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제175화 검은 숲 (2)
눈앞으로 거뭇한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나는 고개를 틀어 그것을 흘려 보내는 동시에 앞으로 쏘아졌다. 허리춤에서 뿜어진 섬광이 앞에서 반원을 그렸다.
촤-악!
그 궤적을 따라 양단되는 거체.
체고가 3m쯤 되는 이름 모를 몬스터였다.
이족보행의 녀석은 그 속도와 힘 모두 먹이사슬 정점에 있다고 알려진 오우거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한 마리가 아니다.
쿵.
하나가 쓰러지자, 측면에서 들이치는 녀석이 있었다.
총 여덟 마리.
하나의 개체가 가진 힘도 만만치 않거늘 그 수가 여럿이라니.
대륙에 풀어 둔다면 단번에 생태계를 교란할 만큼 무지막지한 놈들이었다.
내게는 귀여운 수준이지만.
콰과과과광!
흩뿌려진 검기가 초승달의 형태로 쏘아진다. 검의 궤적을 따라 뿌려진 곡선의 검기가 순식간에 사위를 휩쓸었다.
“귀찮기는.”
할 일을 마친 뇌운검이 허리춤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검은 숲에 들어온 지도 어느새 이 주일.
나는 인간의 족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들어와 있었다.
몬스터에 대한 지식이 많지는 않지만, 지금껏 들어 본 적도 없는 형태의 것들도 많았다.
고작 용병들의 수준으로 정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특히 일대 서식지를 가진 지배종의 파괴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다면 인간에게는 재앙과 다르지 않을 거다.
그러니 조약을 통해 검은 숲에서만큼은 공동 대응을 하는 것이고.
가장 최근에 일어난 몬스터 웨이브는 300년 전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이제 다시 일어날 때도 됐지.
파밧.
주변을 정리한 나는, 높은 나무를 타고 그 정상에 올랐다.
일대가 모두 검은색 물결이었다.
마치 검은 수면 위에 올라선 듯하다.
저 멀리 높다랗게 솟은 산맥이 보인다.
그 가운데 가장 높게 선 봉우리, 드레어스.
거뭇한 구름에 잠겨 허리까지밖에 드러나지 않은 드레어스는, 발렌시아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다.
맑은 날에는 최초의 장벽에서도 보일 정도로 높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산에 가까이 가지 않고도 얼마나 높을지 가늠할 수 있었다.
만약 저 산의 정상에 오른다면 나는 그 산을 등반한 최초의 인간이 될 것이다.
그것을 떠벌릴 수는 없겠지만.
방향을 잡고 내려온 나는, 한편에 앉아 육포를 씹었다. 치즈가 곳곳에 박혀 풍미와 고소함을 더한 육포였다.
오늘은 이쯤에서 자리를 잡아야 할 듯하다.
새까만 밤이 밀려오고 있었다.
절그럭, 절그럭.
깊은 어둠 속에서 철제 갑옷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기사들이 움직일 때 나는 소음이다.
영혼체에 가까운 상태일 텐데도 그들은 생전에 입었던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크르르.”
모닥불 주위로 몰려드는 구울.
낮에 잡은 몬스터와 비슷한 형태의 구울도 있었고, 인간의 형상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살아생전 함께 움직이지 않았을 것들이 하나로 섞여 내게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잠시 신기하게 바라봤다.
내 의문은 하나.
어떻게 이곳에 인간 형상의 구울이 존재하느냐는 거다.
검은 숲의 밤은 죽은 자들을 깨운다.
하지만 죽은 자들을 이동시키지는 않는다.
즉, 구울은 죽은 자리에서 태어난다.
그런데 이곳은 아직 인간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 곳.
그럼에도 인간 형태의 구울이 있다.
물론 아주 오래전, 인간이 여기까지 밀고 들어왔던 시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갑옷의 형태를 보건대 그들은 현시대에나 입을 법한 갑옷을 입고 있다. 가슴팍에 새겨진 각각의 국기도 내가 모두 아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프렌치아의 국기를 품은 자들도 있다.
“너희들, 어디서 온 거냐?”
“크르르.”
답변은 당연히 돌아오지 않았다.
* * *
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
델론트 항구의 기다란 해안가를 타고 무수히 많은 함선이 정박해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는 병력들.
각 군단과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들이 하나의 목적 아래 모여들고 있었다.
“와아아-!”
델론트 항구의 시민들은 함선을 정비하러 온 제국의 군인들을 보며 크게 함성을 질렀다.
“크레본-! 크레본-!”
“프렌치아를 박살 내라-!”
델론트의 시민들은 제국의 패배를 가장 먼저 접했던 이들.
제국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무너뜨린 프렌치아를 향한 보복 심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무르익어 있었다.
“건방진 프렌치 새끼들! 이번에 확실히 짓밟아야 한다고!”
“그동안 우리 제국이 얼마나 도와줬는데, 배신을 하다니!”
“은혜를 모르는 미개한 족속이라니까!”
최근 마그네트를 수복하며 본인들이 독립된 자주국이라 선포한 프렌치아.
대부분의 제국민들은 그 행태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흰 사자를 믿고 그러는 것이겠지.”
“독을 사용한 걸 누가 모른다고!”
“제대로 복수해야지!”
또한 제국에는 무한의 속검이 독에 당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나돌고 있었다.
대륙 제일검이었던 제국의 자부심이 적국의 치졸한 수에 당해 목숨을 잃었다.
민심이 들끓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쯤 모두 집결하지?”
바르안의 조카이자, 알센도르가의 대표 기사단인 글리머 기사단의 단장 오호른 알센도르가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를 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소해를 건너 프렌치아를 향하고 있었다.
황제의 명으로 전장에서 가문으로 돌아가던 그는, 바르안 알센도르가 독에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사단을 이끌고 프렌치아 1차 원정대에 사령관으로 참여해 있었다.
“앞으로 일주일이면 모두 집결할 듯합니다.”
“일주일이라…….”
오호른은 조용히 남은 기간을 곱씹었다.
“지독히도 길게 남았군.”
자신의 우상이자 가문의 상징이었던 바르안의 죽음.
정당한 대결이어도 분이 차오를진대, 적은 독을 사용하는 치졸함을 보였다.
바르안 알센도르의 마지막을 더럽힌 흰 사자와 프렌치아를 그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한편 마그네트에서도 이 전장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서류에 둘러싸여 있던 루시안은 눈도 들지 않고 말했다.
“지금쯤 적들이 집결하고 있을 테지?”
“예. 마그네트에 도달한다면 그 병력이 20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레이크 또한 마찬가지로 서류에 뒤덮여 있었다. 덕분에 서로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수도를 수복한 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앞으로를 위해 준비해야 할 일도 많았다.
왕궁을 정비하고 일상을 회복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시간이었다.
거기에 이제 곧 적들이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확실히 황제의 대응이 빠릅니다. 저희의 움직임을 예측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제국은 마치 무한의 속검이 패배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프렌치아의 승리가 제국에 닿는 시간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대응은 기민했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어쩌면 무한의 속검의 존재는 그것을 위한 황제의 미끼일지도 몰랐다.
어째서 그만한 인물을 미끼로 던진 것인지 몰라도, 무한의 속검의 패배와 총독부의 패배로 황제는 이번 전쟁의 명분과 민심을 모두 얻었다.
단순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꽤 많았다.
“이제 모든 건 제네스에게 달려 있네.”
“네. 일주일 안에 하늘이 물들지 않는다면, 저희로서는 매우 힘든 싸움이 될 겁니다.”
“뭐 방법이 있나, 제네스를 믿는 수밖에. 하지만 만약 그럼에도 적이 쳐들어온다면?”
“그 경우도 확실히 대비하고 있습니다. 바라고 있지는 않지만요.”
실패를 가정하는 것은 책략의 기본.
하지만 그것을 제하더라도 이번에는 왠지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불안감이 든다.
적의 움직임이 그랬다.
프렌치아를 쉽사리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하나 그럼에도 루시안과 레이크의 기대는 대륙의 최북단을 향해 있었다.
적들이 어떻게 나오든, 일단 그 작전은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 * *
나는 가파른 경사를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
드레어스는 천마 놈이 있던 천산보다도 더 높을 듯했다. 산세가 높고 험했다. 그리고 검었다.
신기하게도 눈마저 까맣다.
바람이 불 때마다 검은 눈발이 휘날렸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환경.
그런데 가장 기이한 일은 산의 중턱에 올랐을 때 일어났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지금은 밤이 아니었다. 구울은 깨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들은 분명 살아 있는 이들이었다.
총 네 명의 사내.
한차례 동요가 일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네가 흰 사자인가.”
개중 한 녀석이 말을 걸어 왔다. 아무래도 나를 노리고 온 듯했다.
“어떻게 이곳에 왔지?”
“시끄럽게 구는데 못 찾을 수가 있나.”
하긴 몬스터를 베면서 왔다. 나를 찾고자 한다면 쉬이 찾을 수 있을 거였다.
하지만 내가 묻고자 한 바는 그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내가 이곳에 올 줄 알았는지.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일단 흰 사자라고 나를 물었다는 것에서 나는 제국을 쉬이 떠올렸다.
그리고 여기까지 검은 숲을 가로지를 수 있으려면 상당한 무력을 지녔을 터.
나는 손쉽게 그들의 정체를 유추했다.
“황제의 직속 친위대인가.”
“그래. 저스티스 소속이지.”
저스티스.
정의(正義)란 뜻을 품은 단어였다.
그들의 정의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는 모르겠다만 괘념치 않았다.
본래 정의란 자신이 선 쪽에 있으니까.
적의 정의는 궁금치 않았다.
나는 그보다 내 의문을 물었다.
“내가 이곳에 올 줄 어떻게 알았지?”
“놀랍나? 폐하께서는 모든 걸 알고 계신다.”
콧잔등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흉터가 꿈틀거렸다. 30대 중반의 남자였다. 아무래도 이자가 우두머리인 듯한데.
그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시대는 그분의 뜻대로 될 것이야.”
그 옆에 있는 이들도 모두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네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기세를 풀어냈다.
함께 선 자들 또한 살기를 피워 낸다.
그들의 기운이 수직으로 치솟아 올랐다. 밀려오는 마력의 파동이 상당했다.
쿠구구구궁!
주변의 지반이 흔들릴 정도로 막강한 기세.
나 또한 검을 쥐었다. 동시에 칼날 같은 기파가 일었다. 일대를 짓눌러 오던 적들의 기파가 깨끗하게 반으로 갈라진다.
그 후폭풍에 휩쓸린 눈발이 사납게 흔들렸다.
검은 먹이 사방으로 튀는 듯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들이치는 신형이 있었다.
콰앙-!
간격을 찰나에 삼키는 속도.
뿔뿔이 흩어지는 세 개의 신형 또한 내 눈에 잡혔다.
모두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속도를 가졌다.
테이난에서 베었던 두 녀석보다도 움직임이 좋았다. 하지만 그들 또한 벽을 넘지 못했음을 알았다. 전에 녀석들은 긴가민가했지만, 한 번 겪어 보니 쉬이 확신할 수 있었다.
솨아아악-!
적이 뿜어낸 빛줄기가 사선으로 떨어져 내린다.
나는 그에 맞서 단단히 검을 움켜쥐었다.
기예는 없을지언정 그 안에 담긴 힘은 진짜였다.
내 손끝에서 일순 섬광이 터져 나갔다.
콰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