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제181화 버티면 이긴다 (4)
성문이 날아갔다.
“돌격하라-!”
휑하니 뚫린 성문으로 적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성문을 막아-!”
아군의 다급한 외침과 적의 함성이 하나로 뒤섞이며 두 개의 군대가 하나의 전선을 형성해 갔다.
두 개의 물길이 한 곳에서 만나 소용돌이치는 듯했다.
“빌어먹을!”
네더만이 얼굴을 사납게 구겼다.
성문이 터져나간 북문은 그가 맡고 있었다. 성벽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그는 다급히 내려와 적에 맞섰다.
정제된 오러가 순식간에 적의 목을 가른다.
하나, 적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그에 따라 전선이 빠르게 밀렸다. 무너진 둑에서 터져 나오는 물길을 손으로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버텨라-!”
“물러서면 안 돼!”
“적을 막아라-!”
곳곳에서 지휘관들이 목에 굵은 핏대를 세웠다.
“물러서지 마라-!”
네더만 또한 피를 뒤집어쓴 채 적을 베어 내며 계속해서 소리쳤다. 벌써부터 성문이 뚫리면 끝장이었다.
적의 병력 규모는 아군의 5배.
성문에 기대어 싸우지 않으면 앞뒤 잴 것 없이 필패다.
‘이대로는 무리야.’
전장을 휘젓던 네더만은 고개를 들어 뚫린 성문을 보았다. 적들이 계속해서 밀려오고 있었다.
베고 베어도 끝이 없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체 어떤 놈이지?’
공성추로 뚫어낸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제네스처럼 성문을 작살냈다. 상당한 실력자가 적진에 있는 게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어차피 방법은 없다.”
네더만은 걸음을 뒤로 빼어 전장에서 이탈했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타고 성벽 위로 올랐다.
“내가 인간 성문이 되는 수밖에.”
발아래, 물밀듯 밀려오는 제국군들의 머리통이 보였다.
급류처럼 밀어닥치는 이들.
“하압-!”
네더만은 그 위로 홀로 뛰어내렸다.
콰과과광-!
녹색의 오러가 적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며 폭발한다.
붉은 핏물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잠시나마 이어지던 병력의 흐름이 뚝 끊어졌다. 네더만이 그 앞을 막고 있었다.
“자, 지나갈 테면 지나가 보라고. 통행료가 좀 비쌀 테지만.”
“쳐라-!”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다시 밀려오는 적들.
“비싸대도.”
이를 악문 네더만이 전력을 다해 검을 뿌렸다. 바람을 탄 쾌검이 사위를 점하며 생을 갈취한다.
번쩍이는 섬광이 여럿의 생을 오차 없이 관통했다.
그가 분전하자, 안쪽으로 밀려오는 물살의 흐름이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했다.
네더만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검을 그었다.
바람처럼 흩어지는 그의 신형 뒤로는 흐릿한 잔영만이 남았다.
그는 남들보다 몇 배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속하며 공간을 가르는 참격들.
어찌나 빠르게 밀어붙이는지, 성문을 넘어오던 물살이 끊어지다 못해 역류하고 있었다.
그렇게 압도적인 속도로 움직이고 있음에도 그의 검은 일말의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
‘슬슬 한계인데…….’
그러나 그만큼 체력의 저하는 빠르게 다가왔다.
홀로 널찍한 성문을 막고 있었다.
제네스 같은 괴물이 아니고서야 오래 버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헉…… 헉…….”
이렇게 전력을 폭발하듯 뿜어낸 게 얼마 만인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속도에 온몸의 뼈마디가 욱신거릴 지경이었고, 폐가 터질 듯 부풀었다.
“대체 성문 왔습니다!”
그때 뒤편에서 반가운 고성이 들려왔다. 알렌이었다. 네더만은 그를 보며 씩 웃었다.
“더럽게 반갑구만.”
네더만이 적들을 밀어낸 자리 위로 단단한 돌벽이 쌓이고 있었다.
대책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성문이 뚫릴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덕이다.
“뚫어라-!”
적들은 빠르게 쌓여 가는 벽을 보고 더욱 밀려들었지만, 네더만은 이를 허락지 않았다.
“비싸다니까, 이 도둑놈의 새끼들아-!”
그의 손끝에서 녹빛 섬광이 가공할 속도로 번져 나갔다.
일대를 찰나에 휩쓸고 지나가는 녹색의 폭풍.
그것이 적의 전열을 단숨에 뭉개 버렸다.
앞에 늘어선 이들 중, 최상급 극의에 다다른 그 검격을 받아 낼 이들은 없었다.
구오오오오.
사납게 파인 자국이 바닥에 남았다.
네더만은 그로 인해 생긴 잠깐의 소강상태를 틈타 재빨리 몸을 뺐다.
그가 지나가자 그 자리를 빠르게 돌벽이 메꿨다. 동시에 얼음 속성의 마법이 그 위로 내린다. 돌벽을 매개로 단단히 얼어붙은 얼음벽은 하나의 성문처럼 빈틈없이 공간을 메웠다.
“후우. 젠장.”
네더만은 그것을 보며 땀을 닦아 냈다.
잠깐이지만 진땀을 쏙 뺐다.
적 또한 성문을 부수기 위해 많은 마력을 소모했을 터.
성문보다야 못하지만 잠시나마 시간을 끌 수는 있을 터였다.
그 잠깐의 시간을 틈타 성문이 무너져 휑한 자리에는 새로운 성문이 설치되고 있었다. 그동안 집중하여 훈련한 내용인 만큼 대응은 빨랐다.
“제때 도착했죠!”
알렌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네더만은 마주 엄지를 치켜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성벽 위로 올라온 그는 여전히 막강한 적의 군세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오늘 하루는 버티겠군.’
적들도 첫날부터 무리하게 공세를 펼칠 예정은 없는지 필사적으로 병력을 갈아 넣고 있지 않았다.
단번에 뚫을 수 없다는 걸 아는 까닭.
여러 차례 두드리면서 빈틈을 공략하려 하겠지.
“음?”
성벽 아래를 훑어보던 네더만은 자신을 향한 명확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적군들 사이에 홀로 서 있는 자.
검은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직속 친위대군.’
무한의 속검이 죽은 뒤 나왔던 이들과 복색이 같았다.
아마 저자가 성문을 부수었겠지.
네더만은 주먹을 들어 올려 감자를 먹여 주었다.
“저 개X끼가.”
베베토는 성벽 위에서 손으로 욕하는 자를 보았다.
조금 전까지 성문을 막고 있던 자.
녹빛의 오러를 봤을 때, 아마 용 사냥꾼이란 이명을 가진 자일 터였다.
흰 사자를 제외하면 프렌치아에서 제일가는 검이라지.
알고 있었지만 굳이 나서지 않았다.
성문을 재빨리 보수하는 것만 보아도 제국을 막기 위해 많은 대비를 해 두었을 터였다.
첫날부터 무리하게 밀고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네놈의 목은 내가 친히 베어 주마.’
베베토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네더만을 노려보았다.
베베토는 글리머 기사단이 흰 사자에게 패퇴한 후에 그를 상대할 생각이었다.
흰 사자를 상대하기도 전에 힘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무한의 속검을 상대한 후에도 페르오와 예리아를 벤 흰 사자였다.
정면으로 붙는다면 승산은 없었다.
하나, 글리머 기사단을 상대한 뒤라면 다르다.
자신의 강함은 앞서 당한 두 녀석을 아득히 상회하므로.
그는 미련 없이 전장에서 등을 돌렸다.
그 이후로도 지루한 소모전이 계속됐다.
그리고 동이 터오를 무렵.
“와아아아-!”
마그네트 외성에서 커다란 함성이 일었다.
제국군이 후퇴하고 있었다.
고작 하루 버텨 낸 것이었지만, 적을 막아 냈다는 기쁨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일 뿐.
전장이 끝난 도시는 참혹했다.
“됐습니다.”
응급조치를 끝낸 이리엘은 허리를 펴며 이마에 묻은 땀방울을 닦았다.
그녀는 이쪽저쪽으로 부리나케 뛰어다니며 응급조치를 하고 있었다. 네스는 그 옆을 의류 가방을 멘 채 졸졸 따랐다.
“끄으으.”
하나, 여전히 부상병들로 병동은 숨 쉴 틈조차 없이 바빴다.
부상의 정도가 심각한 이들만 오고 있음에도 그랬다.
신체 부위를 절단해야 할 이들도 많았고, 병원에 실려 와 죽는 이들도 많았다.
곳곳에 비명과 앓는 신음만이 가득했다.
“이리엘 님-! 이쪽에 응급 환자요!”
그렇게 정신없이 불려 다니던 이리엘은 해가 중천을 넘어가서야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휴.”
샌드위치를 와앙 문 그녀는 지붕 위에 올라 볼을 부풀린 채 마그네트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언제쯤 오시려나…….”
그녀는 샌드위치를 다시 한번 와앙, 물고는 우물거렸다.
이리엘의 시선은 성벽 너머를 보고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이 전장의 승산은 그 너머의 존재에 있었다.
흰 사자가 없으니 마치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것 같다.
이길 수 없는 전쟁.
전에는 꿈꾸지도 못했던 길 위에 서 있었지만, 그가 없으니 다시 제자리를 걷는 것 같다.
적들의 수는 무수히 많았고 부상자는 넘쳤다.
솔직히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는지…….
그의 존재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저 드높은 마그네트 성벽보다도 제네스의 등 뒤가 안전하게 느껴진다는 건 퍽 우스운 일이었다.
“빨리 좀 오라구요.”
이리엘은 괜히 들리지 않을 투정을 부려 보았다.
* * *
피난민의 행렬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떠날 수 있는 자들은 최대한 짐을 한 아름 짊어지고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아고, 죽겠다.”
“전쟁이 끝날지도 모르는데, 너무 멀리 가는 거 아니에요?”
“그래도 일단 가 봐야지. 아니면 돌아가면 되고.”
“솔직히 독립군들이 제국을 감당할 수 있겠나.”
제국의 병력이 평원을 메우고도 끝이 없게 이어진다고 했다.
전역에 있는 제국군들이 마그네트로 모이고 있다지.
그 병력을 독립군들이 막아 낼 리 만무했다. 검을 쥘 수 있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그 전쟁에 끌려갔지만, 살 사람들은 살아야 했다.
그리고 살려면 움직여야 했다.
“흰 사자가 죽었다는 소문도 돌던데.”
“무한의 속검과의 전쟁 이후 큰 부상이 있었다더군. 알 사람들은 다 안다고.”
“그렇지. 수도를 수복할 때도 등장하지 않았으니.”
독립군과 총독부의 전쟁.
그 당시에도 흰 사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원군을 격퇴했다는 소문만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단 이야기가 많았다.
그 때문에 흰 사자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소문은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마그네트는 아직 함락되지 않았나.”
갑작스레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사내의 고개가 돌아갔다.
“헉!”
그러고는 숨을 집어삼켰다. 인기척도 없었는데 어느새 낯선 이가 눈앞에 서 있었다.
나이는 어려 보였지만, 그 몰골이 수려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음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와 그는 자연스레 존대를 했다.
“그, 아직 전쟁 중인 걸로 압니다.”
“아는 대로 말해 보도록.”
사내는 순순히 자신이 아는 내용을 최대한 상세히 풀어냈다.
그러고 나서야 남자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살았다.
만족해하는 듯한 그 모습에 안도의 숨이 절로 나왔다. 왠지 제대로 대답을 못 하면 사달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귀족이거나 기사겠지.
그가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리려는 찰나,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휘이잉-!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던 그는 바람이 지나간 후에야 눈을 떴다.
그러고는 다시 헛숨을 삼켰다.
눈앞에 사내는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빨리 가야겠군.’
제네스는 한 줄기 질풍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그네트와의 거리는 이제 일주일.
조금 전 들은 정보를 토대로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을 터였다.
단순한 수치를 비교해도 불리한 전쟁.
그것을 뒤집을 변수는 자신의 존재밖에 없었다.
마그네트가 함락되기 전에 도착하려면 최대한 속도를 내야 했다.
제네스는 발끝에 힘을 실었다.
일주일 뒤, 마그네트.
“쳐라-!”
“막아랏-!”
치열한 전선은 외성을 넘어 어느새 내성의 성문 앞에서 진행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