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제177화 녹색의 오로라
해안가에 정박한 함선 위로 무장한 병력들이 오르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병사들.
함선의 수도 눈으로 가늠되지 않을 만큼 많았다.
프렌치아 1차 원정대 출정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시민들은 그 막강한 자태에 환호를 지르며 응원했다.
“출정이 예상보다 더 빨라. 앞으로 1시간…….”
델론트에서 제국군의 상황을 염탐하던 화렌카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독립군이 마그네트를 수복하기 전부터 그는 이곳으로 출발해 지금껏 적들의 동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화렌카는 여전히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1시간 안에 녹색의 오로라가 보이지 않으면…….’
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다.
‘제국군이 프렌치아 본토에 들이닥치겠지.’
10년 전 벌어졌던 제국과의 전면전.
그 참혹한 전장이 다시금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델론트에 집결한 적들의 병력은 대충 예측해도 10만이 넘어간다.
몇 차례에 걸쳐 본토에 상륙하겠지만, 저 정도의 병력이 프렌치아에 내린다면 그 뒤에 벌어질 일은 안 봐도 빤했다.
게다가 여전히 프렌치아에는 제국의 병력이 남아 있었다.
그들이 모두 마그네트로 진격한다면 마그네트의 성벽이 아무리 높다 한들 그들을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유일한 희망인 흰 사자는 현재 대륙 최북단에 있지 않은가.
저들이 배를 출항하는 순간, 프렌치아의 패배는 기정사실화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 * *
휘이잉.
세찬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었다.
정상에 오른 나는, 가파른 경사면을 굽어보고 있었다.
새까만 산악이 눈앞에 펼쳐진다.
황제가 우리의 작전을 알고 있었다는 게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아르에리아 조약을 무시하고 병력을 출정시킬지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행위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녹색의 오로라가 하늘에 깔린다면, 1차 원정대는 보내더라도 적어도 2차, 3차의 추가 병력은 징병할 수 없을 터였다.
아무리 지금의 제국이 압도적인 국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그렇게까지는 황제 또한 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전장의 확장을 막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지금의 힘으로는 제국과의 전면전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으니.
우웅.
마력을 주입하자 마름모 형태의 아티팩트가 허공에 떠올랐다.
마력 탐지기라 불리는 이 아티팩트는 마석을 채석할 때 사용하는데, 근방에서 마력이 가장 높게 응축된 곳을 찾아 끌려갈 터였다.
쉬아아악-!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마력 탐지기가 빠르게 허공을 날았다.
그 뒤로 남는 푸른 선.
나는 그것을 따라 빠르게 내달렸다.
푸른 선은 높게 깎인 비탈의 중심을 향하고 있었다.
그 선을 따라가니 겹겹이 쌓인 바위에 가려진 동굴이 보였다.
가까이 가니 입구가 거대했다.
나는 천천히 내부로 걸음을 디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이 단절되고 칠흑의 어둠이 찾아왔다.
그 중심을 관통하는 푸른 선만이 은은히 발광하고 있었다.
파스스슷.
나는 조명 아티팩트를 허공에 띄웠다.
수명이 길지는 않아 2시간이 고작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을 대비해 준비해 온 것이었다.
빛을 내는 작은 구체에 일대가 밝아진다.
나는 푸른 선을 따라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리고 넓게 트인 듯한 공간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빛이 끝까지 닿지 않아 구조가 보이지는 않았으나 육감으로는 일대의 공간이 가늠됐다.
넓은 광장을 연상시킬 정도로 커다란 공동이었다. 다시 선을 따라 걷던 나는 일순 걸음을 멈추었다.
스르르륵.
귀를 기울이자 흐릿하게 들리던 소음이 선명히 잡혔다.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녀석의 존재를 인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이 저릿할 정도의 살기가 훅 끼쳐 왔다.
“호오.”
나는 그것을 느끼며 짧게 감탄했다.
지금껏 만나 온 몬스터들을 압도하는 막강한 기세.
저 멀리 붉은빛이 번뜩였다.
그리고 그것이 단숨에 공간을 도약하며 뻗어 온다.
화악-!
나는 그것을 피했다.
콰아아앙-!
거칠게 바닥을 쓸고 지나가는 무언가.
나는 저편에서 꼿꼿이 목을 세우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이무기인가.”
정확히 이무기는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그만큼 거대한 뱀이었다.
이곳이 아무래도 뱀굴이었던 거 같은데.
나는 칼날 위로 검강을 피워 냈다.
발광하는 강기에 일대가 더욱 환해지자 녀석이 검은 동공을 세로로 좁혔다.
“키야악!”
동시에 아가리를 들이미는 녀석.
당겨지며 수축되었던 몸통이 팽창하듯 뻗어지며 간격을 집어삼킨다.
콰아앙-!
나는 측면으로 몸을 빼내어 녀석의 공격을 피했다.
걸음에 추뢰를 담아야 할 정도로 쾌속한 움직임.
하나 거대한 몸뚱이의 단점은 공격할 곳이 많다는 점.
나는 녀석의 몸뚱이를 향해 검을 수직으로 그었다.
콰아아앙-!
강철마저도 쉬이 절단하는 강기가 놈의 몸통을 가르지 못하고 둔중한 굉음을 내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강력한 반발.
비늘의 강도가 생각 이상으로 단단했다.
검강의 예기를 단숨에 지워 버릴 정도니.
“크롸라라-!”
그래도 아프기는 했는지 녀석이 몸뚱이를 사납게 비틀어 대며 꿈틀거렸다.
“캬아악-!”
아가리를 벌린 녀석이 내게 타액을 뱉어 냈다. 나는 어렵지 않게 피했다.
츠스스스슥.
타액은 단숨에 바닥을 녹여 버릴 정도로 지독한 독을 품고 있었다. 그것을 피해 낸 내게 꼬리가 떨어져 내린다. 마치 검은 기둥이 휘둘러지는 듯하다.
콰아앙!
나는 그런 녀석의 두꺼운 꼬리를 비스듬히 쳐 냈다.
지이잉-!
막강한 파괴력이 칼날에 남아 손아귀에서 진동했다. 몸뚱이가 길고 두껍다 보니 공격 범위가 상당했다. 녀석이 머리를 더욱 꼿꼿이 세우며 혀를 날름거렸다.
잔뜩 화가 난 듯했다.
천령신공 검법편
한빙의 장(章) 빙해(氷海).
칼날 위로 새하얀 운무가 번지며 주변을 더욱 환하게 한다.
뱀이란 자고로 추위에 약하지 않나.
“겨울잠을 재워 주마.”
아마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테지.
지독한 한기가 순식간에 공동을 채운다.
“카악!”
위협을 느꼈는지 독을 뱉어 대는 녀석.
나는 그것을 피해 녀석을 향해 달려갔다.
“키아악-!”
그런 내가 얄미웠는지 아가리를 쫙 벌리며 쏘아진다.
나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천령신공 검법편.
제1장 천단일선(天斷一線).
활짝 벌어진 녀석의 아가리를 수평으로 가르는 올곧은 선분.
그대로 뱀의 아가리를 반으로 잘라 낸 참격은 놈의 머리통을 양단한 뒤로도 주욱 뻗어 나가 뒤편의 벽에 기다란 궤적을 새겨 넣었다.
그럼에도 몸뚱이를 사정없이 비틀며 야단법석을 떠는 녀석.
콰과과과과광!
머리가 반이 잘려 나갔음에도 그랬다.
어찌나 꿈틀거리는지 넓은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녀석의 거대한 몸뚱이는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내단이 있으려나.”
나는 녀석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작전을 수행하고 몸뚱이를 갈라 봐야겠다는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쩌저저저저적!
천장에서 매우 불길한 소음이 일었다.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듯한 균열의 소리.
쿠구구구구.
동시에 공동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젠장.”
나는 내가 들어왔던 방향과 아티팩트가 남겨 둔 푸른 선을 놓고 찰나에 고민했다. 지금까지 들어온 경로를 생각했을 때, 공동이 무너지면 아무리 나라도 무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일단 살고 봐야겠지.’
아무래도 출구가 확실한 길이 살 확률이 높았다.
쿠르르릉!
하나 발을 떼기도 전에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나는 곧장 푸른 선을 따라 몸을 돌렸다.
천령신공 경신편.
제1장 봉황익(鳳凰翼).
이렇게 된 이상 길은 하나였다.
불안하게 떨리며 잔해들을 토해 내는 동굴을 나는 초고속으로 달렸다.
솨아아아아-!
한 줄기 질풍처럼 내달리는 신형.
다행히도 저 앞에서 빛줄기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생로였다.
파밧!
몸을 빛에 던지는 동시에,
콰르르릉!
동굴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뒤를 확인한 나는 완전히 허물어지는 절벽을 보며 한숨을 돌렸다.
허무하게 뒈질 뻔했다.
“후.”
아무리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했다지만 대자연의 폭동 앞에서는 나도 한 수 접어 줄 수밖에.
살아 있음에 안도하며 뒤를 돌아보니, 널따란 정글이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아득히 높은 곳에서 빛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막혀 있어 저곳이 유일한 출구일 듯했다.
나는 푸른 선을 따라 숲을 거닐었다.
잠시 후, 눈앞에 드러나는 호수.
온통 검은색 일색인 이곳에서 호수만은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푸른 선은 그 호수 안쪽으로 뻗어 있었다.
참방.
호수에 손을 담가 보았다.
수온은 얼음장처럼 찼다.
나는 몸에 호신강기를 두르고 물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보통의 물과 성분이 다를 수 있으니, 최대한 조심해야 했다.
뽀그르르.
호수 안은 푸른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내부를 살아가는 생명체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헤엄쳐 나갔다.
푸른 선은 수면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한 장소에 얼마나 많은 마력이 응축되어 있길래 마력 탐지기를 이 멀리까지 끌고 왔는지.
‘응?’
나는 아티팩트가 멈춰 선 장소를 보며 동공을 확장했다.
호수의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대체 뭐지?’
누구도 오지 않았을 거라 여겼던 이곳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처음이 아닌 듯한데.
호기심이 동한 건 사실이나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없었다.
나는 일단 챙겨 온 신의 눈동자를 꺼냈다.
신의 눈동자 표면에는 폭발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이 마법진을 작동하면 신의 눈동자는 균열을 일으키게 될 것이고, 그것은 이 안에 담긴 마력을 요동치게 할 터였다.
그리고 이내 그 막대한 마력이 일제히 폭발할 테지.
이 안에 담긴 mp를 생각한다면 그 폭발력은 내 상상을 뛰어넘을 터.
나는 일단 신의 눈동자를 마법진 중심에 놓았다.
구우우우웅!
마법진이 반응한 건 그때였다.
그저 신의 눈동자를 올려놓았음에도 마법진이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폭발 아티팩트를 발동하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마법진이 멋대로 신의 눈동자의 마력을 흡수하고 있었다.
콰아아아-!
세찬 물결의 파동이 인다.
신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마력의 요동을 느낀 나는 더 이상 내가 할 일이 없음을 쉬이 알 수 있었다.
우우우우웅!
그때 마법진이 더욱 빛을 발하며 내부에 적힌 문자들을 드러낸다.
마법진 위로 드러나는 룬어.
아니, 룬어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 문자를 본 적이 있었다.
불멸의 도시.
움파움파족의 문자.
바로 그것이었다.
‘일단 나가자.’
다급한 상황에 일단 의문은 뒤로 접었다.
천령신공 경신편.
제4장 비연(飛燕).
콰아앙-!
나는 물을 밟고 빠르게 수면으로 나아갔다.
“푸하!”
밖으로 나온 나는 곧장 절벽을 향해 달렸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거대한 폭발이 있을 거란 건 알았다.
그리고 외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높이 솟은 절벽을 마치 평지를 달리듯 빠르게 내달렸다.
아래에서는 수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분위기.
하나, 아직 외벽의 끝은 멀었다.
콰아아아아앙-!
그 순간, 수면이 터져 나가며 높은 물기둥이 올랐다. 그리고 그 물기둥보다도 빠르게 강렬한 충격파가 밀려왔다.
이때다 싶었던 나는 그 바람에 몸을 실었다.
쾅-!
천령신공 경신편.
제4장 비연(飛燕).
허공으로 솟구치는 상승의 바람을 타고 그 힘을 발판 삼아 밀려 올라갔다.
일순 시야가 훤히 트였다.
새파란 창공에 던져진 나는 허공에서 몸을 틀어 지상을 향해 걸음을 박찼다.
콰아아아-!
세찬 바람이 밀려온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드레어스의 정상보다 더 높은 고도에 있었다.
나는 허공답보를 통해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바닥에 내려섰다.
쿠구구구구구구!
뒤를 돌아보자 거대한 폭발이 있었던 산의 정상에서는 거대한 먼지구름이 일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다시 한번 커다란 폭발이 있었다.
콰아아아앙-!
하늘이 찢기는 듯한 굉음과 함께 투명한 충격파가 거대한 파동을 그리며 가공할 속도로, 정상에서 토해진 잔해와 하늘에 깔린 구름을 쓸고 지나간다. 단숨에 대륙의 끝까지 닿을 흐름이었다.
한바탕 휩쓸고 간 충격파 뒤로 초록색 물결이 번지기 시작한다. 마치 투명한 초록색 커튼이 하늘에 깔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