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제164화 달라진 상황 (2)
전장이 마무리되고, 나는 레이크와 따로 독대 자리를 마련했다.
“괜찮으십니까.”
레이크가 물었다. 그가 보기에도 내가 피곤해 보였나 보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지?”
레이크가 위험을 감수하면서 여기까지 직접 왔다는 건 중요히 전할 내용이 생겼다는 의미.
테이난이 봉쇄되어 있어 서신을 주고받을 수 없었다지만, 지금 상황에 그가 움직일 정도로 중요한 사안은 없었다.
그러니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계획을 앞당겨야 할 필요가 생겨서 왔습니다.”
레이크가 말을 이었다.
“예상보다 제국의 대응이 빠르고 적극적이었습니다. 레트로이나 6검에 무한의 속검까지 말이죠.”
레트로이나 6검도 의외였지만, 이어 무한의 속검까지 보낸 건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기껏해야 또 다른 특임 기사단이나 나를 억압할 만큼의 병력을 보낼 거라 여겼던 탓이다.
레이크 또한 황제가 프렌치아에 이만큼이나 적극적으로 나설 거라곤 예상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상황이 좀 달라졌습니다. 본래는 수도를 수복한 이후에 움직이려 했지만, 지금 시점에 그렇게 움직이면 한발 늦게 됩니다.”
나는 레이크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과거 테이난성에서 그와 독대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때 내게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해 주었었지.
그것에 관한 이야기였다.
“여기서 바로 출발하셔야 합니다.”
“바로?”
“예. 아시다시피 검은 숲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수도를 수복한 후에 움직이면 너무 늦습니다. 무한의 속검이 패배하고 흰 사자가 대륙 제일검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갖는 의미는 제국의 정국에도 영향을 끼칠 겁니다.”
아마 더 큰 파장이 밀려오겠지.
그런데 내 용무는 검은 숲에 있었다.
그곳은 대륙의 최북단에 존재하는 장엄한 숲.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또 그곳에서 계획된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황제는 곧장 군대를 일으키려 할 겁니다. 우리가 수도를 수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겠지요. 그때 출발하면 늦습니다.”
그렇겠지.
나는 그 일을 황제가 군대를 모아 프렌치아를 넘기 전까지 처리해야 했다.
“지금으로부터 무한의 속검 소식이 제국에 닿는 시간과 황제의 명이 가신들에게 닿는 시간, 그리고 그 명령에 따라 병력들이 델론트 항구에 집결하는 시간까지, 그 모든 시간을 고려하면 앞으로 세 달. 그 안에 해결해야 합니다.”
“빠듯하군.”
세 달. 어쩌면 긴 시간일 수 있으나, 이동 시간을 생각하면 빡빡한 시간이었다.
“만약 그 안에 성공하지 못하면 제국의 본대가 프렌치아에 들어올 겁니다. 그때면 상황이 더 복잡해져서 그들이 어떻게 대응할지는 아직 예측이 불가합니다.”
레이크의 말은 이해했다.
하지만.
“수도를 나 없이 수복할 수 있겠어?”
“예. 그래서 제가 온 것이지요.”
레이크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했지만, 그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제국의 적극성은 제 예상을 벗어났지만, 국민들의 반응 또한 마찬가지로 제 예상을 벗어났습니다. 현재 프렌치아가 들끓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끓어오르겠지요.”
흰 사자가 무한의 속검을 베고 대륙 제일검에 올랐다. 국민들이 품은 열기에 더욱 큰 불길이 타오르게 될 터.
“이 상황을 이용한다면, 저희끼리도 해낼 수 있습니다. 제네스 님 덕분에 총독부의 약점을 알고 있기도 하고요. 충분히 가능합니다. 마그네트는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레이크가 나를 바라보았다.
“수도는, 흰 사자 없이 수복하겠습니다.”
* * *
“……제네스 님.”
알렌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눈물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뵐 때까지 강녕하셔야 합니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너나 잘해라.”
알렌은 등에 한 짐을 메고 있었다.
수도로 여정을 떠나기 위함이었다.
나와 카드론을 제외한 네더만, 알렌, 이리엘, 레이크, 리프도까지.
모두 그 여정을 함께할 터였다.
“깡깡!”
그래. 네스도.
나는 하루 이틀 몸조리를 하고, 검은 숲을 향해 떠날 예정이었다.
지금까지와는 상황이 달랐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움직여야 했고, 검은 숲은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인세의 마경(魔境). 나 혼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저희 다녀올게요. 제 걱정은 마시구요. 그렇다고 너무 안심하지도 마시구요.”
이리엘이었다.
어쩌라는 건지.
안 그래도 요새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녀석이다.
“가끔 저희 생각도 하고 걱정도 해 주세요. 소중함도 다시 곰곰이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구요. 그리고 몸조심하세요.”
이리엘은 내게 악수를 권했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망울이다.
“……그럼 다음에 봐요.”
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아 주었다. 보드라운 감촉 사이로 이리엘의 굳은살이 느껴졌다.
오래전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의 감촉과는 달랐다.
약혼식 때 잡았던 이리엘의 손은, 이렇지 않았다.
굳은살 하나 없이 보드라운 구름 같았지.
나는 우습게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가 그녀의 지난 세월을 가늠케 했다.
“……뭐, 뭐 해요.”
이리엘이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힌 채 손을 꼼지락거렸다. 상념에 잠겨 있다 보니 생각보다 오래 잡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요새 툭하면 벌겋게 달아오르는 그녀였다.
“어디서나 너희들이 하찮다는 걸 잊지 말아라.”
나는 알렌을 바라보며 말했다.
“특히, 너.”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게는 허세신공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녀석의 머리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걸 조심하라는 건데 저리 말하는 걸 보면 내 꿀밤 효과가 아직 부족한가 보다.
나는 그리 생각하자마자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빡!
“끄악!”
“그걸 조심하라는 거다.”
그가 주르하와의 대전에서도 내 흉내를 낸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마법사여서 통한 것이었다.
그러니 몸을 사리라는 얘기였다.
“저는요? 저는 뭐 조심하면 돼요?”
머리를 부여잡은 알렌 옆에서 이리엘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먹이를 받아먹으려는 아기 새처럼 눈망울이 초롱초롱했다.
“넌 네 성질을 조심해. 딴생각하지 말고.”
“히힛. 네, 조심할게요. 걱정 마세요.”
“…….”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성질을 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좋아한다.
뭐지?
갈수록 종잡을 수 없는 이리엘이었다.
“그럼 조심히들 다녀오게.”
카드론의 목소리였다.
다들 작별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자네의 수족들은 내가 잘 챙길 테니 걱정 말라고.”
네더만이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네 목이나 챙겨라.”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지만, 그래도 레이크가 함께 있으니 바보짓들은 안 할 테지.
* * *
“…….”
아르멜은 서신을 보고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너무 황당한 나머지 욕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믿기지 않는 상황에 서신만 보고 또 볼 뿐이었다.
하나, 눈을 비비고 머리를 힘껏 털어 보아도 서신의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바르안 알센도르가 패하다니…….’
그의 허망한 시선이 총독부의 하늘을 향한다.
적어도 이 하늘 아래에는 흰 사자를 막아 세울 자는 없었다.
“이게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아르멜의 머리가 하얗게 타올랐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도저히 방도가 없었다.
문제는 흰 사자 하나로 끝이 아니라는 거다.
프렌치아 곳곳에서 날아오른 전서구가 총독부로 끊임없이 내려서고 있었다.
국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는 내용을 품은 서신들이었다.
농민들이 괭이 대신 검을 쥐었고, 각 도시의 경비대에서도 병력 이탈이 계속되고 있었다.
또한, 하루가 멀다 하고 프렌치아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벽보가 붙었다.
이제는 벽이 모자를 지경이었다.
국민들은 검을 쥐든 펜을 쥐든, 각자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프렌치아 전역이 들끓고 있었다.
여기에 무한의 속검의 패배와 테이난가의 승리가 그 열기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얌전히 처박혀 있던 이들조차 그 열기에 휩쓸려 독립 열사를 자처했다.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아르멜의 머리칼이 뭉텅뭉텅 빠져나갔다.
“이 빌어먹을 프렌치 새끼들아! 그만 좀 지랄해라!”
그는 피를 토하는 심경으로 소리쳤다.
총독부의 힘으로도 통제가 버거울 지경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피노센에 틀어박혀 있던 독립군의 본대가 출정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그 군세가 갈수록 불어나고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여러 갈래로 흐르던 물줄기가 하나의 바다로 흐르듯, 프렌치아의 독립을 위해 들고일어난 이들이 모두 그 군세에 합류하고 있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적의 목표는 빤했다.
“제, 젠장!”
수도, 마그네트.
독립군의 전력이 총독부를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 * *
저 멀리 수도, 마그네트의 성벽이 보였다. 알렌은 과거 그 광경을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데이지.’
그때는 데이지와 함께였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에게 들를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는 그러지 않았다.
요새 프렌치아는 뒤숭숭했다.
낯선 여행객과의 만남은 자칫 화가 될 수 있었다.
“그때는 같이 왔었는데.”
알렌의 자조적인 푸념을 들은 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그때는 제네스 님이랑 함께 왔었죠…….”
이리엘은 높디높은 성벽을 보며 그때를 추억했다. 제네스와 함께하지 않는 지금의 여행. 솔직히 몸은 편했다. 마음도 편했다.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일 다 각자 분담하지, 잔소리하는 사람 없지.
얼마나 좋아.
그런데도 그가 보고 싶은 그녀였다.
당시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제네스를 좋아하는 걸 극심하게 부정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대놓고 보고 싶어 하니…….
그때와 비교하면 그녀의 마음은 확실한 상태였다.
‘쳇.’
분함에 혀를 차는 이리엘이었다.
제네스를 만나고 1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다.
프렌치아도.
그리고 자신도.
각자의 마음을 품은 일행들은 어렵지 않게 수도로 들어섰다.
전보다 경계가 삼엄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아직까지 출입자를 통제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하나, 내부의 분위기는 이전과 딴판이었다.
무장한 헌병들이 조를 이룬 채 대로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칼처럼 날카로웠다. 모든 이들을 잠정적인 범죄자로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그런 헌병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그들의 뒤를 향해 다들 불만 어린 시선을 토해 냈다.
서로를 향한 적대감이 수면 위로 드러나 있었다.
“긴장된 분위기네요.”
대로에는 알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부풀 대로 부푼 풍선처럼, 아주 작은 계기만 있어도 뻥! 하고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거기에 마그네트를 떠나는 행렬도 많았다. 이민 왔던 제국민들이 전쟁의 분위기에 짐을 싸서 귀향하는 듯 보였다.
그 탓에 분위기가 더욱 어수선했다.
하나, 오히려 수도는 지나쳐 온 도시들에 비하면 훨씬 차분했다.
많은 도시들이, 시민들이 일으킨 폭동과 그들을 제압하는 제국군으로 난리가 아니었다.
전체적인 상황이 프렌치아가 패망했던 10년 전으로 회귀하는 듯했다.
나라 전체가 전장의 어수선함에 뒤덮이고 있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오히려 전이 평화로워 보일 지경.
하나, 사람들의 표정은 달랐다.
뭔가 결의에 차 있었고, 생동감이 있었다.
혼란스러움 아래 희망 어린 기대가 깔려 있는 것이었다.
지금쯤이면 모두 알고 있을 테지.
독립군이 수도로 진격해 오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