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제180화 버티면 이긴다 (3)
인기척 없이 휑한 거리에 서늘한 바람만이 흩어졌다. 단단히 잠긴 문에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떠날 이들은 모두 피난을 떠난 뒤였다.
전장의 승패가 어떻게 될지 몰랐다.
떠날 수 있는 자들은 모두 떠나라 했고, 떠나지 못한 이들은 모두 왕성에 모였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모두 신께 기도를 올렸다.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모여 커다란 소음을 냈다.
그 뜻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쉬이 알았다.
평안과 승리.
모두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제발, 제발, 꼭 프렌치아 왕국군이 이기게 해 주세요.”
유리아 또한 눈을 질끈 감은 채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전투에 참여할 수 없는 하라브 또한 함께였다.
“또 무슨 신이 있었죠?”
유리아가 눈을 슬쩍 뜨고는 물었다.
“흐음…… 그러게나 말이다. 다시 아리아나 님부터 시작할까?”
“넵!”
유리아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신이란 신은 모두 그녀의 입에서 불려 나오고 있었다.
지난번 기도가 닿은 전적이 있기에 그녀는 더욱 열심히 기도했다.
제네스가 총독부를 뚫고 그 하늘에 프렌치아 국기를 걸었던 날.
유리아는 그때처럼 신이 자신의 바람을 들어줄 거라 믿었다.
“모두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이번에는 알렌과 지부원들까지 모두 전장에 나섰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많은 시민이 병사로 자원하여 병기를 쥐고 성벽에 올라 있었다.
둥-!
그런 병사들의 귓가로 북소리가 귓가에 담기기 시작한다.
둥-!
심장까지 함께 울리는 짙고 무거운 고동.
알렌은 북소리에 맞춰 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프렌치아의 명운이 걸린 전장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저편에서 적의 물결이 기어 온다.
검은 벌레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듯하다.
“후우.”
알렌은 숨을 길게 뱉었다.
적들의 병력은 마그네트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었다.
동서남북, 어디를 보아도 제국군의 무리가 보였다.
까만 띠가 마그네트를 두른 듯했다.
자신들은 그런 적들을 막아 내야 했다.
나부끼는 적들의 깃발이 어느새 선명히 보이기 시작한다.
블랙 드래곤이 그려진 제국의 깃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전장이 눈앞에 와 있었다.
평원에 가득 깔린 적의 군대에, 사타구니가 시큰해져 온다.
“후우.”
알렌은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병사들을 독려하는 지휘관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알렌 또한 지휘관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점차 고조되는 심경을 느낄 수 있었다.
“프렌치아를 위하여-!”
지휘관의 선창이 들려오고.
“위하여-!”
알렌은 반사적으로 검을 허공에 들며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프렌치아를!”
“위하여-!”
소리를 지를수록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확장된 혈관이 전신을 고양시키고 있었다.
가슴팍이 뻐근할 지경이다.
꾸욱.
알렌은 검을 단단히 쥐며 끓어오르는 흥분을 눌렀다. 그럼에도 호흡이 날뛰는 듯하다.
익스퍼트 초급에 이른 그도 이럴진대, 병사들은 어떻겠는가.
다들 얼굴이 밀랍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나, 눈빛만은 뜨겁게 타오른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듯했다.
둥-! 둥-!
적의 북소리가 더욱 선명히 들려오기 시작한다.
서서히 밀려오는 제국군의 전열을 따라 해도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알렌은 가슴팍에 새겨진 프렌치아의 국기를 한 손으로 툭툭 쳤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독립군이 아닌 프렌치아 왕국군으로서 적들을 맞이하는 것은.
‘제네스 님! 제가 마그네트를 지키고 있을 테니 빨리 오십시오!’
알렌이 제네스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심장은 이제 미친 말처럼 날뛰고 있었다.
‘버티면 이긴다.’
‘버티면 이긴다.’
‘버티면 이긴다.’
알렌은 주문처럼 이 말을 되뇌었다.
그 혼자뿐만이 아니었다.
프렌치아 왕국군 모두가 이 말을 주문처럼 외우고 있었다.
“버티면 이긴다.”
쿵!
병사들의 걸음에 맞춰 땅이 울린다.
20만에 육박하는 병사들이 걸음을 맞추니 일어난 일이었다. 오호른 알센도르는 말을 타고 가장 선두에서 나아가고 있었다.
저편에 기다랗게 늘어선 성벽이 보인다.
마그네트. 듣던 대로 단단한 성.
드높은 성벽이 한눈에 보아도 굳건하다.
쉽사리 함락할 만한 성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나.’
흰 사자.
오호른은 성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목적은 흰 사자에게 있었다.
그가 소드 마스터에 이르렀다 한들, 그에게는 글리머 기사단이 있었다.
‘복수는 내 손으로 한다.’
바르안 알센도르는 그에게 가주를 넘어 존경해 마지않는 인물.
평생 그의 등을 보고 자라 왔다.
그런 그분의 마지막을 치졸한 공작으로 더럽힌 죄.
흰 사자의 목과 프렌치아의 목, 그 모두를 베어 냄으로써 그 죗값을 받아 낼 터였다.
성벽과의 거리를 적당히 좁힌 그는 고삐를 잡았다.
그가 멈추자, 그 뒤로 늘어선 전열이 멈췄다.
그는 고삐를 틀며 몸을 돌렸다.
그의 앞으로 병사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제국의 병사들은 들으라-!”
마력을 품은 그의 목소리가 전열의 구석구석까지 뻗어 나간다.
마치 천둥이 우는 듯 커다란 목소리.
“제국은 빼앗기지 않는다!”
그가 목에 핏대를 세워 소리쳤다.
“제국은 오직 군림할 뿐이다!”
“저들은 제국과의 정당한 합병을 거부한 채 우리의 성을 빼앗았다.”
프렌치아 국민이 들으면 피를 토할 소리를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해 댔다.
“우리는 오늘!”
“프렌치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적들의 희망을 빼앗을 것이다-!”
그가 몸을 돌리며 마그네트를 향해, 그 위에 걸린 프렌치아의 국기를 향해 칼을 겨눈다.
“적들에게 제국의 힘을 보여 주자-!”
“와아아아아-!”
병사들의 함성 사이로,
뿌우우우우-!
뿔피리가 기다랗게 울었다.
성벽을 따라 기다랗게 늘어선 전열 전체에서 뿔피리 소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쟁을 알리는 소리였다.
“전군 돌겨어억-!”
지휘관들의 명령에 병사들이 고삐 풀린 말처럼 뛰쳐나가기 시작한다.
밀물이 밀려오듯 성벽을 향해 세차게 흐르는 병력들.
그들의 걸음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오호른은 그런 이들을 맞이할 성벽을 바라보았다.
그 위로 늘어선 프렌치아의 병력들이 보였다.
그들 또한 본인들에게 뒤가 없음을 잘 알 터.
필사적으로 항전할 것이었다.
쉬운 전장일 리 없었다.
하나 승리는 제국의 것이었다.
그렇게, 치열한 전장의 막이 올랐다.
* * *
가열하게 타오르는 전장.
예상대로 성문은 단단했고 적의 저항은 거셌다.
수성을 위해 오랜 준비를 했을 테지.
저스티스 소속의 베베토는 멀찍이서 그 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오호른과 그를 따르는 글리머 기사단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 흰 사자와의 결전을 대비해 힘을 비축하려는 것이겠지.
“과연 어떻게 되려나.”
베베토의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가 담겼다. 황제에게 대략적인 상황은 들어 알고 있었다.
녹색의 오로라가 떴다는 건 흰 사자가 작전을 성공했다는 이야기.
그를 막기 위해 간 저스티스 대원들이 있음에도 그랬다.
대원들이 당한 것인지, 아니면 미처 조우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오로라가 발생한 뒤 만난 것인지는 모른다.
하나, 만약 흰 사자가 승리했다면 그는 이곳에 나타날 확률이 높았다.
거리가 상당했지만, 적들이 도망치지 않고 이곳에서 격전을 벌인다는 건 흰 사자의 존재를 믿기에 가능한 일이라 여겨졌다.
그리고 베베토는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 그럼 시시하니까.’
흰 사자가 없는 전장은 무의미했다.
단단한 성벽이 세워져 있지만, 적과의 병력 차는 상당했다.
거기에 글리머 기사단에 자신의 존재까지.
적들이 아무리 발버둥 친다고 해도 막아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상황이 절박해지면 조금 더 재밌어지려나.”
첫 번째 교전이라고는 하지만 지루한 소모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베베토는 그런 지루한 전장을 구경하는 걸 반기지 않는다.
전장이라면 당연히 피로 점철되어야 하지 않나.
칼과 칼이 부딪치고,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베베토는 그런 전장을 좋아했다.
무난하게 흐르는 이 전장에는 적당한 긴장감이 필요했다.
적에게는 위기가, 아군에게는 기회가 필요했다.
그래야 전장의 불이 더욱 타오를 테지.
저벅저벅.
베베토가 천천히 병력들을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머리 위에서는 화살비가 떨어지고 있었으나 그에게는 가랑비와 다를 바 없었다.
콰아앙-!
곳곳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울었다.
적군의 마법사들이었다.
적의 저항이 거센 탓에 병사들은 쉽사리 성벽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성벽에 걸쳐진 사다리는 오래지 않아 다시 아군 쪽으로 떨어지거나 부서졌다.
베베토는 그 난장판 속을 사과를 씹으며 유유히 걸었다.
그런 그의 앞으로 마그네트의 거대한 성문이 눈에 담겼다.
쿵-! 쿵-!
병사들이 공성추로 성문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으나 성문은 요지부동이었다.
성문 위로 은은한 푸른빛이 맴돌았다.
강화 마법이 몇 겹으로 되어 있는지, 아주 작정을 한 듯했다.
‘저 상태라면 확실히 쉽지 않지.’
아티팩트와 마법도 통하지 않는 저 성문을 일반 병사들로 뚫으려면 꽤 많은 병력이 작살 나야 한다.
오러를 품은 검이 차라리 빠르겠지만, 그랬다가는 정작 중요한 싸움에 제 구실을 못 할 수 있다.
게다가 기사들의 전력은 소중하다.
그들이 전면에 나서서 길을 뚫을 거였다면, 이만한 병력을 모을 이유가 없었다.
그것이 전장이 길어지는 이유였다.
“이러니 내가 나서지.”
누군가 흥을 돋우어야 했다.
그건 그가 전문이었다.
콰아아아-!
그의 손끝으로 검보라색의 오러가 덩어리지며 모여든다.
마나가 아닌 마기라 불리는 기운.
베베토는 악마의 힘이라 불리는 마기를 다루는 이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팔에 넘실거리는 검보라색의 마기가 뭉치며 거대한 형상의 손을 만들어 낸다.
마치 악마의 것처럼 손끝이 뾰족한 손이었다.
“비켜라.”
그 막대한 기파에 성문을 두드리던 이들이 일제히 물러선다.
마기는 오러에 상반되는 기운이면서, 상성상 마나의 우위에 서는 힘이었다.
강렬한 마기는 오러의 응집에 반발을 일으키게 만든다.
성문의 강화 마법 또한 결국 마나의 축적.
그것을 갈라 버리기에 베베토의 마기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씩 웃은 그가 손을 가공할 만한 속도로 뻗었다.
콰아아아아앙-!
이내 막대한 폭발음과 함께 자욱한 운무가 일었다.
하나, 여전히 성문은 건재했다.
대신에 그 앞을 감싸고 있던 푸른 배리어가, 유리가 깨진 것처럼 금이 쩌저적 가 있었다.
“꽤 단단하네.”
눈썹을 들어 올린 그가 다시금 손을 뻗었다.
콰아아아앙-!
그렇게 연거푸 세 번의 굉음이 터져 나갔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결국, 단단했던 성문마저 터져 나갔다.
베베토는 후드득 떨어지는 잔해 앞에서 입꼬리를 기다랗게 말아 올렸다.
“우와아아-!”
휑하니 뚫린 성문을 향해 제국군들이 기다렸다는 듯 밀려들어 가기 시작한다.
콰과과광-!
그리고 내부에서 들려오는 폭발음.
동시에 병장기 맞부딪치는 소리와 적아를 가리지 않는 비명과 고함이 들려온다.
아.
드디어 전장의 소리다.
그는 씩 웃으며 그 현장을 지켜보았다.
“그래, 이래야 전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