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제179화 버티면 이긴다 (2)
푸르게 반짝이는 너른 해협.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수평선 위로 길게 늘어선 적의 함선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라질 것들. 더럽게도 많네…….”
우르노는 포르센 항구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눈동자를 가득 메우고도 넘치는 함선들은 그 수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제국군이 몰려오고 있다-!”
그 광경을 가장 먼저 본 어부들이 화들짝 놀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금세 항구로 모여들었다.
“…….”
그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적의 함대를 보며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저 안에 얼마나 많은 병력이 타고 있을지는 세어 보지 않아도 알았다.
“내가 평생 잡은 물고기만큼 몰려왔구만. 징그러운 새끼들.”
“아니, 제국 놈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지금 쳐들어온다고?”
여전히 하늘에는 녹색 오로라가 일렁이고 있었다.
“저것들이 언제 법을 지켰던가. 아주 법 위에 있지. 칵-! 퉤!”
발렌시아 대륙에 살아가는 이들치고 녹색의 오로라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없었다.
아르에리아 조약에 관해서 모르는 자는 있어도 녹색의 오로라는 모두 알았다.
당시의 이야기는 이야기로, 전설로, 노래로 남아 있었으니까.
“오래전 이야기 아닌가. 이제는 뭐 무시해도 되나 보지.”
그리고 그만큼 오래된 이야기이기도 했다.
“마치 10년 전을 보는 거 같아.”
“젠장. 이제 좀 살 만해질까 싶더니만.”
다들 허망한 눈빛으로 해협을 바라보고 있었다.
포르센의 시민이라면 모두 10년 전 그날을 잊었을 리 없었다.
그 당시에도 이 앞바다가 적의 함선으로 가득 찼었다.
그들이 접안하며 포르센은 세차게 불타올랐었지.
하나, 이번에는 다르기는 할 거였다.
그때와 달리 포르센은 여전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굳이 짓밟고 지나가지는 않을 터.
덕분에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마그네트에서 저들을 막아 낼 수 있을는지.”
“흰 사자가 있지 않은가.”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 가능할 리가.”
“대체 저 많은 병력을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최근 프렌치아 임시정부가 마그네트를 수복했다는 소식에 한껏 들떴던 이들이었다.
테나스타 광장에서 자주국임을 선포했다지.
금방이라도 제국의 손아귀에 해방될 것 같은 분위기가 도시에 맴돌았었다.
하나, 적들의 군대는 그 열기에 겨울을 몰고 왔다.
“개같은 놈들.”
우르노는 동요하는 시민들을 뒤로하고 곧장 몸을 돌렸다.
이 소식을 수도에 빠르게 전해야 했다.
자주국이라 선포했다지만 그것은 수도를 탈환했다는 상징적인 의미일 뿐, 수도를 제외하면 아직 프렌치아는 제국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적들은 어려움 없이 빠르게 마그네트로 진격할 터였다.
* * *
무거운 분위기가 원탁 중심으로 흘렀다. 루시안을 비롯한 중진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네더만, 리포드 등을 비롯해 새로운 얼굴들도 꽤 많았다.
이제는 제법 한 나라의 국무회의 같았으나, 별다른 방도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레이크가 담담한 목소리로 상황을 전했다.
“적의 함대가 포르센 항구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지금쯤이면 마그네트를 향해 진격하고 있을 테죠.”
“그 거지 같은 새끼들!”
리포드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하늘에 버젓이 녹색의 오로라가 펼쳐져 있음에도 진군하다니.
머리통이 어떻게 됐나?
하나 불평한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그래도 추가 병력은 없을 겁니다. 함대에서 내린 병력이 10만으로 추정되니 마그네트에 도착할 때쯤이면 대략 20만에 가깝게 불어날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마그네트의 성벽은 높고 단단했다.
프렌치아가 치열하게 반항하리라는 건 그들 또한 알고 있을 터.
서부는 물론이거니와 프렌치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제국군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반면, 그에 맞설 프렌치아 왕국의 병력은 고작 3만.
농기구 대신 검을 쥔 시민들을 제외하고 실질적으로 전투가 가능한 인원이었다.
제국군에 비하면 한참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적들의 군대는 철저히 훈련된 정규군이었고, 대륙 제일을 자랑했다.
여기저기서 모인 오합지졸의 병력으로 막아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나 전장에 임하는 각오만큼은 남달랐기에, 성벽에 기대어 농성한다면 얼추 버틸 수는 있을 거라 레이크는 전망했다.
“결국 그 자식이 언제 오느냐에 따라 결정되겠구만.”
네더만이었다. 그 말에 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희망은 있는 거군.”
네더만이 말한 그 자식이 누구를 뜻하는지는 여기 있는 모두가 알았다. 흰 사자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회의실의 분위기가 잠시나마 그 무게를 덜었다.
대륙 제일검인 그가 있다면 전황은 어떻게든 달라질 터였고, 조금 전 레이크는 그 뜻이 담긴 물음에 긍정했다.
흰 사자가 온다면 이겨 낼 수도 있을 거란 의미와 같았다.
“하지만 제때 도착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는 현재 검은 숲에 있었다. 녹색의 오로라가 하늘을 뒤덮는 순간, 그는 검은 숲의 심처에 솟은 드레어스산의 정상에 있었을 터였다.
대륙의 최북단에서 프렌치아까지.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무리 빠르게 남하해도 세 달은 훌쩍 넘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아니, 사실 세 달 안에 도착한다고 해도 믿기 어려울 만큼 불가능한 일이다.
“제국군은 아마 한 달을 조금 넘어 마그네트에 도착할 겁니다.”
그들의 진군을 막아 세울 힘이 프렌치아에는 없었다. 성벽에 기대어야 비벼 볼 수 있는데, 성문 밖에서 그 병력의 걸음을 지체시키는 건 사실 불가능했다.
조금의 타격도 없을 테지.
아무리 물고 늘어져 봐야 결국 하루 이틀 차이가 날 터였다.
그것에 필요한 병력을 생각하면 차라리 성벽에 기대어 버티는 게 나았다.
네더만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후퇴하는 방안은 없나? 그 자식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되잖아.”
“그것도 방법이기는 합니다만, 적들이 성벽에 기대어 싸운다면 아군의 피해가 더욱 클 것입니다.”
아무리 제네스의 힘이 크다고는 하지만, 적에게 성을 내준 후에 싸울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욱 피해가 클 터였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마그네트를 포기하는 게 나았다. 그리고 마그네트를 포기할 생각이었다면 수복할 이유도 없었을 테고.
물러설 수 없는 전장이었다.
그리고 독립을 위해서라면 어차피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었다.
마그네트 성벽에 기대어 적을 맞이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네더만이 말했다.
“쳇. 무조건 버텨야겠구만. 제네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빠르게 내려오려고 할 겁니다. 실패 확률이 있다는 건 그 또한 알고 있을 테니까요.”
거리가 멀었다.
연락이 닿을 수 없기에 다양한 경우의 수에 대해서도 말해 두었었다.
모든 경우에 따른 방도는 하나뿐이었지만.
최대한 빠른 복귀.
제네스는 전력을 다해 마그네트로 돌아올 것이다.
“결국 이 성벽에 기대어 버텨야 된다는 건데.”
네더만은 레이크를 바라보았다.
“가능하겠어?”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매우 어렵습니다.”
레이크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굉장히 담담히 풀어 갔다.
“적의 병력 수도 많거니와 그들을 이끄는 사령관은 오호른 알센도르라고 합니다. 백전을 넘은 기사이지요. 그들이 가진 글리머 기사단의 힘 또한 레트로이나 6검과 비등하고요.”
“하.”
다들 짧게 탄성을 뱉었다.
알센도르가의 글리머 기사단이라 하면 대륙에서 손꼽히는 기사단.
모르는 이가 없었다.
“또한 그들도 흰 사자의 존재를 염두에 두었을 겁니다. 그만한 전력이 함께 했을 테죠.”
“직속 친위대도 함께 했을 수 있다?”
“높은 확률로 그렇습니다.”
황제의 직속 친위대가 이능을 가졌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네더만의 경우는 그들의 이능을 직접 보기도 했으니까.
제네스 없이 그들을 막아 낼 전력이 프렌치아에는 없었다.
결국 제네스가 와야 뭐가 돼도 될 건데.
“그렇다고 제네스 님이 온다고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젠장.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요? 이대로 뒈지자는 말을 하자는 건 아닐 거 아니오.”
리포드가 불만을 토로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다 같이 뒈지자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다들 레이크의 답변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맥없는 답변만이 이어졌다.
“상황은 어렵지만, 이 악물고 잘 버텨 봐야지요.”
하긴 이 상황에 레이크에게 별다른 방도가 있겠나.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시안이 상황을 정리하고 나섰다.
“그렇다고 절망적인 상황만은 아닙니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사기가 일순 고개를 들었다.
“변수는 분명 존재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버티느냐, 또 제네스가 언제쯤 당도할 것이냐.”
그가 조용히 좌중을 훑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패입니다.”
다들 침음을 삼킨다.
상황은 달라질 것이 없었다.
루시안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지난 10년,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큰 가능성을 보고 달려왔습니까?”
“여러분에게 독립은 가당키나 한 일이었습니까?”
독립을 향한 길.
언제 이루어질지 모를 캄캄한 길이었다.
누구도 그 가능성을 보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렇게 했고,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어려운 싸움이 될 겁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가 질 것 같지 않군요.”
“승리의 요건은 간단합니다.”
“제네스가 올 때까지 버티는 것.”
루시안은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에서 하나의 목표를 세워 주었다. 명백한 방향이 세워지자 힘없이 늘어져 있던 이들이 하나둘 어깨를 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까지 병력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
“그렇게 버티고 있으면 분명 반격의 기회가 올 거라고 봅니다.”
루시안이 씩 웃었다.
왜일까.
그 여유로운 미소에 왠지 먹구름이 개는 듯하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 눈앞에 있습니다. 누구도 이 기회를 걷어찰 생각은 없을 거라 믿습니다. 한번 있는 힘껏 버텨 봅시다.”
“이 전장만 이겨 낸다면 우리는-.”
그의 푸른 눈빛에 날이 섰다.
“제국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간단한 명제였지만, 마음을 굳건히 세우기에는 충분한 문장이었다.
* * *
“움직여라-!”
“각자 위치로-!”
마그네트에는 팽팽히 당겨진 긴장감이 깊게 깔려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병사들의 면면엔 비장한 각오가 서렸다.
지난 시간, 이 전쟁을 대비하여 공을 들였다.
총독이었던 아르멜 덕분에 성벽과 성문의 강화는 충분했고, 화살 등의 군수품과 비축된 식량 또한 넉넉했다.
마그네트의 성문이 다시금 단단히 잠겼다.
시위 덕분에 혼란스러웠던 이전의 전쟁과 달리 마그네트는 안에서부터 단단했다.
다들 전쟁에 임하는 자세에 흔들림은 없었다.
병사들에게 전해진 승리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버티면 이길 수 있다.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지는 몰랐다.
정말 승리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승리의 요건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눈앞에 적들만 막아 내면 될 터였다.
그럼 프렌치아를 지킬 수 있다.
그것은 병사들의 마음을 세차게 타오르게 했다.
다들 나라를 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잃어버렸던 나라를 10년 만에 되찾은 참이었다.
그 누구도 손에 들어온 소망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지금쯤 제네스 님은 어디에 있을까요?”
알렌이 아련한 눈빛을 저 멀리 던졌다.
“열심히 달려오고 있겠지. 그놈이 이렇게나 보고 싶을 줄이야. 역시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네더만과 알렌은 말 머리를 돌렸다.
적들이 빠르게 진군하고 있었다.
“이제 버틸 일만 남았네. 살아남아 보자고.”
“예.”
알렌은 비장하게 답했다.
병력들이 단단히 늘어선 성벽 위에서 루시안 또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는군.”
끝없는 적의 군대가 땅거미를 등에 지고 밀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 낸 어둠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