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제183화 도착 (2)
‘저자가 흰 사자…….’
오호른을 비롯한 기사들은 무너진 성문을 대신하여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흰 사자 갈기가 흐르는 바람에 갈대처럼 일렁인다.
고작 하나의 존재가 전장에 내려섰을 뿐인데 그 위압감이 성문보다 단단하게 다가왔다.
휑하니 뚫린 성문을 막아서기에는 턱없이 작은 인간이었음에도 그랬다.
저벅저벅.
그가 앞으로 걸어 나온다.
그와 동시에 눈앞으로 새로운 성벽이 세워지는 듯했다.
왕성의 것보다 더욱 단단하고 높은 벽.
그것이 드높이 자라난다.
그 존재감이 눈앞에서 아득해졌다.
으득.
오호른은 이를 악물었다. 검을 단단히 잡으며 그에 맞서 기세를 피워 올렸다. 휘하 기사들 모두 그를 따라 기세를 첨예하게 했다.
“죽은 줄 알았더니 다행이구나. 네놈의 목을 직접 벨 수 있음이야.”
오호른이 싸늘히 웃었다.
과연 명성에 걸맞은 기세를 가졌다지만, 그의 존재가 기꺼웠다.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의 명예를 바로 세울 수 있기에.
흰 사자가 말했다.
“알센도르가에서 왔나.”
갑옷에 그려진 검은 방패 문장도 그렇거니와 그들이 피워 내는 기세가 바르안과 닮아 있었다.
못 알아볼 수 없었다.
“그래. 명예를 모르는 네놈의 목을 베기 위해 왔느니라.”
“명예라. 바르안의 명예를 누가 더럽혔는지 모른다면 그 또한 멍청이지.”
“웃기지 말아라.”
“구태여 변명하지는 않으마.”
제네스가 검을 겨눴다.
“직접 맞대 보면 알게 될 테니.”
칼끝이 향하자 강맹한 기운이 바람처럼 훅 불어닥쳤다.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직접적이고 선명한 기파.
살갗이 갈라지는 감각과 함께 세계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오호른은 그것에 맞서 소리쳤다.
“모두 검을 단단히 쥐어라! 알센도르의 검을 보여 주자-!”
그의 호령을 따라 일제히 산개하여 제네스를 포위해 가는 글리머 기사단.
그들이 탄탄한 전열을 구축하려는 사이, 제네스는 곧장 앞으로 쇄도했다.
평소처럼 적의 전력을 기다려 줄 여유는 없었다.
땅이 울리는 동시에 그의 신형이 연기처럼 흩어진다. 적의 전위에서 불쑥 솟아난 그는 검을 그어 가고 있었다.
콰과과과광!
흩뿌려진 섬광의 궤적을 따라 흙먼지가 자욱이 일었다. 일대를 가르고 지나치는 검격에, 피떡이 된 자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하압-!”
동료들의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반격해 오는 기사들.
바늘처럼 뾰족한 섬광이 곳곳에서 쏘아진다.
과연 전장에서 검을 벼려 온 기사들의 검이었다. 검세 하나하나가 교묘하고 쾌속하다.
제네스에게 닿기에는 부족하나, 그들의 검에는 그간 쌓아 올린 검력이 차곡차곡 포개져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인 건 그때였다.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지독한 한기가 칼끝에서 불어왔다.
천령신공 검법편.
한빙의 장(章) 제3장 낙화유검(落華流劍).
창백함을 품은 검기가 꽃잎처럼 휘날린다. 섬뜩한 절삭음이 곳곳에서 일며 붉은 핏물이 솟구쳐 올랐다. 극지방의 눈보라처럼 사납게 휘날리는 검기가 그들의 전열을 단숨에 반이나 집어삼켜 나갔다.
“끄아압!”
그 사나운 눈보라 속에서도 짓쳐들어오는 빛줄기가 있었다.
동료의 죽음을 방패 삼아 쏘아지는 찬란한 섬광.
바르안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첨예하게 버려진 쾌검이었다.
가벼이 볼 자들은 아니었다.
제네스는 검을 단단히 쥐었다.
동시에 그의 오른팔이 흐릿해진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 뒤를 따르는 무수한 섬광.
바늘처럼 뾰족한 빛줄기들이 제네스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촘촘히 공간을 꿰뚫는 검기의 형태가 꼭 밤송이 같다.
푸확-!
올곧게 뻗은 가시들이 기사들의 몸뚱이를 사정없이 관통한다.
알센도르 가문이 자랑하던 글리머 기사단이.
제국의 특임 기사단에 비견되던 그 기사단이, 바람 앞의 낙엽처럼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나부끼고 있었다.
“…….”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력.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잠깐의 고요가 인다.
기백에 이르던 기사단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오호른을 포함해 살아남은 이들은 그에게 흔들리는 칼끝을 겨누고 있었다.
자신들이 이렇게 허물어지는 것이 믿을 수 없는 까닭이다.
“저 우라질 자식.”
네더만은 그런 제네스를 보며 기분 좋은 분통을 터트렸다.
그가 무지막지하게 강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목숨을 걸 각오까지 했던 적을 저리 손쉽게 쓸어버리는 걸 보고 있자니 힘이 다 빠진다.
꼭 한 줌의 먼지가 된 기분이랄까.
전장에서 자신의 존재감이 증발하듯 사라져 버린 듯하다.
하지만 네더만은 활짝 웃고 있었다.
리포드는 그 옆에서 미친 듯이 웃어 댔다.
“크하하! 미쳐 버리겠구만!”
광기에 젖은 웃음.
지난 일주일간 피똥을 싸며 막아 온 적들이다.
그것도 글리머 기사단이 후방에 물러나 있어 가능했다. 애초부터 저들이 전면에 나섰다면 전장은 진즉에 끝났을 거였다.
그런 이들이 전장의 후방으로 빠져 있던 것 또한 흰 사자 때문이었다.
그를 상대하기 위해 전력을 비축했던 것일 테지.
근데 그럼 뭐 해.
이렇게 단번에 쓸려 버릴 걸.
아군에게는 정말이지 웃음밖에 안 나오는 무력이었다.
철썩!
옆에서 찰진 소리가 울렸다. 드라칸이 제 뺨을 찰지게 후려치는 소리였다.
그는 두꺼운 양손으로 본인의 양 볼을 철썩철썩 두드렸다.
얼얼한 볼의 감각의 느끼며 드라칸은 제네스를 바라보았다. 네더만과 리포드와 달리 드라칸은 그의 신위를 눈앞에서 본 것이 처음이었다.
물론 겪어 본 적은 있다.
대련을 통해 도움도 받았으니.
하나, 그때와는 다르다.
자신에게 보여 준 건 고작 티끌에 지나지 않았다.
첨예하게 기세를 키운 제국의 기사단을 단숨에 찢어발기는 저 압도적인 무력은, 그야말로 온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드라칸은 가만히 제 심장 소리를 들었다.
미동 없이 서 있음에도 쿵! 쿵! 세차게 울렸다.
좀처럼 유난 떨지 않는 강철과 같은 심장이 활어처럼 펄떡거리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그랜드 소드 마스터…….
하긴 그의 무력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가 바로 대륙 제일검이다.
콰아아앙-!
폭발음과 함께 번쩍인 섬광이 전장을 내달렸다.
그 선상에 놓여 있던 적장의 목이 치솟아 올랐다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 궤적을 따라 핏물이 휘돌았다.
이제 오호른 또한 알았을 테지.
흰 사자가 무한의 속검과의 결전에서 독을 쓰지 않았다는 걸.
그리고 흰 사자가 독을 썼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제국군의 상황도 이해했을 거다.
저 검을 직접 보았음에도.
그것에 목이 베였음에도.
그럼에도 모른다고 하면 그냥 X신인 거고.
* * *
거친 숨이 입가에서 흘렀다.
짧은 전투였음에도 그랬다.
먼 길을 달려온 상태에서 폭발적으로 힘을 썼다. 최대한 체력을 비축하기는 했으나 쌓인 피로를 해소할 수는 없었다. 인간의 격을 아득히 넘어선 신체에도 한계가 존재하기는 한다.
잠시 고요해진 전장을 깨우는 박수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글리머 기사단이 무너지고 적막에 잠긴 전장으로 한 사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과연 대단하시군. 역천의 대가다워.”
역천의 대가?
나를 지칭하는 것인가.
정황상 그랬다.
“저스티스 소속의 베베토다. 여기에 온 걸 보면 동료들도 모두 이 꼴이 됐나 보군.”
그는 씩 웃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몸뚱이를 발로 툭 건드렸다. 아군임에도 존중 따위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명성대로 강하긴 하군. 지금까지 기다린 시간이 아깝지가 않아. 하나 어쩌지? 나는 네가 지금껏 만나온 자들이랑 차원이 다른데.”
입매를 비트는 녀석의 주위로 시꺼먼 기운이 일었다.
불꽃처럼 일렁이는 퀴퀴한 기운.
마기.
검은 숲에 다녀왔기에 저것을 잘 알았다. 그곳에 꽤 오래 있었더니 익숙한 기분마저 들 정도다.
하나, 그것과는 또 다르다.
녀석의 마기는 보다 공격적인 기운을 품고 있었다. 뿜어져 나오는 기파가 체내의 내력을 뒤흔들 정도로.
상성에 의한 반응이었다.
녀석의 마기는 상대의 내력을 진탕시키는 효과가 있는 듯했다. 아마 그것이 녀석이 가진 자신감의 원천이겠지.
“그럼 실력 좀 볼까.”
베베토가 양팔을 활짝 펴자, 불꽃처럼 일렁이던 마기가 날개처럼 활짝 펴지며 괴수의 손톱과 같은 형태를 조형했다.
쿵-!
묵직한 걸음과 함께 녀석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간격을 지운다. 짐승의 발톱 같은 것이 일대를 할퀴어 오고 있었다.
콰자자자자작!
굉음과 함께 깊은 홈을 만들어 내며 파이는 바닥.
그 사이로 조각난 시체 조각과 핏물이 고여 든다.
쿠와앙!
공격을 피한 내게 다시금 휘둘러지는 손끝.
괴수의 손을 가지고 행하는 조법과 같았다.
하나, 오직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패도의 힘.
콰아앙!
마기의 손톱과 칼날이 맞닿으며 폭발음이 울렸다. 하나의 팔을 튕겨 내고 측면에서 휘어 들어오는 것을 검으로 내려찍어 바닥에 처박았다.
콰앙-!
그 충격으로 일어나는 토사.
흙더미를 비집으며 검은 손톱이 다시금 날아든다.
넓은 반경을 사정없이 할퀴며 몰아붙이는 녀석의 공격은 제법 날카로웠다.
단순한 궤적임에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속도와 충돌할 때마다 내부를 진탕시키는 마기는, 안 그래도 체력이 떨어진 내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이자가 이곳에 온 것이겠지.
“흠.”
나도 모르게 짧은 신음을 흘렸다.
쉴 틈 없는 연계가 이어지고 있었다. 녀석은 내 상태를 알고 있는지 전력을 다해 밀어붙여 왔다.
일대의 지형이 무너지고 갈라지며, 전장이 확장되어 갔다. 나는 최대한 성벽 멀리로 녀석을 끌어내어 아군의 피해가 없게 했다.
덕분에 더 버거운 감이 있었다.
콰앙-!
녀석의 손아귀를 튕겨 내도 다시 따라붙는 속도가 쾌속하다. 계속해서 떨쳐 내도 바짝 따라붙으며 손을 질러 온다. 그 후폭풍은 주변의 제국군을 쓸어버릴 정도로 강맹했다.
아군을 가리지 않는 저돌성.
거칠게 날뛰는 내력을 가라앉힐 조금의 틈조차 없었다.
“고작 이 정도냐!”
베베토가 조소 어린 눈빛을 보내온다.
본인이 우위에 있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우월감.
당장에 목을 베어 버리고 싶을 만큼 괘씸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평소답지 않게 수세에 몰린 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녀석이 저리 기고만장한 것이지.
쾅! 쾅! 쾅! 쾅!
적의 손아귀를 요리조리 피했다.
녀석의 손끝이 바닥에 커다란 구멍을 숭숭 뚫었다. 나는 아까부터 별다른 반격을 하지 않고 회피에 집중하고 있었다.
“도망치는 것이 쥐새끼와 다르지 않구나! 크하하!”
콰아앙!
나는 녀석의 공격을 강하게 떨쳐 냈다.
그 반동으로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내력이 고삐 풀린 말처럼 날뛰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내력을 쥐어짠 상태라 기혈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당연했다.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밤잠을 아껴 가며 쉬지 않고 달렸다. 체력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지치지 않는 게 이상했다.
환골탈태한 육체라도 분명 지친다.
대해와 같은 내력도 분명히 마른다.
아무리 기혈이 깨끗하고 대로처럼 넓어도 과하게 쓰면 상한다.
현경에 이르렀으나, 나는 아직 인간이었다.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적의 방심을 유도해 내는 수밖에.
내 시각이 적의 오만한 빈틈을 발견하는 순간, 발끝에서 터진 폭발이 몸을 앞으로 밀어냈다.
쾅!
나는 그 힘을 추진력 삼아 쏘아졌다. 적의 검은 마기를 꿰뚫고 나아갔다. 녀석의 손톱은 모두 내 그림자만을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사방에서 진동하는 마기에 울혈이 울컥 차올랐으나 억지로 눌렀다.
지금은 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아니었다.
한순간에 검력을 폭발시킨다.
나는 한 줄기 뇌전처럼 공간을 갈랐다.
놈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린다.
대응하기 위해 몸을 움찔거리지만, 내 검은 이미 적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적의 빈틈을 꿰뚫는 하나의 빛살.
한순간에 폭발하며 쏘아지는 섬광.
그것이 앞을 막아 오는 마기를 모조리 갈라 버리며 그 끝에서 녀석의 목을 치고 지나갔다.
촤-악!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뜬 눈이, 분리된 머리통과 함께 휘돌았다. 핏물이 그 궤적을 따라 휘돌았다.
단 한 번의 검격으로 그리되었다.
지금의 나는 위태로웠고, 적은 까다로웠음에도 그랬다.
그럼에도 나는 적의 목을 베었다.
아니, 이보다 더 곤죽이 된 상태였어도 녀석의 목을 벨 수 있었을 거다.
그것에 많은 이유는 필요치 않았다.
그것이 격의 차이고,
나는 천하제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