그는 위풍당당한 태도로 자리에 섰다. 아무래도 단장급 인사가 된 듯했다.
매번 불만을 품은 얼굴로 애같이 떼를 쓰던 녀석이 엄중한 태도로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그를 보며 올라갔던 입꼬리는 금세 싸늘히 식었다.
“…….”
나는 장내로 들어오고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할렌트 바레인.
언제나처럼 반듯이 넘긴 머리칼이 기품을 품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귀족적인 자태를 품은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근방에 앉아 있는 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그를 보았다.
근엄하고 단단한 위엄을 간직한 태도.
바레인가의 가주 자리에 올라 있을 것임에도 이곳까지 왔다는 건, 그가 그만큼 이 자리를 무겁고 귀하게 여긴다는 방증이었다.
“재밌군.”
나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황제의 직속 친위대가 되어 총독의 자리에 오른 그가, 프렌치아의 건국 기념일을 무겁게 여긴다니.
아니.
어떻게 보면 그런 그가 내가 기억하고 있던 외숙부였다.
언제나 귀족적이며, 기사의 명예와 신하의 도리를 알고 있던.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새로이 등장하는 인물에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세리어스 공작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할렌트와 막역한 사이였던 그는 호탕한 미소와 함께 할렌트에게 악수를 건넸다. 지금까지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할렌트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흘렀다.
불멸의 도시에서 보았던 잔혹한 미소와는 전혀 다른.
간혹 내게도 지어 주던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바레인가의 가주께서 여기까지 어인 일인가. 왕궁에 너무 자주 걸음 하는 거 아닌가.”
“건국을 기념하는 날 아닙니까. 바레인가의 가주이기 전에 프렌치아의 국민으로서 당연히 와야지요.”
“정말 그것 때문에 온 건가?”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는 공작께서는 어찌 이리 자주 오십니까. 세리어스가도 만만치 않게 멀지 않습니까.”
“나는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왔네만.”
그들이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루시안이 장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푸른 청발.
청아한 미소를 품은 그는, 지금 내 앞에 있는 모습보다 더 밝아 보였다.
그만큼 존재의 무게감은 가벼워졌지만, 깨끗하고 밝은 표정은 주변을 환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가 할렌트에게 깍듯이 예를 표했다.
“루시안 세리어스가 할렌트 후작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구나.”
“예. 그동안 무탈하셨는지요.”
그들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마치 현실에서 아득히 벗어난 무언가를 감상하는 느낌.
한바탕 꿈결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편의 동화처럼 모든 이야기가 너무나도 화목하게 풀어진다.
그리고 그때.
저벅.
그 화목함에 방점을 찍는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를 곧게 펴고 걷는 위풍당당한 노인.
그의 푸른 눈빛이 시리게 타오르는 듯하다.
재상, 로드르 헤이어서.
그가 자리에 오르자 모두가 공손히 경의를 표했다.
내 품에서 뼈마디만 남기고 죽어 간 가냘팠던 노인은, 소의 뿔도 단번에 뽑을 수 있을 만큼 건장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프렌치아는 당신이 원하던 나라입니까?’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가 만들어 간 프렌치아의 10년.
얼마나 그의 이상에 가까워졌는지.
지금의 그는 어떤 이상을 품고 있을지.
국민들의 단편적인 삶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그 안에서 부대끼고 살아봐야 지금의 프렌치아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터였다.
지금 프렌치아에 깔린 평안함은 단지 전쟁이 없었기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나는 그가 어떤 나라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프렌치아를 생각하며 푸른 불꽃을 불태우던 그였으니까.
나는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적과 아군이 모두 함께 프렌치아의 이름 아래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곳을 바라보았다.
“왕세자 내외 입장하십니다-!”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와아아아-!”
국민들의 환호 속에, 연회장을 가로지르는 붉은 융단을 밟고 나오는 이들이 있었다.
청명하게 맑은 날, 하늘에 흩뿌려진 꽃가루가 눈송이처럼 흩날린다.
장중하면서 부드러운 행진곡을 따라 그들은 천천히 걸었다.
시간은 아주 느릿하게 흘러갔다.
감각을 예민하게 세우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주변의 함성이 멀어지고 있었다.
국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그들만이 내 눈에 가득했다.
전생의 나와 이리엘이었다.
그들이 내게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보다 밝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리고 내 품에는 작은 아이가 안겨 있었다.
프렌치아 왕가의 상징인 은발을 한 남자아이.
한 세 살은 되었을까?
자그맣고 귀엽고 똘망똘망하게 생긴 아이였다.
생김새만 보아도 누구의 자식인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
놀랄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성년이 되던 18살에 결혼을 했을 테니, 지금의 나와 이리엘 사이에 아이가 있는 건 당연했다.
겉으로 봤을 때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들이 왕좌의 측면에 앉는다. 그리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보고 있어도 믿기지 않았다.
전쟁이 없었을 내 미래가, 너무나도 평안해 보이는 이 삶이.
꼭 다른 자의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에 이어.
“우와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울리고, 꽃가루가 흩날리는 세상 속을.
아버지와 어머니가.
내 기억 속에는 없는 모습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고 계셨다.
국민들의 환호와 밝은 햇살을 맞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