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제188화 불멸의 도시 (3)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족장의 대답.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우선 읽어 보세요.”
나는 그에게 친절히 시간을 주었다. 그만큼 이 이야기의 진위는 중요한 문제였다. 고개를 뒤로 빼며 눈을 가늘게 뜬 족장은 빠르게 책장을 넘겨 갔다. 이야기의 흐름을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듯했다.
“맞네, 맞아! 다행히 조금의 소실도 없이 돌아왔구만!”
족장은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실되었어도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만, 어쨌거나 이 책에 적힌 내용이 소설이 아닌 사실의 역사라는 의미였다.
“지금은 모두에게 잊힌 이야기이지만.”
「불멸의 도시」에 적힌 내용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담겨 있지 않은 것들이었다.
“우리 움파움파족은 이 이야기를 지켜 내기 위해 신에게 선택받은 부족일세. 그리고 그 대가로 망각의 축복을 받은 것이지.”
이들의 건망증이 축복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만큼이나 위험한 힘이 이 책에 담겨 있었으니까.
그들은 망각을 통해 자신들이 지키고 기억하고 있는 그 힘조차 쉽게 망각하고야 마는 것이다.
나는 이 내용이 사실이라는 족장의 말을 믿었다.
믿음직스럽지는 않아도 거짓말을 하는 자들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 바로 잡아야 한다.
내가 물었다.
“그럼 회귀를 막으려면 어떡해야 합니까.”
회귀.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시간이 되감기는 현상.
몬스터를 모두 검은 숲으로 몰아냈던 이스피릴 대왕이 바로 이 이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황제 또한, 그 이능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회귀? 누가 회귀를 하고 있나?”
족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국의 황제가 그 이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책 속에 적힌 이능들. 그것들이 모두 현실에서도 등장했습니다.”
황제가 회귀하고 있다는 증거는 간단했다.
회귀하는 자가 가지는 권능.
그것은 타인에게 성장을 가속화할 수 있는 이능을 부여하는 권능인데, 이야기에서 나온 이능들의 능력과 황제의 직속 친위대가 가졌던 이능이 정확히 일치했다.
그리고 내 존재 또한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회귀를 통해 바꾼 미래는 그 비틀림의 정도에 따라 역풍을 맞게 되는데.
역천의 대가라 불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마그네트 성문에서 조우했던 베베토는 나를 역천의 대가라 칭했다.
아무래도 나는 그 역풍을 타고 이곳에 오게 된 듯했다.
나는 일련의 상황을, 나에 관한 이야기를 빼고 족장에게 전했다. 족장은 무릎을 치며 개탄했다.
“어찌 그 힘을 사사로운 욕망을 위해 쓰고 있단 말인가!”
이 회귀의 권능은 마계의 존재인 몬스터들로부터 세계를 지켜 내기 위해 창조신 아르아나가 인류에게 준 선물이었다.
하나, 황제는 그것을 개인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반드시 막아야 하네!”
족장이 단호히 소리쳤다.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황제가 회귀를 한다고 해서 이 세계에서 내가 한 일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시간은 되감기지 않는다.
그저, 과거의 시점에서 하나의 또 다른 세계가 태어날 뿐이다.
황제의 회귀를 따라 세계선이 분화되는 것이다.
그 세계에서는 내가 아닌 내가 태어날 것이고, 프렌치아는 또다시 패망할 것이다.
오직 황제만이 이 세계를 기억한 채 새로운 세계선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회귀라는 권능이 실제인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고, 또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 도시에 있기 때문이었다.
세계의 시작과 끝이 결정되는 곳.
불멸의 도시.
움파움파족과 이모텔 섬은 그 순간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당장 제단으로 가세! 만약 진짜 회귀의 권능이 작동하고 있다면, 그것을 이제 끝내야 하네! 그 힘은 개인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인류의 선물이라고!”
족장은 보좌하던 부족원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으로 그의 존재가 든든하게 다가왔다.
“흠. 대체 어쩌다 그자가 회귀의 힘을 얻었을꼬…….”
그는 침통한 신음을 흘리며 거처를 나섰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바깥의 바람을 한껏 들이켜며 마음을 다스린 족장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어디를 가려고 나왔더라?”
* * *
황제는 가만히 서신을 내려다보았다.
서신을 가져온 기사는 마치 죽을죄라도 지은 듯 바닥에 낮게 부복해 있었다.
패전의 소식을 가져왔으니 당연했다.
황제의 표정은 고요했다.
모든 계획이 실패했음에도 그랬다.
녹색의 오로라를 막지도, 마그네트를 되찾지도 못했다.
흰 사자 탓이었다.
‘쉽지 않군.’
이번의 역천의 대가 또한 언제나처럼 컸다. 입맛에 맞게 바꾼 미래의 역풍이 드높은 파도를 몰고 되돌아오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부는 바람의 크기만큼 파도도 높게 밀려오는 법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미래를 만든 만큼 그에 따른 반작용도 컸다.
흰 사자의 무력이 대체 어느 정도인 건지.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보다 한참 윗줄에 있는 듯했다.
‘직접 움직여야 하는 것인가.’
직속 친위대도 이제 남은 이가 고작 셋뿐이었다.
지금까지 흰 사자의 행보를 보았을 때 친위대의 전력만으로는 그를 막아 내지 못할 터였다.
직속 친위대의 빈자리가 크기는 하다만, 3년이란 시간은 적들에게만 주어진 시간이 아니었다.
그동안 새로운 인재를 찾아 친위대로 성장시키면 그만.
검은 숲에서 성장한다면 3년이면 유의미한 성과를 내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적어도 전력의 7할 정도는 금세 복구될 테지.
즉, 흰 사자만 제거한다면 대륙을 통일하는 데 문제는 없을 터였다.
“드디어 끝에 다다른 것인가.”
황제는 대륙 일통의 위업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흰 사자가 역천의 대가인 것이 확실한 상황.
그렇다면 간단히 그만 제거하면 될 일이다.
그의 무력은 가히 압도적이었으나, 자신 또한 무수한 회귀를 통해 검력을 쌓아 왔다.
따지고 보면 벌써 다섯 번째 소드 마스터.
이번 생애에는 바르안 알센도르보다도 더 빠르게 그 자리에 올랐다.
이제 지난했던 회귀의 굴레도 벗어던질 준비가 끝난 것일지도 몰랐다.
무수히 되감아 온 시간들.
그 많은 세계를 거치며 인간의 감정은 대부분 풍화되었으나, 확고한 목표는 여전히 건재했다.
이번 생애는 그 오랜 염원을 이룰 수 있게 되겠지.
* * *
고목과 다름없는 굵기의 불멸초가 넝쿨처럼 자라나 있었다. 알렌에게 수없이 들은 바 있었다.
“……이 안으로 가야 하는데. 여기가 왜 이러지?”
족장을 안내하던 부족원이 당혹스러워했다. 두꺼운 넝쿨 때문에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서걱.
손끝이 흐려지는 동시에 불멸초가 잘려 나갔다. 힘을 잃고 바닥에 늘어지는 줄기들. 나는 앞장서서 걸으며 길을 뚫었다.
“훌륭하구만!”
“멋지십니다!”
족장과 부족원이 손뼉을 치며 감탄을 해 댔다. 그렇게 길을 뚫고 들어가자, 천장까지 뻗은 굴뚝과 그 안에 놓인 거대한 아궁이를 볼 수 있었다.
사람 여럿이 들어가도 넉넉할 정도로 커다란 공간이었다.
우리는 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우웅.
내벽의 끝에 다다른 족장이 손을 가져가자 빛무리가 번지며 벽이 좌우로 밀렸다.
그 앞으로 드러나는 기다란 복도.
“바로 이곳이 진짜 제단의 중심부로 갈 수 있는 길일세.”
석벽으로 이루어진 복도는 오랜 세월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족장은 가는 와중에 계속해서 이런저런 말들을 했으나, 유의미하지는 않았다.
“오오. 바로 이곳이군.”
“나도 처음이야.”
“참으로 훌륭한 건물이지 않나? 우리의 선조들이 지었다네.”
대부분 이런 식의 감탄사였다. 그 복도의 끝에서 우리는 하나의 공동에 도달했다. 그 공동의 중심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이것일세!”
족장은 그것을 보며 감탄을 토해 냈다. 나는 마법진을 가만히 보았다. 마법에 문외한이기는 했으나, 드레어스산의 정상에서 본 것과 형태가 똑같아 보였다.
“혹시 드레어스산을 아십니까?”
“드레어스산? 그게 뭔가? 먹는 겐가?”
“아닙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무슨 마법진입니까?”
“회귀의 권능을 얻을 수 있는 마법진일세! 하나, 회귀의 권능은 이미 황제가 갖고 있으니 최초의 세계선으로 갈 수 있는 차원의 문이 열리겠지. 이제부터 이 마법진을 발동시킬 주문을 외울 걸세.”
회귀의 문을 닫을 수 있는 최초의 세계선.
황제의 회귀를 막기 위해서는 그 세계로 가야 했다.
“후우.”
족장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말했다.
“주문을 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 그랬지.”
나도 이제 어느덧 움파움파족의 건망증에는 적응이 되어 있었다.
“시간이 걸릴 걸세.”
“얼마나요?”
“흠. 하룻밤이면 될걸? 잠도 자지 않고 치성을 드려야 하네. 차원 길을 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예. 기다리도록 하죠.”
족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했다. 다행히 주문을 까먹지는 않은 듯했다. 그도 그럴 게, 캠프파이어를 할 때 불렀던 노래가 그 주문이었다.
“그럼 마을 사람들을 모두 불러오거라.”
고개를 끄덕인 부족원이 나가고 족장은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그들은 마법진을 중심으로 큰 원을 그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공동의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렇게 1시간, 2시간이 지나고.
계속해서 시간은 지나고 있었지만, 마법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불멸의 도시」 책에는 움파움파족이 주문을 외우는 시간이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불멸의 군대를 깨우는 데 할렌트는 무려 10년의 시간을 보냈다.
허락되지 않은 힘을 억지로 깨운 것이기에 그렇기도 했지만, 그들을 불러오는 차원의 문을 여는 데만 10년이 걸렸다는 의미.
이것이 고작 하루 만에 가능할는지.
노래는 서서히 멈춰 가고 있었다.
족장이 긴 숨을 내쉬자, 부족원들이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뭐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부족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밥 먹을 시간이다!”
“우와아아-!”
함성과 함께 밖으로 나가는 이들.
나는 못 미더운 눈빛으로 족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랑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하하. 우리가 다른 건 몰라도 밥때는 안 까먹는다네.”
그렇게 식사 후 다시 시작된 의식.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일지 않았다.
되는 거 맞아?
마법진에 반응이 오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아라아라 움! 아리아리 파!”
부족원들의 노랫소리에 맞게 빛을 머금기 시작하는 마법진.
신의 눈동자를 흡수했을 때처럼 마법진 위로 만자들이 떠오르더니 강렬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허공에 빛을 쏘아 대던 마법진이 천천히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따라 곧게 뻗어나가던 빛줄기가 소용돌이처럼 휘말려 갔다.
구구구구궁.
공동 전체가 황금색 빛무리로 뒤덮이고 있었다. 그 빛은 공동을 넘어 제단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스스스슷.
굴뚝 쪽을 가득 채웠던 불멸초가 크기를 줄여 간다. 빛 가루에 닿은 것들이 세월의 때가 벗겨지는 듯했다. 불멸초가 수축되며 하나의 씨앗이 되고, 금이 가 있던 굴뚝은 마치 새살이 솟아나듯 멀쩡해졌다. 그리고 나와 할렌트의 전투로 뭉개진 제단의 상단부 또한 자라나듯 솟아올랐다.
시간이 역행하고 있는 듯했다.
화아아악-!
그러다 일순 밝은 빛이 뿜어졌다.
그리고.
콰자자자자작!
머리 위에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굉음.
일전에 들은 적이 있는 소리였다.
“후. 이제 가 보세.”
나는 족장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앞으로 보이는 마을의 거리는 시간의 변화 없이 여전한 모습이었다. 오직 무너졌던 제단만이 과거의 위용을 되찾아 있었다.
까만 밤하늘.
제단의 상층부에서 휘황한 빛무리가 번진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제단의 상층부로 올랐다. 그 정상에는 예상대로 푸른 포털이 열려 있었다.
내가 이 너머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는 「불멸의 도시」를 읽었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포털의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