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제167화 나라를 위하는 국민 (3)
아르멜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독립군이 지근거리까지 도달한 상황이었다.
성벽에 서면 독립군의 군영이 보였다.
적들의 병력은 대략 7만으로 추정되었다.
현재 수도에만 4만에 가까운 병력이 집결해 있었다. 수가 모자라기는 하지만, 적들의 군대에는 어중이떠중이가 섞여 있는 반면에 제국군은 모두 정규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머릿수만 많은 군대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마그네트의 드높은 성벽까지 앞에 두고 있지 않은가.
지금 병력의 반만 있어도 독립군들쯤이야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서부에서 2만에 달하는 지원군까지 출발했다.
적을 제압하기에 과한 전력.
이는 모두 흰 사자 때문이었다.
아르멜이 초조함을 느끼고 있는 이유 또한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흰 사자를 막을 방도가 도저히 없었다.
총독부의 칼이었던 특임대도 진즉에 멸절한 데다, 레트로이나 6검에 무한의 속검까지 당했다.
대륙 제일검인 그를 대체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그렇다고 그놈 하나 때문에 도망칠 수도 없고.
그나마 다행인 건, 흰 사자가 최근 전장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르멜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현재 시위에 참여하는 인원은 어느 정도지?”
“정확한 인원을 추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테나스타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아무리 잡아넣어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쾅!
아르멜은 강하게 책상을 내리치며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
성벽 바깥으로 적이 도달한 마당에, 안에서도 난리가 아니었다.
평화 시위를 벌인답시고 무장하지도 않은 이들이 광장에 모여 프렌치아 국기를 흔들고 있었다.
하도 잡아 처넣어서 이제는 감옥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모조리 목을 베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거센 폭동이 일어날지 몰랐다.
지금도 고작 죽은 여자애 하나 때문에 저리 들끓고 있으니 말이다.
‘어린애 하나 뒈진 게 무슨 대수라고 이 X랄들인지.’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다. 그들을 통제하는 헌병과 병사들의 피로도도 나날이 증가하고 있었고.
시민들의 폭동이야 평소라면 위협적이지 않지만, 외부에 적이 깔린 지금은 달랐다.
자칫 그들과 동조라도 하는 날에는 안팎으로 적이 생기는 탓이다.
일단은 최대한 어르고 달래며 집회가 더 이상 커지지 못하도록 광장만 통제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도 검을 드는 것보다야 망국의 국기가 낫지.”
아르멜이 이를 갈며 말했다.
“애먼 놈들 말고, 주동자들로 보이는 놈들만 잡아들여라. 너무 자극하지는 말고. 적당히 주무르란 말이야.”
아르멜의 명에 부관은 깊게 묵례했다.
적당히라…….
아랫사람 입장에서는 참으로 수행하기 어려운 명령이었다.
삑-! 삑-!
호각 소리가 도심을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헌병들은 골목 사이를 누비며 누군가를 다급히 쫓았다.
“헉! 헉!”
숨을 헐떡이며 추격을 뿌리치는 남자.
수염이 얼굴을 가릴 정도로 복슬복슬한 그는, 다름 아닌 알렌이었다.
“거기 서라!”
‘너희들 같으면 서겠냐!’
헌병들이 시커먼 곤봉을 쥐고 달려들고 있었다. 비폭력 시위와 현 시국 때문에 그들 또한 함부로 검을 들지 못했다. 하나, 저 눈빛을 보건대 잡히면 죽는 건 다를 바가 없을 듯하다.
사삭.
알렌은 좁은 골목 틈에 쌓여 있는 나무 상자 뒤에 몸을 숨기고 거칠어진 호흡을 억지로 삼켰다.
폐가 터질 듯 움찔거렸지만, 작은 숨소리도 새어 나가서는 안 됐다.
“저쪽으로!”
그를 쫓던 헌병들의 발걸음이 우르르 지나간다. 아마 저편에서 누군가 인기척을 내 줬을 거다. 도망칠 때면 이렇게 은근히 도와주는 이들이 많았다. 작은 교란만으로도 적의 손길을 피해 도망치는 것에는 큰 도움이었다.
“후.”
잠시 호흡을 고른 알렌은 다시금 달리기 시작했다. 적을 따돌린 건 잠시일 뿐. 헌병들이 이곳저곳에 깔려 있었다.
“저쪽이다!”
금세 알렌을 발견하여 소리치는 헌병들.
이쯤 됐으니, 이제 진짜로 도망쳐도 되겠다.
“네스야, 네가 도와줘야겠다.”
알렌이 멘 크로스백에서 네스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이번에도 부탁할게.”
바닥에 내려선 네스는 금세 본체로 변신했다.
휘이잉-!
골목 사이로 빛 무리를 동반한 사나운 돌풍이 일더니, 그 자리에 거대한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렌은 재빨리 네스의 등 위에 올라탔다.
“저기다! 늑대의 기사다!”
늑대의 기사.
알렌이 이곳에 와 새로 얻은 이명이었다.
“쫓아-!”
헌병들이 사방의 골목에서 튀어나오며 일대를 옥죄어 왔지만, 네스는 단숨에 지붕 위로 올라 건물들을 넘나들며 포위망을 질풍처럼 꿰뚫었다.
그들은 그런 네스를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로서는 따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오늘도 수고했어.”
“깡!”
마그네트 외각의 한적한 숲길로 빠진 알렌은 네스를 한차례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곤 얼굴에 붙어 있던 수염을 떼어 냈다. 오래전 크래커에게 받았던 아티팩트를 이제 와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잊고 싶은 추억이 담긴 물건이지만, 그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알렌은 입고 있던 옷도 챙겨 온 옷으로 갈아입었다. 오늘도 다행히 잡혀 들어가지 않고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알렌이 코 밑을 훔치며 말했다.
“나중에 제네스 님한테 자랑해야지.”
현재, 늑대의 기사의 이명은 마그네트에서 제법 뜨거웠다.
몬스터라고 불려도 될 정도로 거대한 늑대를 타고 다니는 신출귀몰한 기사라니.
소문이 돌기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낯선 기척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파스슥.
수풀의 흔들림에 알렌의 표정이 싸늘히 굳었다.
일대를 포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고 이내 제국군 복장을 한 이들이 수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크크큭, 이 쥐새끼 같은 놈. 드디어 덫에 걸렸구나.”
이를 드러내며 검을 겨누는 자들.
대강 보아도 서른이 넘는 병력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왔을까?”
그들은 승리의 웃음을 지으며 낄낄거렸다.
“어떤 프렌치아 놈이 돈이 급한 모양이야. 제 발로 제보를 하겠다고 찾아왔더군.”
아무래도 누군가 자신을 본 듯했다.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네스를 믿고 너무 자만했던 듯하다.
제길.
“참 재밌어. 어떤 놈들은 나라를 위해 망국의 국기를 들고, 또 어떤 놈들은 그런 놈들을 팔아먹으면서 살고 있으니 말이야.”
제국군의 비아냥거림에도 알렌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프렌치아 국민이 자신을 팔았다는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지만, 아닌 이들도 많았다.
알렌은 쭈그려 앉아 네스를 쓰다듬었다.
“네스, 넌 본부로 돌아가.”
본체로 변신하려던 네스가 낑낑거렸다.
“날 죽이지는 않을 거야. 내가 틈을 만들어 줄게.”
함께 도망갈 수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 자신까지 이곳을 벗어날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네스 혼자라면 가능하다. 자신이 잠깐 주의만 끌어 준다면 네스는 그 틈새를 뚫고 도망칠 수 있을 거다.
이들 또한 자신이 목적이니 네스를 쫓지는 않겠지. 알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좌중을 훑었다.
단단한 포위망이 그 주위를 덮고 있었다.
“꽤나 준비했나 본데.”
알렌을 중심으로 서늘한 돌풍이 일었다.
허세신공으로 인한 기세의 변화.
알렌의 기세가 칼처럼 솟아올랐다. 지난 시간 꾸준히 훈련해 온 그였다. 전보다 날이 더욱 예리하게 선 기파가 그를 중심으로 흘렀다.
“고작 이 정도가 다인가?”
알렌은 검을 천천히 뽑아 들며 말했다. 적들은 그 여유로운 태도에 낯빛을 굳혔다.
“뭐 해? 안 들어오고.”
알렌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 * *
“깡! 깡!”
본부로 돌아온 네스가 숨넘어갈 듯 짖어 대자, 네더만은 녀석과 함께 왔어야 할 알렌을 찾았다.
“알렌은?”
“깡! 깡!”
“제길.”
네더만은 돌아가는 상황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표정을 굳힌 그가 말했다.
“앞장서.”
“아니요.”
네스를 따르려던 네더만을 레이크가 붙잡았다.
“대화는 나중에. 알렌이 위험에 빠진 듯하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잡은 겁니다.”
레이크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작전이 오늘 저녁입니다.”
네더만이 본부에 대기하고 있던 이유가 그것에 있었다. 오늘 저녁에 독립군의 사활이 걸렸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중요한 작전이 계획되어 있었다. 네더만 또한 잘 알고 있는 바였다.
“무슨 말인지는 아는데, 제국군 몇쯤이야 스프 마시듯 쓸어버릴 수 있다고. 걱정 말게. 내 스프가 식기도 전에 돌아올 테니.”
“아니요. 불허합니다.”
레이크는 단호했다. 네더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럴 시간이 없는 건 자네도 잘 알 텐데.”
“적들이 노리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잘 아실 테죠.”
“그렇기는 한데, 일단 상황이라도 보고 와야 할 게 아닌가. 말은 안 했지만 알렌은 내 자식 같은 놈이야. 내가 업어 키웠다니까. 처음으로 업은 남자를 어떻게 잊겠나.”
“그가 프렌치아보다 더 중요합니까.”
하지만 레이크는 단호했다.
“알렌 외에도 많은 독립군이 잡혀갔습니다. 프렌치아의 독립을 위해서고, 가까이는 수도의 수복을 위해서죠. 그 또한 이해할 겁니다.”
“…….”
네더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레이크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탓이다.
개인의 감정을 앞세울 때가 아니었다.
그것이 잘되지는 않지만.
“왜 그렇게 심각해요?”
밀실에서 나온 이리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마법사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어때요? 잘 어울려요?”
아무것도 모르고 뱅그르르 도는 그녀에게 네스가 달려들어 사납게 짖어 댔다.
“뭐야? 왜 그래?”
다급하게 짖는 네스를 보며 이리엘은 등골이 싸하게 타올랐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직감한 탓이다.
“알렌 형님은요? 알렌 형님 어디 갔어요?”
평소의 그답지 않게 굳은 표정의 네더만을 보고 이리엘은 곧장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곧장 로브를 벗어 던지며 말했다.
“뭐 해요! 당장 가요!”
이번에도 그녀를 말린 건 레이크였다.
“아니요. 갈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알렌 형님을 구해야 할 거 아니야!”
이리엘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지금이면 구할 수 있어! 아직 총독부로 잡혀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저녁에는 중대한 작전이 있고 여러분은 그것에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레이크는 이들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못을 박았다.
“만약 이를 어긴다면 항명죄로 목을 베겠습니다.”
레이크가 떠나고 거실에는 침통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이리엘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네더만이 그런 그녀를 달랬다.
“괜찮을 거야. 주동자라고 의심받고 있을 테니 당장 죽이지는 않을 거야.”
총독부에서는 프렌치아 국민들의 열기를 꺼트리기 위해서라도 알렌을 공개 처형할 터였다.
그 시기는 일단 독립군과의 전쟁이 끝난 후로 잡을 터.
“우리가 승리하면 알렌을 구할 수 있어.”
이리엘은 풀죽은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크의 말도 네더만의 말도 이해가 갔다.
알렌에게는 미안하지만, 방도가 없었다.
수도에 도착한 이후로 극적인 연출까지 하며 국민들을 선동했고, 그렇게 비무장 시위를 키웠다.
적의 시선을 안팎으로 교란시키기 위함이기도 했고, 적의 병력을 조금이라도 성벽에서 떨어뜨리기 위함이었다.
시위를 통제하기 위해 투입하는 병력은 고작 몇백에 불과할 테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루어지는 통에 실제 필요한 병력은 그 몇 배를 상회했고, 그 외에도 관련자들을 추포하는 과정과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느끼고 있을 피로도는 상당했다. 그 상황이 3주 가까이 누적되다 보니 더욱 그랬다.
알렌을 비롯해 시위를 주도하던 이들이 여럿 잡혀 들어가기는 했지만, 시위를 일으킨 일차적 계획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빨리 작전을 완수하고, 총독부를 탈환하는 수밖에.”
네더만도 그 모든 걸 알고 있기에 이리엘을 달래고는 있었지만, 표정이 침통했다.
현재 제국군의 병력이 남문에 집중적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독립군이 마그네트에 다다른 게 분명했다.
네더만을 비롯한 이들은 오늘 그 빈틈을 노릴 작정이었다.
적들의 눈이 성벽 너머와 도심에 쏠려 있었다.
그로 인해 생기는 약점이 있었다.
달이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민 늦은 밤.
성벽 위에서 독립군을 내려다보고 있던 제국군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들의 움직임이 수상합니다!”
꿈틀거리는 독립군의 진영이 심상치 않았다. 횃불이 일렁이는 수가 무수히 많았다. 진군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오늘 낮부터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던 그들이었다.
병력들이 남문 앞으로 기다랗게 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상대적으로 경계가 허술해진 동문으로 이동하는 이들이 있었다.
네더만과 리포드 그리고 이리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