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제185화 해방대전 (2)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제국군은 끊이지 않고 병력을 성벽에 쏟아부었다.
피해가 막심한데도 밤낮없이 성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병력의 머릿수를 이용한 물량 공세.
성벽에 기대어 싸우고 있다고는 하지만, 큰 병력 차이에 프렌치아 왕국군은 빠르게 지쳐 갈 수밖에 없었다.
“끝이 없구만. 이 빌어먹을 놈들.”
“대체 언제 끝나는 건지.”
흰 사자의 등장으로 드리웠던 승리의 확신도 점차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벌써 전쟁이 3주째 이어지고 있었으니, 끝없이 계속되는 소모전에 병사들의 독기 또한 옅어져만 갔다.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어요. 이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이제 식량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전략 회의실.
한자리에 모인 중진들은 하나같이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 왔다.
여러 대비를 해 두었으나, 성안에는 피난을 떠나지 못한 국민들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다.
비축해 둔 식량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배급을 반으로 줄였음에도 그랬다.
애초에 장기전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적들의 공세가 생각보다 거세고 끈질겼다.
전장이 오래 지속된 만큼 피로도가 쌓여 있었고, 진영은 전반적으로 삐걱거리고 있었다.
몇 배에 이르는 병력을 계속해서 막아 냈으니 당연한 일. 피로가 겨울옷처럼 겹겹이 쌓이고 있었다.
이제 하루의 승전 또한 커다란 의미를 갖지 못했다.
“이대로 가면 병력이 모두 전멸할 겁니다.”
부상병들을 제외하고 병사들의 수는 1만 정도였다. 제네스를 기다리며 최대한 병력을 아껴 왔음에도 그랬다. 끔찍하게 많은 이들이 성벽 위에서 죽어 나갔다. 마그네트에는 아군과 적군의 시체가 탑처럼 쌓여 가고 있었다.
“적들의 노림수는 아무래도 병력을 소진시키려는 속셈인 것이겠죠.”
“흰 사자가 있어도 머릿수를 당해 낼 수는 없습니다.”
흰 사자가 홀로 성문에서 버텨 주고 있다지만, 날이 갈수록 사망자가 늘어갔다.
병력의 수가 빠르게 깎여 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성벽을 지킬 병력이 모조리 갈려 나갈 판이었다.
“애초에 그들에게도 뒤가 없었습니다.”
레이크가 말했다.
녹색의 오로라가 하늘에 깔렸음에도 제국은 소해를 건넜다.
아르에리아 조약을 무시하고 이곳에 도달한 만큼, 확실한 결과물 없이는 물러서지 않을 터였다.
완전히 패퇴하여 물러나든가 아니면 아군의 씨를 말리고 마그네트를 점령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벼랑 끝에 선 것은 이제 어쩌면 제국군이었다.
그들의 또한 이 전장에 절박해진 것이다.
“그들의 이런 대응은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습니다. 마그네트를 수복하지 않는 한 그들은 퇴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이대로라면 전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병사들이 남아나질 않을 겁니다.”
굽이치는 해협 소속의 간부였던 프렝의 말이었다. 하나 그 혼자만의 염려가 아니었다. 모두 레이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적들의 병력은 많습니다. 파악되는 바로 8만은 넘어 보이더군요.”
단순한 피해 정도를 따지면 제국의 피해가 훨씬 컸다. 하나, 아직도 그들에게는 무수히 많은 병력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물자도 모자라 보이지 않았다. 프렌치아 전역에서 그들에게 군수품을 지원하고 있으니, 그들에게 이곳은 안방과 크게 다름이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이 프렌치아 국민의 피와 땀이었음에도 그랬다.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레이크는 좌중을 훑으며 말에 무게를 실었다.
“그들을 몰아내는 것. 이제 최후의 전장을 펼칠 때가 왔습니다.”
“……지금 병력으로는 성벽을 지키기도 벅차네. 어찌 저들을 격퇴한단 말인가.”
“지금 병력으로는 그렇죠.”
다들 레이크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곧 지원군이 도착할 겁니다.”
* * *
기다랗게 깔린 마그네트의 성벽.
중간중간 허물어진 곳이 보였으나, 그 상공에서 프렌치아의 국기가 굳건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온 것 같고만.”
카드론은 그 광경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창공에 걸린 국기가 자신들의 승리를 전하고 있었다.
카드론이 뒤로 돌았다.
그의 시야에 평야 위로 카펫처럼 깔린 5만의 병력이 담긴다.
“그동안 우리는 충절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프렌치아는 감사하게도 그 죄를 사면받을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의 앞에는 과거, 프렌치아를 변절했던 가문의 가주들이 늘어서 있었다.
새로운 프렌치아의 왕, 루시안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을 기회를 부여받은 자들.
모두 세심히 엄선한 자들이었다.
제국의 통제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모두 프렌치아를 배신한 것만은 아니었다.
패망한 왕국을 위해 멸문을 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모든 이들을 벌할 수는 없었다.
이미 침몰한 배에서 살기 위해 뛰어내린 이들을 어찌 비난만 할 수 있을까.
그들 또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나, 면죄부를 준 가장 중요한 요건은 국민들에게 패악을 부리지 않은 자들.
제국의 치세 아래 있었으나 국민을 약탈하지 않은, 테이난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가문들이었다.
개중에는 독립군을 은밀히 지원한 이들 또한 많았다. 그리고 이들은 새로운 프렌치아 왕가의 부름에 응해 이 자리에 왔다.
그렇게 모인 병사들의 수가 5만이었다.
“프렌치아를 위하여-!”
“위하여-!”
하늘로 무기를 치켜들며 소리치는 이들.
카드론을 위시한 프렌치아의 지원군이 성문으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마그네트의 성문은 휑하니 열려 있었다.
그들에게 성문을 넘어오는 건 지원 물자뿐이었다.
프렌치아의 지원군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탓이다.
그리고 그 일대를 제네스가 휘젓고 있었다.
흰 사자의 등장으로 정신없던 제국군은 적들이 밀려들어 오는데도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저, 적이다-!”
그리고 그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성문을 넘은 병력의 파도가 제국의 군대를 집어삼키며 들이치고 있었다.
콰과과과과광!
전장의 굉음이 아스라이 흩어진다.
루시안은 국기가 걸린 아르센 첨탑에서 저 멀리 도착한 지원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존재를 확인한 왕국군의 사기는 다시금 세차게 타올랐다.
이 전장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누구나 쉬이 알 수 있을 터였다.
마그네트를 수복한 이후 곧바로 준비한 일은, 면죄 가능한 변절자들을 선별하고 그들에게 프렌치아의 왕가를 따르라 명하는 일이었다.
녹색의 오로라가 번지자마자 국새를 찍은 서신을 곳곳으로 날렸다.
평소였다면 이렇게 많은 가문이 부름에 응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나, 녹색의 오로라가 번졌다.
제국이 출전한다고 하더라도 추가 병력을 파병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쉬이 예측할 수 있는 사안.
그들은 전쟁 이후에 남을 흰 사자의 검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함께 수성했다면 좋았을 테지만, 단지 프렌치아에 대한 부채감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아니었다.
가문의 명운이 달린 결정이었고, 그들은 결국 프렌치아의 가능성을 믿었기에 이 자리에 왔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이제 바로 눈앞에 현실로 다가와 있었다.
제국의 통치를 끊어 내고 다시금 자주국이 될 수 있는 기회.
오늘 이 지겨운 교전도 끝이 날 것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프렌치아는 3년이란 시간을 가지게 된다.
“우와아아-!”
저편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제국군의 지휘부는 낭패에 젖었다.
사령관, 아레안은 수만의 적군이 마그네트로 쏟아지고 있다는 보고에 얼굴을 사납게 구겼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갑자기 프렌치아 군대라니!”
“아무래도 제국군의 지원이 아니었던 듯합니다…….”
몇만에 병력이 마그네트로 오고 있다는 보고는 들은 바 있었다.
모두 총독부 휘하에 속해 있던 가문들.
제국에 잘 보이기 위해 충정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이 감히 제국을 배반하고 패망한 프렌치아에 붙을 거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겠는가.
“이런 빌어먹을!”
아레안은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전혀 상상치도 못한 변수였다.
“천하디천한 프렌치 새끼들이 주제도 모르고 어찌 감히 제국에 칼을 들이민단 말이냐!”
역시 천한 검은 머리 짐승은 가까이하면 안 되는 법이었다. 제 까짓것들이 어찌 제국이 베푼 은혜를 배신하고 주인에게 이빨을 들이민단 말인가!
가슴에서 천불이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 내라! 마그네트를 수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두 끝장이다!”
“예! 알겠습니다!”
“수비하는 병력을 뺀 나머지는 모두 성벽에 몰아넣거라.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함락해야 한다! 성을 빼앗지 못하면 답이 없음이야!”
병력의 수는 아직 충분했으나 모두 긴 전투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에 반해 적들은 새싹처럼 파릇파릇했다.
적의 기세는 새로운 바람을 품고 있었다.
늙은 개는 젊은 개를 당해 낼 수 없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지는 건 자신들이었다.
어떻게든 오늘 마무리를 해야 했다.
* * *
콰과과과광-!
사방에서 오러의 폭발이 있었다.
가정집과 건물이 허물어지며 마그네트는 폐허로 변해 가고 있었다.
황량해진 도시 곳곳에서 병력이 맞부딪쳤다.
나는 밀어닥치는 지원군의 가장 앞에 있었다.
맹렬한 검기가 적의 전위를 사정없이 짓뭉개 버린다.
지금까지 적들의 지휘관급 병력을 주로 베어 왔다.
때문에 병력의 수가 많아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간부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게다가 계속된 전장으로 제국군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
그 와중에 맞는 반격은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반면, 아군의 검에서는 열기와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세찬 물결이 힘 빠진 적들을 그대로 삼키며 쓸고 지나갔다.
적들은 그것에 사분오열되며 쪼개져 무너졌다.
후방이 그리 위태로우니 공성전 또한 제대로 이뤄질 리 없었다.
병력을 긁어모아 밀어붙이고 있음에도 그랬다.
성벽에서 도시의 전황이 잘 내려다보였다.
수성하고 있는 아군들에게도 그 흐름이 보일 터였다. 아군에게 승리는 눈앞이었다.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적의 후방을 교란하며 지원군의 물꼬를 튼 나는 다시 성문 앞에 서서 적들의 진군을 막았다.
하늘은 까맣게 물들었다가 서서히 밝아져 갔다.
동이 터 오르며 짙은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그 시간의 흐름을 따라 전쟁의 결과 또한 선명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막아라-!”
“무조건 버텨-!”
하룻밤이 지났음에도 프렌치아 병사들은 쉰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다들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버텼다.
반면에 적들의 공세는 계속해서 약해져만 갔다.
카드론이 이끌고 온 군대가 점차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한번 꺾인 적의 기세는 올라오지 못하고, 적들의 검은 갈수록 무뎌졌다.
그러다 결국, 그들은 걸음을 물리기 시작했다.
“퇴각-!”
“퇴각하라-!”
점차로 밀려나던 이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마그네트의 외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적의 퇴각이었고.
그토록 바라던 프렌치아의 승리였다.
압도적인 병력 차를 무려 3주간이나 버텨 내 얻은 결과였다.
하나 그들이 얻은 것은 승리뿐만이 아니었다.
제국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날 시간과 기회를 프렌치아는 이 전투로 손에 쥐었다.
훗날 해방대전이라 불리게 될 이 전투는, 10년 전 제국에 의해 함락되었던 것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마무리가 되고 있었다.
“우와아아아-!”
병사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고함을 질러 댔다.
그 제국이 물러가고 있었다.
마그네트의 성벽 바깥으로 쫓기듯 떠나는 그들의 다급한 뒷모습.
지금껏 쌓인 피로가 한순간에 증발하며 짙은 고양감이 전신을 채운다.
수많은 이들의 감정이 하나로 타올랐다.
제국군이 물러가며 드러난 피 묻은 전장 위로 여명의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