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제186화 불멸의 도시 (1)
적들이 떠난 자리는 황량했다.
마그네트는 반쯤 폐허가 되어 있었다.
반파된 건물들과 늘어진 시체들.
승리의 기쁨은 크고 강렬했으나, 일상을 회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전장이 마무리되고 늦은 밤.
나는 정원에 홀로 서 있었다.
휘영청 뜬 달이 작은 못에 담겨 일렁인다.
적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 이곳은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마치 전쟁이 없었다는 듯이.
“오래 기다렸어?”
루시안이었다.
“꽤.”
“나눌 이야기가 많다 보니 그렇게 됐다.”
루시안이 멋쩍게 웃었다.
그는 이제 왕이었다. 본인의 뜻을 전해야 할 이들이 많았다. 프렌치아의 뜻을 따르기로 한 변절자들과도 이야기를 나눴을 테고, 지금까지 함께 싸워 온 이들도 격려해 주었을 터였다.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는 뒤로 미뤄졌다.
아직 승리에 취해 정신을 놓을 시간은 아니었다. 가능성은 미약하지만 적들이 다시 돌아올지도 몰랐고, 처리하고 복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다.
이제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전쟁이 펼쳐질 터였다.
왕은 결코 한가한 자리가 아니다.
“앞으로 많이 바빠질 거 같다. 할 일이 너무 많아. 몸이 하나로는 부족할 지경이야. 주르하였나? 분신을 만들 수 있다는 그 이능이 갖고 싶군.”
루시안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투정을 부렸다. 우리는 과거 팔레이트 상단에서처럼 나란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그래도 좋다.”
“실없기는.”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지치지만, 나라를 위한 죽음이······ 국민들의 울음이 너무 아프지만, 그래도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
루시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참고 버티면 나아질 수 있으니까.”
“알아.”
“여전히 믿기지 않네. 너와 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마찬가지다.”
“진짜? 의외인데?”
루시안이 씩 웃었다.
“너라면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이 하늘이 믿기지 않는 건 루시안과는 다른 부분이었다.
나는 녀석과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는 사람이니까.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하지만, 곱씹을수록 기묘하다.
내가 어떻게 여기 있을 수 있는지.
루시안이 말했다.
“레오니랜서를 부활시키려고 해.”
“좋은 생각이야.”
프렌치아의 신수이자 왕궁을 대표하는 기사단의 이름.
흰사자, 레오니랜서.
지금은 나의 상징이기도 했다.
“네가 맡아 줬으면 하는데.”
“아니.”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내 자리는 없어.”
“무슨 뜻이야?”
우리는 독립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 그 이후에 관한 이야기는 깊이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엔, 독립은 먼 이야기였으니까.
“난 프렌치아가 안정되면 떠날 생각이야.”
“어디로.”
“어디든. 조용하고 한적한 곳으로.”
“나를 위해서?”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루시안이 염려하고 있는 바를 알았다.
하나의 국가에 두 개의 태양은 없다.
내 존재감은 왕인 루시안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녀석은 내가 일부러 자리를 비켜 준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너 때문이겠냐.”
“아닐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그냥 한번 물어봤다. 그럼 왜?”
“그냥. 평안하고 조용하게, 그렇게 살고 싶어서.”
“……잡지도 못하겠군.”
루시안이 아쉽다는 듯 입술을 꾹 물었다.
“언제쯤 내려갈 생각인데? 아직 부려 먹을 일이 산더미라고.”
“걱정 마. 내가 필요치 않을 때까지는 있어 줄 거니까.”
내 마지막 업보다.
프렌치아만 홀로 서게 된다면 나는 전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장난스레 말을 받던 루시안은 이내 진지한 투로 입을 열었다.
“네가 없어도 무탈할 수 있는 나라를 최대한 빨리 만들어 볼게.”
“그래야지.”
“고맙다. 너무 신세만 지는 거 같아서 미안하고.”
“너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니 그럴 필요 없다.”
정확히는 내 스스로 짊어진 짐이다.
전생이지만 왕세자였던 자로서 짊어져야 할 책임이기도 했고.
“그래. 우리는 각자의 이상을 좇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지. 그래도 덕분에 얻은 이 토대 위에 제대로 쌓아 올려 볼게.”
루시안은 내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두드렸다.
“앞으로 많이 바빠질 거야.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처단해야 할 자들도, 처리해야 할 일들도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3년이란 시간이 있었고, 순차적으로 진행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루시안과 앞으로의 이야기를 나눈 후 거처로 향했다.
“제네스 님-!”
가는 길목에는 알렌과 이리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뭔 짓거리를 하려는 건지.
“뭐 하냐.”
“몰래 술 한잔해야지요.”
알렌이 도둑놈처럼 속삭였다.
적들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는 상황.
병사들에게 술은 금지되어 있었다.
알렌이 말을 이었다.
“네더만 씨가 술을 구해 놨답니다.”
하여간 그놈이 그렇지.
네더만이 벌인 수작이 빤했다.
“앞장서.”
나나 네더만은 주독쯤은 간단히 없앨 수 있으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막사로 가니, 네더만이 값비싸 보이는 술병을 앞에 두고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간이 테이블에는 안주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녀석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서들 오게. 자네들을 기다리느라 목이 빠질 뻔했네. 나 자신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고.”
녀석은 이미 몸이 안달 난 상태였다.
같이 술병을 따기 위해 참고 있었던 듯하다.
“이렇게 전장에서 승리하고 모이니 감회가 새로워. 이 얼마 만에 함께 마시는 술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눈물이 다 날 것 같습니다.”
알렌이 동조하며 잔을 들었다.
“모두 살아 있음에 축배를 드시죠!”
이리엘이 호방하게 말했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전쟁을 치르느라 이렇게 모일 시간도 없었다.
그 치열한 전장에서 누구도 죽지 않았다는 건 축배를 들 만한 일이었다.
“저하와 이야기하고 온 겐가.”
“그래.”
“앞으로 바빠지겠고만. 얼굴 보기 힘들겠어.”
“저는 언제나 제네스 님과 함께할 겁니다. 어디를 가시든지요!”
알렌이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자, 이리엘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울먹였다.
“나도 함께 가고 싶은데…….”
이리엘은 이제 일국의 공주였다. 본래 왕비가 될 사람이기도 했지만. 둘 다 어울리지 않기로는 매한가지였다. 여하튼 그런 이유로 그녀는 궁에 머물러야 했다. 나는 이들의 얼굴을 보자 불현듯 잠시 한쪽에 묻어 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불멸의 도시 해석본 안 받았지?”
“아, 그렇군. 완전히 까먹고 있었구만. 갑자기 그것은 왜?”
“검은 숲에서 녀석들이 사용하는 문자를 봤다.”
“응? 검은 숲에서?”
마법진 위로 떠올라 있던 익숙한 문자들.
분명, 룬어가 아닌 움파움파족의 문자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불멸의 도시」 책의 내용이 불현듯 궁금해졌다. 물론 그 책이 이것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 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사람을 보내고 싶은데.”
“뭐, 카드론에게 말하면 될 거야. 내 전해 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직접 움직일 필요까지는 없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검은 숲은 어땠나. 궁금하군.”
“맞습니다! 저도 궁금해 미치는 줄 알았다구요! 제네스 님이 전장이 끝나면 이야기해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알렌은 엉덩이까지 들썩이며 가만히 있지 못했다.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있으니 환장할 수밖에.
“온통 검더라.”
길게 이야기하는 건 그다지 내 취향이 아니었다. 별다른 일이 있지도 않았고, 나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갔을 뿐이었으니까.
“……그게 뭡니까. 자세히 좀 이야기해 주세요.”
알렌이 칭얼거리자, 나는 슬며시 주먹을 쥐었다.
* * *
“후아.”
알렌은 허리를 펴며 이마에 맺힌 구슬땀을 닦았다.
햇볕이 부딪치는 거리.
다들 검이 아닌 공구를 쥐고 무너진 건물들을 보수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아니기에 어설프기는 했으나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빠르게 건물들을 보수해야 했다.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에 피난을 떠났던 이들도 줄줄이 들어오고 있었다.
한동안 삭막했던 거리가 시끄러운 생기를 되찾아 갔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것 좀 드시면서 하세요.”
여전히 현장은 폐허와 다름없었으나 사람들의 얼굴에는 온기가 머물렀다. 절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 이들 앞에 놓여 있었다.
마그네트에 돌아온 이들은 멀리 보이는 희망을 보았다.
앞으로는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
그것은 그 무엇보다 사람을 일어서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프렌치아는 여러 손이 모여 빠르게 재건되어 갔다.
“크. 좋다.”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은 알렌은 열의에 찬 도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마 전의 전쟁이 마치 오래전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도시는 평온했다.
평생 이렇게만 평안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국과의 전쟁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제국의 군대가 다시 결집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언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낼지 몰랐다.
적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또한 여전히 프렌치아에는 빌어먹을 변절자 새끼들이 많았다.
이번 전쟁으로 합류한 이들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
변절자들뿐만 아니라, 제국의 힘에 기대어 패악을 부린 이들을 모조리 단죄해야 했다.
그런 놈들을 심판하여 뿌리째 뽑아내는 것.
그것이 프렌치아가 다시 태어나기 전에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일이었다.
“알렌?”
알렌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
반가운 얼굴이 앞에 있었다. 그는 굽이치는 해협의 포르센 지부에 있던 자였다. 알렌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마그네트까지는 어쩐 일이세요?”
“제네스 님께서 부탁한 물건이 있어서요. 하하. 잘 지내셨습니까.”
알렌은 그제야 그가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 깨달았다.
바보같이 깜박하고 있었다.
“아, 그거. 제가 직접 건네드릴게요!”
알렌은 그에게 하나의 꾸러미를 건네받고 걸음을 옮겼다.
제네스가 부탁했던 「불멸의 도시」의 해석본이었다.
알렌은 신이 나 제네스를 향해 달려갔다.
그 시각 제네스는.
“끄아아악!”
“제발 그만!”
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곧 레오니랜서 기사단에 속하게 될 이들이었다.
지금은 고작 열세 명에 불과한 인원.
젊은 나이인 이들 중 재능이 출중한 이들을 추려 뽑은 자들이었다.
레오니랜서를 맡을 생각은 없었으나, 궁에 있는 동안 훈련을 봐 줄 수는 있었다.
“고작 그 정도로 엄살이냐. 일어나.”
제네스는 그 성격만큼이나 가차 없는 훈련을 이어 가고 있었다. 다들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체력을 단련했다.
“그 정도 근성으로 용케도 살아남았군.”
제네스의 독설에 다들 이를 악물고 버텼다.
‘대체 우리가 왜 이 녀석에게 훈련을 받아야 하는 건데!’
눈앞에서 독설을 뱉는 또래의 남자가 흰 사자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이들이었다.
“제네스 님!”
불만이 가득한 훈련장으로 알렌이 날아든 건 그때였다.
“너도 훈련받으려고 온 거냐?”
“아니요! 그럴 리가요!”
알렌이 곧장 학을 떼며 손사래를 쳤다.
그 또한 ‘작렬하는 태양’의 본부에서 제네스에게 제대로 굴려졌던 전적이 있었다.
다시는 그에게 훈련받고 싶지 않았다.
알렌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고, 해석본이 왔어요!”
제네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해석본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책장을 펼쳤다.
책장이 넘어갈수록 제네스의 표정은 깊게 가라앉았다. 「불멸의 도시」에는 쉬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