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제190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2)
나는 어느새 내가 처음 발렌시아 대륙에 떨어졌던 자리에 와 있었다. 정확히는 그 배경 안에 있었다. 저편에서 복면인들 사이로 불쑥 솟아나는 내가 보였다.
“갑자기 마른 땅에서 불쑥 솟아났다고!”
녀석은 내가 처음 등장한 장면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나와 그는 한쪽에 떨어져서 이미 지나간 과거를 보았다.
나는 말 그대로 갑자기 나타났다.
아무런 전조 증상 없이.
“대체 어디서 온 건데?”
평생을 여기 있을 녀석이었다. 이 녀석에게는 말해도 상관없겠지.
“알 거 없다.”
하지만 굳이 이야기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입만 아프니.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칫…….”
우웅!
혀를 찬 녀석이 손짓하자 허공에 포털이 생겨났다.
“같이 가 달라고 해도 같이 안 가 줄 거야. 너랑 같이 다니고 싶지 않거든.”
따라온다고 해도 떨어트릴 건데 무슨.
“여기와 그쪽의 시간의 흐름은 같겠지?”
가장 중요한 문제였지만, 지금까지는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중원과 발렌시아 대륙처럼 시간 차이가 있다면 난감해질 수 있었다.
“똑같아.”
“다행이군. 포털을 넘으면 이모텔 섬인가?”
“아니. 이곳의 출구는 하나야. 검은 숲.”
왠지 느낌이 그럴 거 같아 물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검은 숲에 같은 마법진이 있을 이유가 없으니.
“검은 숲은 세계의 그림자라고 보면 돼. 모든 세계선이 그 안에 얽혀 있지. 때문에 마나의 축적도가 심하고, 그것이 한계를 넘어서면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게 녹색의 오로라야.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입구는 이모텔 섬이고?”
“응. 참고로 회귀를 막을 수 있는 기한은 90일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초의 세계선은 모든 세계의 기준점이 되는 세계이기 때문에, 최초의 세계선에서 황제가 회귀 능력을 얻지 못한다면 황제는 회귀의 능력을 잃게 된다. 그렇다고 지금 그가 가진 이능을 잃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더 이상 회귀는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나는 녀석의 말을 뒤로하고 포털을 넘었다. 일순 빛무리가 눈가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호수 안의 마법진에 서 있었다.
“푸하!”
수면 밖으로 나오니 익숙한 풍경이 나를 반긴다. 지난번에는 동혈을 통해 이곳에 왔었다.
여기서부터 쉬지 않고 달려서 프렌치아로 갔었는데, 그 짓을 또 반복하게 생겼다.
그래도 이번에는 조금 여유가 있다.
왕세자가 말한 90일의 의미는 황제가 90일 후에 그 능력을 얻게 된다는 의미.
그러니 그 안에 이모텔 섬에만 도달하면 될 일이다.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숲을 벗어나자 나는 커다란 동혈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번처럼 위로 나가는 것보다는 그 길을 이용하는 게 나을 터였다.
그때 동혈 안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질감이 묵직하고 재빨랐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보지 않고도 알았다.
스르르륵.
동혈에서 풀어지듯 나와 목을 꼿꼿이 세우는 녀석.
거대한 뱀이 내게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한 번 베었던 녀석을 베는 건 더욱 쉬운 일이었다.
놈의 공격 패턴과 비늘의 강도를 잘 알고 있었으니.
쿠웅!
목이 잘린 거대한 몸뚱이가 바닥에 축 늘어졌다. 혹시 몰라 몸뚱이를 뒤적거렸으나 내단은 없었다.
“하등 쓸모없는 놈이로다.”
나는 녀석의 사체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동굴을 벗어나니 드레어스산의 가파른 경사와 저 멀리 펼쳐진 검은 숲이 웅장한 경관을 드러냈다. 검은색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듯했다.
“…….”
이 광활한 숲을 다시 가로질러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이 먹고 이게 뭔 개고생인 건지.
나는 불평을 뒤로하고 바닥을 박찼다.
일단 머물러 봐야 좋을 것도 없는 검은 숲은 최대한 빠르게 벗어나야 했다.
천령신공 경신편.
제1장 봉황익(鳳凰翼).
낮게 깔린 신형이 한 마리 새처럼 산을 가로지른다. 걸음을 박찰 때마다 공간이 한 움큼씩 사라졌다. 주변의 모든 풍경이 하나로 덩어리져 세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
콰과과광!
나는 익숙한 전장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키아악!”
“저쪽 막아! 포위해!”
몬스터들의 포효와 용병들의 고함.
나로서는 반가운 소리였다. 다섯 번의 호흡이 지나자 앞을 막아 오는 몬스터 무리가 있었다.
덩치가 산만 한 트롤의 무리.
개체수가 한눈에 봐도 스무 마리가 넘어갈 정도로 많았다.
내륙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일이 이곳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화르르.
칼날 위로 푸른 검기가 타올랐다. 기의 일렁임을 감지한 녀석들이 나를 돌아보며 포효했다.
“크아아-!”
내게 가차 없이 돌도끼를 찍어 오는 녀석. 감각을 활성화하는 순간 벼락처럼 떨어지던 돌도끼가 허공에 우뚝 멈춰 선다.
바닥에 끌릴 듯 늘어져 있던 칼끝이 일순 치솟으며 사선을 그렸다.
좌측 하단에서 피어난 섬광이 우측 상단에서 점을 찍었다.
느려진 세계에서 오직 나만이 제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푸확-!
푸른 선을 따라 검푸른 핏물이 피어올랐다. 선상에 놓여 있던 트롤은 돌도끼와 함께 깨끗하게 양단됐다.
“크아앙-!”
동시에 양 측면에서 들이치는 녀석들.
나는 공중에 몸을 뛰어 수평으로 회전했고, 그것을 따라 검기가 고리를 그렸다.
촤-악!
궤도에 있던 2개의 머리통이 동시에 허공에 날아오른다. 나는 트롤들을 고블린 베듯 손쉽게 쓸어버리며 전진했다.
“…….”
그리고 그 끝에서 얼빠진 표정의 용병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한순간에 적을 잃어버린 그들은 나를 귀신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심경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물었다.
“지금이 발렌시아력으로 몇 년도지?”
* * *
목책을 넘어 도착한 용병들의 낙원.
호객 행위는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손쉽게 물품들을 구매했다. 용병패는 입구에서만 검사하는 덕분에, 물건을 돈 없이 구입하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다.
질겅질겅.
고소한 육포를 씹으며 나는 최초의 벽을 바라보았다.
드높게 또 기다랗게 뻗은 성벽은 여전했다.
발렌시아력 549년.
황제가 회귀의 권능을 얻은 시점은 놀랍게도 지금의 시간과 같았다.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그 성벽 위에 올랐다. 광활하게 뻗은 설원이 한눈에 잘 담겼다.
이 또한 다를 거 없는 풍경이었다.
“다, 당신 뭐야!”
나는 프렌치아가 있을 저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프렌치아 왕국?
-당연히 알죠.
용병들에게 들은 바로 프렌치아는 건재했다. 제국과 합병된 일도 없었다고 했다. 당연히 독립을 위한 전쟁도 없었을 터였다.
그 말인즉, 내가 살고 있던 세계는 황제의 회귀로 인해 달라진 미래라는 이야기였다.
현재 이 세계의 프렌치아가, 본래의 역사대로 본래의 시간의 흐름대로 흘러갔을 프렌치아였다.
만약에 전쟁이 없었다면.
프렌치아가 패망하지 않았었더라면.
전생의 내가 죽지 않았더라면.
아쉬움으로 풀어냈던 그 모든 가정이 현실이 되어 있는 세계.
그 나라가 저편에 있었다.
좀처럼 뛰지 않는 심장이 두근거린다.
“너 뭐야! 거기서 안 내려와!”
나는 그대로 몸을 던졌다.
“저 미친놈이-!”
성벽만큼이나 높은 높이.
하나, 내게는 작은 담벼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면에 깃털처럼 사뿐히 내려선 나는 곧장 걸음을 박찼다.
파밧-!
걸음 뒤에서 눈발이 흩어지며 몸을 주욱 밀어냈다. 세찬 바람 소리가 하나의 굉음으로 뭉쳐 귀밑을 스쳤다.
흐릿하게 번진 신형이 설원을 가공할 속도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나는 그 이후로 한참을 달렸다.
내 관심은 오직 프렌치아에 있었다.
속도를 늦출 이유가 없다.
그렇게 쉬지 않고 빠르게 남하한 나는, 어느새 주르아든과 프렌치아의 국경선에 도착해 있었다.
“…….”
저 멀리 넘실거리는 산악이 한눈에 담긴다.
몇 번이나 본 풍경.
그 웅장함은 계절의 옷만 갈아입었을 뿐 여전히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 안에 담겨 있는 것들은 내가 지금까지 본 것과는 전혀 다를 터였다.
황제로 인해 미래가 비틀어지지 않았다면, 내가 누렸을 삶과 내가 다스렸을 나라가 눈앞에 있었다.
나는 국경을 넘어 주욱 내려갔다.
그리고 가장 먼저 도착한 영지는 베론과 함께 왔던 체즈웬성이었다.
나는 그때 비테로 체즈웬을 베고 이 성의 첨탑도 함께 베었었다.
성의 외형은 전에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하나, 그 첨탑의 정상에서 펄럭이고 있는 건 체즈웬의 문장이 아니었다.
현재 이 성은 비테로 체즈웬이 아닌, 아르에인 가문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제국의 국기가 아닌 프렌치아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일단 그것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편안하다.
“잠깐만 지나갈게요!”
“해너! 오늘 저녁에 술 한잔 어때?”
“네일리 아주머니! 엄마가 이거 드시라고 전해 드리래요!”
나는 천천히 걸으며 사람들의 일상을 보았다. 숙소로 가는 길에 위치한 시장에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활짝 웃는 이도 있었고, 인상을 찌푸린 자도, 우는 아이도 있었다.
왠지 베론이 생각났다.
잘 지내고 있을는지.
“엄마! 나 이거!”
“삶은 감자?”
“응! 이거 엄마가 좋아하잖아!”
나는 귓가에 잡히는 목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그런 내 눈가에 어미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검은색 곱슬머리의 아이가 담긴다.
베론이었다.
아이가 활짝 웃고 있었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
“앗뜨!”
어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아이는 결국 감자를 바닥에 떨어트렸고, 금세 울음을 터트렸다. 부모를 잃어도, 괴인에게 납치를 당해도 울지 않던 아이가.
“으아앙.”
고작 감자를 바닥에 떨어뜨린 것만으로 그랬다.
“으이구, 우리 울보. 조심하라니까. 자, 뚝.”
금세 울었다가 웃었다가.
천진난만한 아이의 얼굴이었다.
나는 점차 군중 사이로 멀어지는 베론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딸랑.
“어서 오세요.”
나는 지난번에 머물렀던 여관을 찾았다.
여관은 시끄러웠다. 주정뱅이들도 있었고 여행자로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나는 자리를 잡고 닭고기와 맥주를 주문했다. 그리고 가만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왁자지껄한 소음.
청각에 감각을 집중하니 하나로 뭉쳐져 들리던 목소리가 세세히 나눠진다.
모두 웃고 떠들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당연히 누군가를 욕하는 자들도,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들도 있었다.
각자의 다른 일상들이 끊임없이 번졌다.
그 다양한 목소리들 속에서 내가 살던 프렌치아와의 차이점을 찾자면.
그들의 목소리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입을 조심하지 않는다.
이 나라가 얼마나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내가 겪은 프렌치아와는 가장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거.
지금의 프렌치아에서는 어디서나 입을 가리고 이야기하는 자들이 많았다.
눈동자를 굴리고, 조심스레 속삭이고.
말 한번 잘못했다가 목이 떨어질 수 있는 세상이었으니까.
그것이 내 눈에 가장 달라 보였다.
현재, 이곳의 모두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힘든 날도 있고 슬픈 날도 있고 기쁜 날도 아픈 날도 있겠지.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적어도 생존의 두려움과 절박함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주 작은 단면을 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단면에서도 나는 국민들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그것의 차이를.
정말이지 쉬이 가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