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제168화 나라를 위하는 국민 (4)
다수의 병력이 독립군이 진군하고 있는 남문으로 지원을 갔지만, 여전히 동문의 성벽에도 많은 병력들이 모여 있었다.
확실히 독립군이 성벽 너머에 주둔하고 있다 보니 늦은 새벽임에도 경계가 단단했다.
“여전히 삼엄하기는 하네.”
네더만이 말했다. 그 옆으로는 리포드와 이리엘도 함께였다.
“얼른 부수고 알렌 형님이나 구하러 가죠.”
이리엘이 눈동자에 의지를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우리가 먼저 뒈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하나도 안 하나 본데.”
그런 이리엘을 보며 리포드가 네더만에게 속삭였다. 그의 말대로 작전이 실패하면 뒤는 없었다. 네더만이 씩 웃으며 사기를 돋우었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야지. 그 자식이 돌아왔을 때 알렌이 없으면 누가 그 성깔을 받겠어.”
그 일을 할 사람은 알렌밖에 없었다. 리포드의 눈빛에서도 금세 의지가 타올랐다.
“한번 제대로 해 봅시다.”
제네스의 성깔은 그도 충분히 경험한 터였다.
“알렌을 그리 둘 수는 없지.”
네더만이 픽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각자의 역할에 몰입 한번 해 보자고, 마법사 친구들.”
네더만이 앞장서자 휘황한 로브를 걸친 이리엘과 리포드가 그 뒤를 따랐다.
앞으로 얼마 걷지 않아, 성문으로 향하는 길목을 막고 세워진 바리케이드가 보였다.
바리케이드는 도심을 향하고 있었다.
현재 마그네트는 성문을 닫고 완전히 봉쇄된 지 2주가 지나고 있었다.
병사들이 아니라면 성벽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바리케이드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사나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멈춰라!”
네더만은 곧장 양손을 들어 올리며 적의가 없음을 알렸다. 그는 블랙 드래곤이 그려진 총독부 경비대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수고들이 참으로 많네. 밤이라 눈이 어두운가 본데, 내 갑옷을 잘 봐 주시게. 보다시피 같은 편일세. 우리는 마법부에서 나왔다네.”
“마법부?”
경비병들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네더만은 뒤편에 선 일행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누가 봐도 마법사 같은 복장 아닌가. 이분들은 마법부 소속 마법사이시고, 나는 길 안내 겸 호위를 맡고 있지.”
“마법부에서 이 시간에 무슨 용무요. 여기는 지나갈 수 없소. 성문이 폐쇄된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닐 테고.”
“허어. 성문이 폐쇄된 것쯤은 마그네트 사람이라면 지나가던 세 살배기 애도 다 알고 있을 걸세. 우리가 갓난쟁이보다 못해 보이는가.”
“용무나 밝히시오!”
“성격이 급한 친구군. 우리는 성문을 강화하기 위해 왔다네.”
네더만은 경비병이 말하기 전에 재빨리 말을 보탰다.
“자, 이거는 급히 작성된 공문일세. 자네가 감당할 사안이 아니니, 어서 현 상황을 지휘하고 있는 지휘관이나 불러오게. 한시가 급한 일이라고.”
네더만은 그들에게 위조한 공문을 보여 주었다. 하나, 병사들이 봐야 무엇을 알겠나. 그들에게는 그것에 진위를 파악할 능력이 없었다. 물론, 지휘관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철저히 위조하여 만든 가짜 공문이었으니까.
경계 어린 태도로 공문을 받아 든 병사는 대충 훑어보는 척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았네. 일단 길은 비키지. 한시가 급한 일이라, 바로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네.”
“일단 확인이 먼저입니다.”
“허어, 이리 융통성 없는 친구를 보았나. 우리가 그사이 성문이라도 뚫고 나갈까 봐? 한시라도 빨리 성문을 강화해야 할 게 아닌가. 흰 사자라도 들이닥치면 어쩌려고. 총독 각하께서 직접 하명하신 일일세. 지금 우리 총독 각하께서는 흰 사자가 두려워 밤에도 이불을 꽁꽁 싸매고 주무시고 계시다고. 그 얘기도 못 들었나.”
“하, 하지만.”
“어허, 한시가 급하다니까. 흰 사자가 성문을 뚫고 와야 정신을 차릴 텐가. 그 자식이 총독부의 성문을 얼마나 빨리 뚫었는지 몰라? 성문을 추가로 강화하라는 명령일세. 독립군이 코앞에 집결해 있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입술을 물며 잠시 고민하던 경계병들은 일단 바리케이드를 열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한 명이 길 안내를 자처하고, 나머지 한 명이 지휘관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또 다른 병사들이 메웠다.
“고맙군. 융통성이 있는 친구들이라 다행이구만.”
네더만이 경계병들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해 주었다. 그 여유로운 태도에 이리엘과 리포드는 혀를 내둘렀다. 거짓말을 어찌 저렇게 술술 내뱉는지.
그 덕분에 그들은 손쉽게 성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눈앞으로 거대한 성문이 위용을 드러냈다. 굳게 닫힌 성문은 활짝 열려 있을 때보다 더욱 단단해 보였다.
그저 보기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마그네트 외성의 성문은 그 두꺼움의 격이 달랐다.
총독부 내성과 비교해도 2배는 거대한 데다, 성문의 내부에는 강철 심이 종횡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거기에 보안 마법까지 더한다면, 아무리 제네스라도 단번에 뚫을 수는 없을 거라 여겨졌다.
“그럼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리엘과 리포드는 곧장 임무에 착수했다. 둘은 마법 주머니에서 기다란 사다리를 비롯한 여러 장비를 꺼내 들었다.
마법진을 새기는 데 축이 되어 줄 원뿔 형태의 아티팩트와 마력의 축적을 위한 마석들.
그 외 보조 도구들을 꺼내는 이들의 모습은 진짜 마법사 못지않게 능숙했다.
별것 아닌 거 같아도 그동안 밤잠을 아껴 가며 연습한 일련의 행위들이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럴듯해 보였다.
“잠시 멈추시오!”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등장한 건, 이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려는 시점이었다.
“성문을 강화하러 오셨다고.”
네더만은 계속하라는 손짓을 하고는 그를 막아섰다.
“그렇소.”
상대의 계급은 중령이었다. 네더만도 설렁설렁 대할 수는 없었다. 경비대장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일행을 훑었다.
“왜 갑자기 성문을 강화한다는 거요. 이미 보수는 진즉에 끝났을 텐데.”
공문을 확인했지만, 의구심을 지울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성문 보안 마법의 강화와 보수는 진즉에 끝낸 상태였다. 무한의 속검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총독은 부랴부랴 외성의 성문부터 강화 작업에 들어갔으니까.
이미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단단하게 만든 성문이었다. 제아무리 흰 사자라도 이것을 뚫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고를 들여야 할 터.
그런데 또 보수 작업을 하겠다니.
게다가 일언반구도 없이 이 시각에 작업을 한다고 하니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총독 각하께서 직접 하명한 일이니, 난들 알겠소. 나도 고달파 죽겠다고. 마누라를 끌어안고 있을 시간에 이게 무슨 일인지.”
“지금 당장 성문을 열 수 없는 건 알고 있을 것 아니오.”
그리고 또 하나 의심스러운 점은, 성문 보수는 대부분 바깥에서 이루어진다는 거다. 적들의 공격이 닿는 면적에 마력 흡수 장치를 설치하여 충격을 흩트리는 것이 강화 마법의 기본 원리 중 하나였다.
하나, 지금은 적이 코앞에 있는 상황.
바깥에서의 작업이 가능할 리 없었다.
“하. 이거 경비대에는 우리를 뭐 갓난쟁이로 아는 이들밖에 없단 말이오? 이분들 얼굴을 잘 보시오. 믿음직스러운 마법사로 보이지 않소? 우리가 그것도 모르고 왔을까 봐.”
네더만은 그가 말을 잇기도 전에 술술 입을 놀렸다.
“이번 성문 강화 작업은 내부에서 진행할 것이니, 걱정 마쇼.”
“내부에서 말이오?”
“마법 역학에 대해 또 설명을 드려야겠구만.”
네더만의 말에 이리엘이 벌떡 일어났다.
“지금까지 진행한 성문 강화가 외부에서 전해지는 힘을 상쇄하고 흡수하는 형태의 마법이었다면, 이번 보수 작업은 그 힘을 바깥으로 밀어내기 위한 작업으로.”
이리엘은 달달 외운 정보를 그저 달달 외운 그대로 나불거렸다. 경비대장은, 이리엘 또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단 알겠소.”
“걱정 말고 편히 주무시고 계시오.”
경비대장이 물러서자 이리엘과 리포드는 성문 위로 아티팩트를 이용한 마법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에게 설명한 강화 마법은 아니었고, 폭발이 가능한 아티팩트였다.
화력이 협곡에서 토성을 폭파시켰던 것보다 몇 배는 강력한 아티팩트였다.
보안 마법이 중첩된 성문이 단단하다고는 하나, 그것은 외부의 충격에 대해서였다. 내부에서의 강한 폭발은 오히려 마력 회로를 혼선되게 해 더욱 강한 폭발을 만들어 낸다.
즉, 이 정도 폭발력으로도 성문을 날려 버릴 수 있다는 의미다.
“작업 시간은 얼마나 예상하시오.”
“족히 4시간은 걸릴 거요.”
대신 작업 시간이 길었지만.
마법진을 구축하고 폭발에 담길 마력이 비축되어야 하는 탓이다.
“그러니 다들 일들 보고 계시오.”
네더만은 손을 휘휘 젓고는 한쪽에 앉았다.
우선 걸음을 물린 경비대장, 보르브는 기민한 병사 몇을 뽑아 총독부로 보냈다.
일련의 상황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철저한 확인이 필요했다.
말을 탄 병사가 내성을 향해 재빠르게 달려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깜박 잠에 들었던 보르브는 다급한 말발굽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경비대장님-!”
다급히 들어온 병사.
그는 조금 아까 자신이 총독부로 보냈던 이가 분명했다.
따로 어떻게 되었는지 묻지 않아도 녀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갑옷에 피 칠갑까지 한 채, 화살이 어깨에 박혀 있었다.
“어찌 된 일이냐!”
“돌아오는 길에 습격을 받았습니다. 저만 간신히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저들을 당장 멈추게 해야 합니다! 총독부에서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이-!”
보르브가 벌떡 일어났다.
예감이 좋지 않아 병사 여럿을 보낸 게 다행이었다.
남은 이들은 모두 죽은 듯했다.
그는 부리나케 검을 챙겨 경비대를 나서며 부하 몇을 불러 말했다.
“병사들을 집결하도록 하라. 적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움직여야 할 것이야.”
그는 일단 병사 몇몇만 데리고 순시를 돌듯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마법사라고 했다.
사실을 알지 못한 척, 간격을 최대한 좁혀 마법에 대비해야 했다.
“흠.”
깍지 낀 두 손을 베개 삼아 의자에 늘어져 있던 네더만은 천천히 다가오는 경비대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까와 달리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순시를 도는 중에 왔습니다. 작업은 잘되고 있는지요.”
“물론이오. 걱정할 거 없소.”
네더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마력을 충전하고 있는 이들과 회중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이제 1시간 5분 정도 남은 거 같군.”
“그렇습니까. 고생이 많으십니다.”
“한번 보시겠소?”
네더만은 성문 쪽을 턱짓했다. 보르브는 옳다구나 하고 그 제안을 받았다.
“예. 진행 정도를 확인하면 좋겠군요.”
“참. 그런데 그걸 말 안 했군.”
네더만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하자, 보르브가 눈썹을 들어 올리다 이내 표정을 굳혔다. 네더만의 손이 허리춤에서 뻗어 나오는 걸 본 까닭.
“이익-!”
촤악!
새하얀 섬광과 함께, 말을 채 뱉지 못한 보르브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네더만이 발검과 동시에 그의 목을 벤 것이다.
보르브의 검은 반밖에 뽑혀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그 상태로 허물어졌다.
“연기 실력이 영 꽝이라 속아 줄 수가 있어야지.”
네더만은 그 앞에서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에 비하면 형편없는 솜씨였다.
그 광경을 본 경비병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적이다! 저들을 모조리 죽여라!”
동시에 적의 침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소리에 주변에 산개해서 경계를 서고 있던 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여간 눈치는 빨라 가지고.”
네더만의 옆으로 궐련을 문 리포드가 내려섰다.
작업을 이리엘에게 맡기고 온 것이다.
“이제 얼마 안 남았소.”
리포드가 연기를 뻐끔거리며 말했다.
네더만이 씩 웃었다.
“그래? 여기서 죽지는 않겠고만.”
“그것까지는 모르오.”
“아니, 나는 안 죽을 걸세. 자네는 몰라도.”
“아마 나도 죽지는 않을 거요. 여기까지 와서 죽으면 너무 X 같을 거 같거든.”
둘은 성문을 뒤에 둔 채 나란히 적에게 검을 겨눴다. 그런 이들을 향해 경비병들이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