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제171화 나라를 위하는 국민 (7)
두두두두!
말을 탄 기마병들이 무너진 성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는 적들의 화살이 소나기처럼 우수수 쏟아졌다. 한 손으로 쥔 방패가 우산처럼 머리 위에 올라 있었다.
방패 아래로 드러난 드라칸의 시선은 적의 성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멍이 난 자리를 조악하게 메워 둔 상황.
꽈악.
드라칸이 창대를 세게 움켜쥐었다.
앞에 늘어선 적들이 보인다.
성문을 지킬 시간을 벌기 위해 앞으로 나선 병력들.
병력의 벽은 두껍지 않았다.
그대로 뚫는다.
콰과과과과과!
쐐기꼴의 전력이 단숨에 적의 전열을 짓뭉개며 들어갔다.
성문이 이제 코앞이었다.
종횡으로 그어지던 창격이 뒤쪽으로 당겨지며 응축된 뒤, 폭발하듯 앞으로 내밀어진다.
어둠을 가르는 묵빛 섬광.
그것이 회전하며 점을 찍는다.
콰아아아앙!
조악한 성문이 박살 나며 터졌다.
분수처럼 터지는 잔해 사이를 드라칸은 나아갔다.
성문 안쪽에도 병력들이 빽빽하게 전열을 이루고 있었다.
성문을 통과한 기병들은 물살이 터지듯 방사형으로 산개하며 그 전열을 향해 달려들었다.
두 개의 전열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콰과과과과광!
적진을 그대로 밀고 들어가는 기마병들.
그들은 그저 앞만 보고 적진을 내달렸다.
드라칸은 그 선두에 있었다.
그들을 따라 뻥 뚫린 성문으로는 계속해서 병사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성벽과 일대를 빠르게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적들은 계속해서 물러났다.
드라칸의 창이 검은 선을 그리며 그어진다.
그 궤적에 걸린 적의 목이 날아올랐다.
그의 왼쪽 어깨 위로 솟아 있는 화살이 보였다. 화살은 그의 가슴팍에도 꽂혀 있었다. 드라칸은 몸에 화살을 박은 채로 적진을 휘저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그는 악귀와 달라 보이지 않았다.
“크아악-!”
그가 지나는 길 위로 적들의 비명이 깔린다. 그의 창은 그 어느 때보다 강맹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 제국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기습의 이점으로 동문을 장악할 수는 있었으나, 곧 추가 병력이 몰려들 터였다.
“바리케이드를 점령하라-!”
드라칸이 아군을 향해 소리쳤다.
성문을 폐쇄하기 위해 적들이 만들어 놓은 바리케이드.
드라칸은 적들의 지원군이 완전히 충원되기 전에 그곳을 장악할 생각이었다.
동문으로 오는 길목들을 장악한다면 일대에 방어진을 구축할 수 있을 터.
자신들은 동문 일대를 장악한 뒤 농성으로 전장을 바꿀 생각이었다.
적들은 아직 내성이 침탈당한지 모르는 상황.
오늘 밤만 버텨 내면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다.
“빨리 움직여라-!”
“적이 오고 있다-!”
적들을 베어 내는 동시에 바쁘게 움직이는 독립군들.
그들은 빠르게 바리케이드를 점령해 갔다.
적들은 힘없이 무너졌다.
성문이 뚫렸을 때부터 그들은 이미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그들과 독립군은 전장에 임하는 각오 자체가 달랐다.
독립군들에게 수도 마그네트는 그야말로 꿈의 공간.
안 그래도 독립을 위해 제 목숨을 불태우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눈앞에 선명한 목표가 있었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죽음을 보지 않는다.
독립군들은 죽어 나가면서도 적들의 숨통을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드라칸 또한 그 열기에 심장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물살에 휩쓸리듯, 동료들이 뿜어내는 열기에 함께 타올랐다.
지금껏 드라칸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싸워 왔다.
그렇기에 독립을 중요치 않게 생각했다.
독립을 이룬다고 해서 삶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뜨겁게 타오르는 열망은, 그 이후에 맞이할 모든 것들을 부정했다.
그것을 보지 않게 하고, 오직 눈앞의 승리만을 감각케 했다.
이후의 삶이 무엇이 중요하랴.
적이 눈앞에 있고.
넘어야 할 산이 앞에 놓여 있다.
그러니,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에게는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다.
* * *
“젠장! 젠장!”
아르멜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빠르게 전장을 피해 가고 있었다.
“이 자식들이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이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외성도 뚫리지 않았는데, 적이 어떻게 총독부 내성에서 쏟아져 나온단 말인가.
“총독저에 비밀 통로가 있었나 봅니다. 어서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총독이다! 이쪽에 총독이 있다!”
다급히 빠져나가는 그를 본 독립군들이 소리치며 몰려들었고, 기사들이 나서서 그들을 막아 냈다.
“막아라-! 적들을 막아!”
그런 이들의 앞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가시나. 가는 길을 붙잡지는 않겠네만, 목은 내놓고 가야겠는데. 통행료가 조금 비싸서 말이야.”
씨익 웃으며 농담 따먹기를 하는 남자.
그 가벼운 태도와 달리 주변을 장악해 오는 서늘한 기파에 기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르멜 또한 본인의 검을 쥐었다.
“이 개같은 X끼가 감히 여기가 어디-.”
콰과과광-!
그의 말을 자르며 시작되는 전장.
앞을 막고 있던 기사들이 녹빛 섬광에 집어삼켜지며 붉은 핏물을 뿜어낸다.
단숨에 기사들을 도륙하는 네더만을 보며 아르멜은 마른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깊게 꿀렁였다.
앞을 지키던 기사들이 순식간에 쓸려 나간다.
적은 어느새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죽음을 직감한 그는 검을 꽈악 움켜잡았다.
“하압-!”
기합과 함께 들이치는 검격.
네더만은 총독의 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할렌트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검이었다.
적의 검이 떨어져 내린다. 그의 전력일 터였다.
일순, 네더만은 검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손끝에서 뻗어 나가는 섬광.
사선으로 떨어지는 궤적을 꿰뚫고 쏘아지는 선뜩한 빛줄기가 있었다.
촤악-!
그 궤적이 아르멜의 머리통을 치고 지나갔다.
분리된 총독의 머리통이 높이 치솟았다가 바닥에 떨어져 데구루루 굴렀다.
“총독이 쓰러졌다-!”
“총독의 목을 베었다-!”
그것을 본 독립군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적들의 사기는 어디선가 끊임없이 밀려드는 독립군 탓에 이미 바닥이었다. 독립군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곳은 총독부의 본진.
안방이 뚫렸다는 것과 총독마저 사망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검이 품고 있는 예기를 무디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렇다고 제국군이 쉽사리 물러선 것은 아니었다.
“반드시 막아야 한다! 퇴로는 없다!”
“적들의 수가 많지 않아!”
지휘관들은 끊임없이 병사들을 독려하며 방어선을 유지하려 했다.
총독부를 내주면 전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불 보듯 뻔했다.
서로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전장.
하나 전장의 향방은 가파르게 기울어져 갔다.
마지막으로 그 전장에 도착한 루시안은, 완전히 점령한 총독저에서 전체적인 상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장의 소리는 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독립군들은 흰 사자가 넘었던 다섯 개의 성문을 거꾸로 뚫고 있었다.
총독부의 성벽은 안에서 밀어닥치는 병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병력과 병력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전장이 지속됐다.
정원에는 아군과 적군의 시체가 하나로 뒤섞여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광경을 루시안은 그저 묵묵히 바라보았다.
지난한 세월을 지나 이곳에 왔음에도.
수도, 마그네트의 수복의 꿈이 눈앞에 왔음에도.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흐르고 있음에도.
그는 조금의 미소도 짓지 않았다.
그저, 전장을 바라볼 뿐.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고 있었다.
“후아.”
적을 반으로 쪼갠 리포드는 허리를 펴며 숨을 돌렸다.
아군과 제국군이 뒤섞인 그 전장 속에서 리포드는 진한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10년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제국군이 왕성의 성문을 뚫고 들어왔던 그날.
리포드는 그때도 이 성에서 검을 휘두르며 제국군을 베어 갔다.
지금처럼 일대가 불타오르고 있었고, 적들은 끊임없이 밀려왔었다.
그리고 그때도 그는, 온몸에 핏물을 뒤집어쓴 채 제국군을 베어 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리포드는 운이 좋게도 그 전장에서 살아남았다. 목숨을 온전히 보전한 채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멀찍이서 불타오르는 왕궁을 보았었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마그네트를 뒤로하고 도망쳤다.
그렇게 10년.
리포드는 다시 이 자리에 섰다.
오랜 시간을 달려서, 꿈에 그리던 그 순간에 앞에 서 있었다.
안개처럼 자욱했던 그 순간이 선명히 눈앞에 있었다.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여기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랬다.
독립을 바라는 자라면, 모두 꿈에나 그려 봤을 일이었다.
총독부를 끝장내는 것.
지금껏 프렌치아의 검은 하늘이었던 총독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밤이 가고 태양이 떠오른다.
전장은 점차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결과는.
“우와아아아-!”
독립군의 승리였다.
곳곳에서 들리는 함성은 모두 아군의 것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총독부 내성의 하늘에, 프렌치아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 * *
이리엘은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을 걷고 있었다.
곰팡이 특유의 퀴퀴한 냄새와 혈향이 뒤섞인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의 문 앞에 섰다.
내려오기 전 만난 간수에게서 알렌의 위치를 확인한 확인했기 때문이다.
쿵! 끼이이익.
낡은 철문이 열리며 하나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런 인기척에 잔뜩 움츠러드는 형체. 그 흐릿한 실루엣만으로도 이리엘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알렌 형님!”
물기 어린 목소리가 옅게 흩어졌다.
웅크린 채 바르르 떨던 알렌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이, 이리엘?”
“흐아아앙!”
이리엘은 눈물을 터트리며 알렌에게 달려들었다.
“컥! 컥! 나 죽어!”
“아, 죄송해요…….”
이리엘은 그제야 알렌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옷은 넝마가 되어 있었고 핏물이 잔뜩 번져 있었다. 이리엘은 잔혹한 고문의 흔적을 보며 입을 가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고작 한나절 만에 사람이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이 정도쯤이야 괜찮아.”
알렌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명을 지른 탓에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갈라져 있었다.
“형님 목소리가 Dr. 주르하 같아요.”
“파핫. 웃기지 마.”
알렌은 이리엘의 농담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심정을 알기 때문이다.
“제국 놈들 별거 아니던데. 고문이 아주 간지럽더라고.”
“허세 부리지 말아요.”
“진짜야.”
“우선 치료부터 해야겠어요!”
알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마음 깊숙이 번졌다.
“내가 이야기꾼이지만 말이야…….”
알렌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 자식들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다고. 크흐흐.”
승리의 웃음을 던졌다.
“그럼요. 다 알죠.”
모든 작전을 알고 있었던 알렌이었다.
하나, 적들은 그저 시위의 주동자로만 알고 있어 다행이었다. 만약 알렌이 독립군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걸 알았다면 이 정도로 그치지 않았을 터였다.
“우와아아-!”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독립군의 함성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승리의 함성이었다.
좁다랗게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오자, 태양 빛에 드러난 전경이 보였다.
바닥에 널린 시체들은 제국군과 독립군을 가리지 않았지만, 살아남아 함성을 지르는 이들은 모두 독립군이었다.
“끝났나 봐요.”
이리엘이 그 광경을 보며 말했다.
알렌 또한 물기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러게. 이겼나 보네.”
“저기 봐요.”
이리엘의 손끝은 하늘에서 펄럭이는 프렌치아 국기를 가리키고 있었다.
알렌은 그것을 보며 입술을 꾹 물었다.
생살이 뜯기던 끔찍한 순간, 하루가 1년처럼 길었다.
만약 독립군이 곧 내성을 점령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면, 버텨 낼 수 있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언젠가 제국군에 붙잡혀 온몸이 넝마가 될 수도 있다고는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
알렌은 두려웠다. 무서웠고 고통스러웠다.
정말이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순간들.
하나, 그 끝에서 마주한 이 순간은 알렌의 모든 상처를 씻어 내려 주고 있었다.
크게 울리는 심장의 박동이 귓가에 닿는다.
두 번째였다.
이 하늘에 프렌치아 국기가 걸린 것은.
하지만 느낌이 다르다.
지난번이 잠시 꿈을 엿본 느낌이라면, 지금은 꿈이 현실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 내가 이것을 위해…….’
지금까지 겪어 온 삶의 굴곡이 의미를 품기 시작한다.
자신을 이 자리에 올려놓은 모든 선택과 순간들이 지금의 결과로 인해 커다란 힘을 가지는 듯했다.
알렌은 자신이 바라던 결말에 한 발짝 다가선 기분을 느꼈다.
알렌 혼자만이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승리를 만끽하는 이들 모두 그랬다.
항상 미래에만 존재하던 독립이 현실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드높은 장벽이 허물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 모든 벽이 무너졌을 때.
그들은 독립, 그 너머의 새로운 내일을 볼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