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제174화 검은 숲 (1)
어느새 기다랗게 펼쳐진 최초의 벽이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고개를 들어야 그 끝이 담길 정도로 높은 벽.
겉으로 봤을 때는 평범한 성벽이었다.
보통의 성벽과 달리 좌우로 끝없이 뻗어 있다는 게 다를 뿐.
“용병패 확인하겠습니다.”
도착하자, 마부가 용병패를 걷어 갔다.
용병패는 검은 숲으로 향할 수 있는 통행권이나 다름없었다.
검은 숲은 위험한 만큼 큰돈이 되기에 호기롭게 도전하는 이들이 많았다. 검은 숲은 실력이 인증된 이들만이 갈 수 있었다.
잠시 후, 용병패에는 하나의 작은 낙인이 찍혀서 돌아왔다.
숲 형태의 작은 낙인.
이것 때문에 내가 마차를 타고 고생을 했다.
다그닥, 다그닥.
마차는 다시 내부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벽 너머에는 캠프가 지어져 있었다.
용병들의 휴식처이자 물품과 식량을 구매할 수 있는 작은 도시였다.
“그럼 건투를 빕니다.”
마부의 인사와 함께 나는 홀가분한 몸이 되었다.
눈앞에는 시끌벅적한 시장 바닥이 펼쳐져 있었다.
“장구류 보고 가세요!”
“의료구 보고 가세요!”
“맛 좋은 치즈육포 있습니다!”
호객 행위가 전장을 불사했다.
이곳에는 은행이 없다.
때문에 현금이 돌지 않는다.
용병패의 낙인이 돈을 대신했다.
무려 모두 공짜다.
최초의 벽은 몬스터를 막는 최초의 성벽이고 그 안쪽의 공략대는 인류를 위해 싸우는 자들과 다름이 없었다. 그것에 사명감을 갖는 이가 없어도 그랬다.
여기서 소비되는 모든 것들의 비용은 대륙의 국가들이 나눠 분담한다.
정확히는 후원을 받는 것이고, 자금 관리는 아르에리아에서 맡고 있다.
때문에, 호객 행위가 이리도 많다.
무료이기 때문에 구매자들의 마음이 활짝 열려 있으니, 일단 뭐라도 손에 쥐여 주자는 수작이었다.
이 캠프는 용병들의 낙원이라고도 불렸다.
“흠.”
나 또한 신중하게 그 낙원을 즐겼다.
먼 길을 떠나야 했다.
일단 가장 먼저 구비해야 할 건 식량.
환골탈태를 거친 이후 생체적인 부분 또한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벗어난 나였다.
한서불침은 물론, 만독불침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한 달은 거뜬히 버틸 수 있었다.
“치즈육포, 최고급으로.”
그래도 입이 심심한 건 못 참지.
“거기 비스킷도. 건빵도 괜찮아 보이는군.”
나는 먹을 것 위주로 짐을 꾸렸다. 침낭을 비롯한 각종 여행 장비도 가장 고급진 걸로 구입했다. 어딜 가나 기본인 의식주는 최대한 신경 써야 한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건 이미 아르에리아에서 처분했다.
대략적인 물품을 구매한 나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용병들뿐이었다.
길바닥에서 칼날을 가는 이들도 있었고, 벌써부터 술주정을 부리는 이들도 있었다.
‘개판이군.’
한눈에 보자면 그랬다.
사냥을 앞두고 결연한 이들부터 휴식을 취하는 이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만난 출구.
이제 용병들의 낙원은 끝이었다.
“어이 꼬맹이, 혼자 가려고?”
“푸흐흐, 겁도 없고만. 뒈져 봐야 정신 차리려나?”
“우리 파티로 오지. 그럼 밤낮없이 잘해 줄 텐데 말이야. 크하하.”
입구에는 파티를 구하는 용병들이 모여 있었다.
검은 숲을 홀로 토벌하기는 어려우니 삼삼오오 모여 팀을 이루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조롱을 무시한 채 입구를 넘었다.
목책 바깥으로는 짧은 평야가 이어지고, 그 너머로 먹을 집어삼킨 것처럼 새까만 숲이 펼쳐져 있었다.
환한 빛이 떨어지는 낮임에도 그랬다.
밤하늘이 땅 위로 내려온 듯했다.
눈앞에 깔린 어둠이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파밧.
나는 바닥을 박차며 빠르게 나아갔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광풍이 되어 단숨에 흘러갔다.
빠르게 확대되는 검은 숲.
이제부터는 용병들의 지옥이다.
스스스슥.
검은 숲이 가까이 다가오자 불온한 바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지독한 마기로 물들어 있는 땅.
확실히 마나의 질부터 끈적하고 불온했다.
대기가 습기를 머금은 듯하다.
불쾌감이 솟아오른달까.
북부 용병들의 인성이 유독 거친 데에는 이곳의 환경도 크게 작용할 거라 믿었다.
‘온통 새까맣군.’
숲 내부에 발을 디디자마자 든 감상이었다.
무채색의 이모텔섬이 떠올랐지만, 그때와는 또 달랐다.
그때의 숲은 색이 없는 느낌이었다면, 이곳은 온통 칠흑으로 칠해진 느낌이다.
풀잎부터 나무줄기, 바닥, 돌까지 모든 것이 새까맣다 보니 깊이감이 안 느껴질 정도였다.
그림자와 명암의 구분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 보니 사물의 입체감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확실히 기묘한 경관이었다.
쿵!
나는 감상에 젖기보다 앞으로 나아갔다. 흐릿한 신형이 거뭇한 숲을 가로지른다. 깊이감이 잘 느껴지지 않아 속도를 내기 번거롭기는 했으나, 문제는 없었다.
내 목적지는 이 검은 숲의 심처.
갈 길이 멀었다.
측면에서 거뭇한 무언가가 튀어나온 건 그때였다.
파밧!
내가 달리는 속도에 맞춰 뛰어오르는 무언가.
번쩍!
일순 섬광이 흩뿌려지고, 그것에 갈라진 몸체에서 핏물이 뿜어지기도 전에 나는 그것을 지나쳤다.
푸확-!
핏물은 내 뒤편에서 터져 나갔다.
숲 내부로 어느 정도 들어오자 슬슬 몬스터들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아직은 드문드문 널따랗게 펼쳐진 모양새.
용병들이 계속해서 토벌하고 있는 덕에 초입에 있는 몬스터의 숫자는 적었다.
지금 이 속도로도 이틀은 나아가야 본격적으로 몬스터와 인간의 치열한 전장이 펼쳐질 거다.
파바밧!
나는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주변의 풍경이 하나의 풍경으로 뭉뚱그려져 지나간다.
간혹 앞을 막아 오거나 거치적거리는 놈들이 있었으나, 가볍게 베어 내고 나아갔다.
숲이 깊어질수록 나아가는 속도는 느려질 터였다.
초반에 최대한 빠르게 시간을 단축해 놔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점차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새까만 어둠이 안 그래도 검은 숲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마치 칠흑에 잠긴 기분.
그래도 낮에는 빛이라도 들었는데, 지금은 아예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새까만 어둠이 내 존재마저 삼키는 듯했다.
세상에 나 홀로 덩그러니 서 있는 기분.
보통의 인간이라면 눈을 감은 것과 뜬 것이 다르지 않을 터였다.
그만큼 어둠이 짙었다.
이것이 용병들이 팀을 꾸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무리 지어 움직이지 않는다면 웬만한 자들은 이 칠흑 속에서 전해지는 심리적인 압박감을 버티기도 쉽지 않을 거였다.
물론, 이 어둠 속에 도사린 위협은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지만.
타닥, 타닥.
모닥불이 타올랐다.
빛이 작은 공간을 만들어 냈지만, 여전히 세상은 칠흑에 잠겨 있었다.
스스스스.
스산한 귀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검은 숲의 밤은 깊다.
까맣게 잠긴 세계.
용병들의 지옥이라 불리는 이곳.
단순히 세상이 어둠에 잠겨 있어서, 몬스터가 득실거려서 이 숲을 지옥이라 부르는 건 아니다.
검은 숲이 용병들의 지옥이라 불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절그럭. 터덕.
모닥불 주변으로 옅은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어어어.”
그것들의 울음이 들렸다.
마치 구원을 바라는 듯한 포효.
나는 보지 않고도 그들의 위치와 형태를 대강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다가오는 기척과 그들이 내는 소리의 질감이 뭉쳐지며 여럿의 개체를 머릿속에 그려 낸다.
“크어어!”
포효하며 수풀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무언가.
빛의 공간 안으로 몸을 집어넣는 그림자가 있었다.
나는 그제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번-쩍!
일순 새하얀 섬광이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가시처럼 날카로운 궤적이었다.
퍼서서석!
그것에 꿰뚫린 것들이 검은 재 가루로 흩어지며 주변에 날린다.
“그어어.”
하나, 그 수는 여전히 많았다.
나는 주변을 둘러 오는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각각의 형상은 달랐다.
몬스터의 모습을 한 것도 있었고, 사람의 형상을 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같다.
이들은 이미 죽은 존재들이란 점이다.
고농도로 농축된 마기.
밤에 더욱 농도를 높이는 마기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강제로 깨운다.
구울이라 불리는 이것들은, 실체와 허상 그 사이에 놓인 이들이었다.
산 자들은 숨고, 죽은 자들이 활보하는 세상.
그것이 검은 숲의 밤이었다.
“크아악!”
비명과 함께 달려드는 녀석들.
일대에 나밖에 없어 그런지 개체수가 스물을 넘어갔다.
물론, 내게는 가벼운 것들이었다.
섬광이 어둠 속을 가르며 날린다.
그 빛줄기의 끄트머리에서 검은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구울들.
장내가 정리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
어느새 어둠은 짙은 고요를 되찾아 있었다.
시체마저 남기지 않는 이들은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마치 잠깐의 꿈을 꾼 것처럼.
나는 그제야 잠시 눈을 붙였다.
그렇게 첫날의 밤이 지나고, 나는 새벽녘부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어느새 나는 용병들이 밀집된 전장까지 금세 도달해 있었다.
콰과과광!
저편에서 폭발음이 들려온다.
땅이 옅게 진동하고 있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전장이 벌어진 듯했다.
“죽여-!”
“피해라!”
“키아악!”
“후방이야!”
귀를 기울이자 저 멀리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고함과 몬스터들의 포효가 뒤섞여 있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를 들어 보니 아무래도 넓은 반경에서 전장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이 개같은 X끼들이!”
“끄악-!”
나는 그 뒤섞인 소리를 따라갔다.
잠시 후, 바닥에 깔린 몬스터의 사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오크 무리였다.
하나, 생김새는 좀 달랐다.
대륙 내부에 있는 오크보다 몸집도 머리통 하나가 더 크고 아래턱에서 솟은 송곳니도 커다랬다.
그리고 가장 큰 차이는 피부색이 검은색이라는 점이다.
한눈에 봐도 강인해 보이는 인상.
대륙에 산재하는 오크는 이들에 비하면 순한 양과 다름이 없다.
나는 전장을 향해 나아갔다.
정확히는 나아가는 길 앞에 전장이 펼쳐져 있었다.
“꾸에엑!”
금세 도착한 전장.
상황을 보니 승기는 기울어 있었다.
용병들이 오크 떼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오크들은 흉포했지만, 용병들은 꽤 잘 대응하고 있었다.
“쿠와아앙!”
그때,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포효가 있었다.
시끄럽던 전장이 일순 고요해질 정도의 박력.
그 묵직한 포효에 용병들의 몸이 굳는다.
“……X발.”
“아무래도 퇴각해야 할 거 같은데.”
쿵! 쿵! 쿵!
이내 사방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묵직하고 빠르다.
그 소리만 들어도 다가오는 몬스터의 강맹함을 알 수 있었다.
콰아앙-!
뒤편의 나무를 찢으며 등장하는 녀석들.
소의 머리통을 어깨 위에 얹은, 체고가 3m를 훌쩍 넘는 몬스터.
미노타우로스.
그것들이 거대한 배틀 액스를 꼬나쥐고 달려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크 쪽 주술사가 그들을 조종하고 있는 듯했다. 소 대가리들에게는 무기를 만들 지능이 없으니까.
“이, 이런 빌어먹을! 전열 단단히 유지해!”
경력이 있는 용병들이 고함을 치며 전열을 정비해 갔다.
검은 미노타우로스가 무려 여섯 마리.
그들이 묵직하게 휘두르는 배틀 액스는 일대의 용병들이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그때 한 녀석이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보며 소리쳤다.
“병X 새끼야, 뭐 해! 뒈지고 싶어!”
사색에 질린 채 고함치는 녀석.
말본새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내 목숨을 챙기기 위해 한 말이니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고 나는 미노타우로스에게 나아갔다.
갈 길이 멀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고.
천령신공 검법편.
한빙의 장(章) 빙해(氷海).
칼날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북부의 서늘한 공기마저 차갑게 얼려 버리는 지독한 한기.
그것이 일대를 단숨에 가르며 쏘아진다.
살이 에일 것 같은 한기를 품은 검기가 미노타우로스의 거대한 몸뚱이를 찰나에 조각내며 흩어졌다.
그 궤적을 따라 얼음 결정들이 날린다.
검은 숲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얼음 결정들은 더욱 신비한 맛이 있었다.
“……뭐, 뭐야?”
일대를 단번에 휩쓸어 버리는 검격.
뒤편에서 허무하게 흩어지는 용병들의 음성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나아갔다.
이제 평온한 길은 끝났다.
앞으로는 계속해서 치열한 전장이 이어질 거였다.
낮에는 몬스터가, 밤에는 죽은 것들이 길을 막아 올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