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제163화 달라진 상황 (1)
적은 교만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전력으로 전장에 임하지 않았고, 승리를 자신하며 여유를 부렸다.
내가 무한의 속검과의 생사결로 지친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내 검에 담긴 세계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며 지금껏 제대로 된 강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할 터였다.
그 나이에 그 정도 강함이라면, 지금껏 압도적인 승리만을 경험했을 테지.
패배한 경험이 없다는 것 또한 패배의 요인이 되기도 하니까.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벽을 넘지 않고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체 능력을 갖게 된 것일까?
주르하의 인체 강화 수술이 떠오르기는 했으나, 그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지금으로는 알 수 없는 공백의 부분이었다.
그래도 녀석들 덕분에 황제의 무기에 대해 대강 알게 되었다.
이제 남은 직속 친위대는 여덟.
아마 다음번에는 그들이 내 앞을 막아 오겠지.
언제나 그렇듯 괘념치 않았다.
오히려 녀석들의 검이 궁금했다.
나는 그렇게 완전히 마무리된 전장에서 등을 돌렸다.
* * *
무한의 속검이 패했다.
그 충격적인 소식이 제국의 군영을 빠르게 훑었다.
“…….”
병사들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넋을 놓았다. 다른 곳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면 그저 헛소문으로 치부했겠지만, 전장은 코앞에 있었다.
그리고 바르안 알센도르는 돌아오지 않았다.
상부에서도 그것을 속일 수 없기에 사기가 떨어질 줄 알면서도 이 이야기를 막지 못했다.
즉, 오늘 있었던 생사결에서 바르안 알센도르는 패배한 것이고.
흰 사자가 새로운 대륙 제일검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바르안 경이…….”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후에 나선 황제의 직속 친위대 소속의 대원들마저 패배했다는 소식은 완전히 차단되었음에도 그랬다.
혼이 빠진 건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사령관, 츠미온 또한 막사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그는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련의 상황들을 떠올리며 침음을 흘렸다.
천지가 격동하는 듯한 격렬한 전투가 반나절 동안 벌어졌으나, 그 끝에서 결국 무한의 속검이 패배했다.
그리고 그 전장에 끼어든 황제의 직속 친위대.
그들이 마법과도 같은 이능으로 흰 사자를 압박할 때만 해도 츠미온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지금이 아니면 흰 사자를 죽일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자의 검격은 그만큼이나 절대적이었으니까.
명예를 저버리고 실리를 취해야 할 정도로.
그런데.
그런 그들마저 패배했다.
자신 있게 나선 것과 달리 싱거운 결말.
무한의 속검이 약한 것이 아니었다.
직속 친위대가 약한 것이 아니었다.
흰 사자가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것이었다.
“……흐으음.”
츠미온는 골을 싸매며 신음을 흘렀다.
결단이 필요했다.
마른세수를 하며 그는 앓는 소리를 내었다.
모든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은 사령관인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몸을 비틀 정도로 괴로워하던 그는, 이내 깊은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작전 참모인 포르넨 대령이 지휘부 막사에 들어섰다.
이를 악문 츠미온이 말했다.
“내일, 테이난성을 함락한다.”
“예, 알겠습니다.”
포르넨 대령은 츠미온의 명령을 일언반구 없이 받았다.
그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아는 까닭이다.
지금 상황에서 테이난가를 포위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곧 흰 사자를 앞세워 군의 전열을 흔들 것이니.
그들에게는 고립을 버텨 낼 여력이 있었다.
때문에 지금이어야 했다.
흰 사자가 체력적으로 지친 지금 이 순간만이 테이난의 성벽을 넘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바르안 경이 생사결 이전에 중독 증상이 있었음을 은밀히 전하도록 하라.”
이는 제국의 검으로서 명예롭게 전사한 바르안의 마지막 전장을 더럽히는 행위였지만,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흰 사자와 테이난가는 병사들에게 비열한 무리가 되어야 한다.
* * *
“적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보고를 받은 카드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의 대응은 예상에 있던 범위였다.
그들에게 남은 건 철수 혹은 진격뿐이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물러날 수는 없겠지.
카드론이 말했다.
“나도 곧 나가겠다. 철저히 준비하도록.”
경례한 부관이 나가고 카드론은 집사에게 갑옷과 검을 준비하라 일렀다.
제네스가 내상으로 전장에 참여할 수 없다고는 하나, 현재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중이었다.
이 정도 열기면 충분했다.
테이난의 성문은 단 하나. 거기에 성문까지 이어지는 길목은 경사가 있는 데다 좁다랗게 굽이친다.
밀집된 병력이 들어올 수 없는 지형이었다.
서부의 산맥이라 불리는 천혜의 요새.
“올 테면 와 보라지.”
카드론은 씩 웃음을 지었다.
테이난의 성벽은 드높았다.
제네스의 도움 없이도 적들을 충분히 막아 낼 자신이 있었다.
다음 날.
세상이 파랗게 물들어 가는 새벽이었다.
카드론은 성벽에 올라 적의 형세를 바라보았다.
생사결이 있었던 자리 위로 제국의 병사들이 까마득하게 들어서 있었다. 밤을 지새우며 전장 준비를 마친 이들이 전열을 이루었다.
그 중심에 선 츠미온은 드높게 솟은 테이난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서부의 산맥이라 불릴 정도로 단단한 성벽.
저것을 허무는 일은 한눈에 봐도 쉬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해내야 한다.
제국을 배신하고 뒤통수를 친 그들을 반드시 응징해야 했다.
츠미온이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제국의 병사들은 들으라-!”
마력을 품은 목소리가 일대를 울리며 병사들의 귓가에 선명히 박혀 들었다.
“어제 있었던 생사결에서, 무한의 속검이자 대륙 제일검이었던 바르안 알센도르 경께서 전사하셨음을 다들 알 것이다!”
그는 사실 그대로를 전했다. 명백한 사실을 교묘하게 이용해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그럴듯한 거짓은 진실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것이 믿고 싶은 이야기라면 더더욱 말이다.
“우리는 어제 대륙의 정점이자 제국의 검이었던 그분을 잃었다!”
그는 테이난성을 보며 소리쳤다.
“제국의 자부심이었던 그분을 앗아 간 적들이 눈앞에 있다! 그분의 마지막 전장을! 그분의 명예를! 더럽힌 비열한 프렌치 놈들이 바로 눈앞에 있다!”
어젯밤 츠미온은 군영에 은밀한 소문을 뿌렸다.
적이 비열하게 독을 썼다는 이야기였다.
병사들은 그것에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고 믿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올랐다.
“제국을 변절한 간악한 무리가 저 성벽 너머에 있다!”
츠미온이 검을 하늘에 뻗으며 소리쳤다.
“우리는 오늘 저열한 적들에게 제국의 힘을 보여 줄 것이다!”
“우아아아-!”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터트렸고, 곳곳에서 북소리가 둥! 둥! 심장을 울렸다. 병사들은 그것에 맞춰 발을 굴렀다. 평야가 심장처럼 뛰기 시작한다.
“바르안 경의 복수를 위하여!”
“위하여-!”
“제국을 위하여!”
“위하여-!”
츠미온의 고함을 복창하는 제국군들.
승리의 고양감만이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을 향한 확실한 적대감과 분노 또한 병사들의 투지를 수직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적군 돌격-!”
“우아아아아-!”
츠미온의 명령과 함께 하늘이 떠나가라 함성을 내지른 제국군이 테이난의 성벽을 향해 밀려들기 시작했다. 카드론 또한 그에 맞서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우리가 나고 자란 테이난의 성벽이 얼마나 높은지! 오늘 제국은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우와아아-!”
테이난의 병력 또한 사기가 하늘에 닿을 듯 충천했다.
“일발 장전-!”
카드론의 명령에 궁병들이 일제히 활을 걸었다.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가 마른하늘을 겨누고 있었다. 호흡을 폐에 가두며 흐르는 적막. 그것이 카드론의 고함과 함께 일제히 터져 나갔다.
“발사-!”
푸슈슈슈슈슝!
대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요동쳤다. 성벽 위를 날아오른 화살이 검은 비가 되어 적의 좁고 기다란 전열을 향해 쏟아졌다.
빗물이 강물에 떨어지는 듯했다.
화살이 떨어진 곳곳에 파문이 일었으나, 적들의 물결은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꽤 오랫동안 일대를 포위하고 있었던 만큼, 공성전 준비는 이미 철저히 준비되어 있었다.
성벽에 걸릴 사다리와 성문을 부술 공성추가 병사들과 함께 밀려오고 있었다.
테이난성은 그런 이들을 향해 계속해서 화살을 토해 냈다.
쿵! 철컥!
그럼에도 기다란 사다리가 성벽 이곳저곳에 걸린다. 혼란스러운 전장을 틈타 그것을 타고 오르는 적들이 있었다. 사다리를 부수고 떨쳐 내도 그것은 계속해서 성벽에 걸렸다. 그 모두를 막을 수는 없었다.
간혹 성벽 위로 올라서는 이들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공성추가 성문을 세차게 두드리기 시작한다.
쿵-! 쿵-!
하나, 테이난은 굳건했다.
그때 제국군의 머리 위로 불덩이가 떨어지고, 얼음 폭풍이 쏟아져 내린다.
테이난가에 속한 마법사들이었다.
그 수가 다섯을 넘지 않았으나, 밀집해 있는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었다.
그때 바람이 묵직하게 갈라지는 소음이 일었다.
휘이이잉-!
저편에서 날아든 돌멩이가 점차 몸집을 키우며 다가오더니.
콰앙-!
성벽의 끄트머리를 부수며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적들의 투석기가 불을 뿜듯 바위 더미를 토해 내고 있었다.
성벽을 뚫으려는 창과 성벽을 지켜 내려는 방패가 첨예하게 부딪쳤다.
고함과 함성과 비명이 끊임없이 전장을 울리며 치열한 교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콰르릉-!
귓가로 멀찍이서 들려온 폭발음이 흩어진다.
덕분에 적들의 공세가 시작되었음을 쉬이 알았다.
나는 어제부터 지금까지 운기 행공에 매진하고 있었다.
내력을 많이 사용한 데다, 무한의 속검과의 생사결로 적지 않은 내상이 있었다. 그 상태에서 두 녀석을 상대로 움직였으니, 잠시간의 요양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지금 상황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후우.”
일단, 급한 불은 껐다. 들끓던 진기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곧장 몸을 일으켜 전장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상황에서 전투는 내상을 악화시킬 수 있으나, 전장에 미치는 내 영향력은 상당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내가 검을 한 번 그을 때마다 기백에 이르는 병사들의 숨통이 트일 것이었다.
나는 흰 사자 가면을 얼굴 위에 얹었다.
“흰 사자다!”
“흰 사자가 나타났다!”
나를 발견한 아군의 병사들이 고래고래 고성을 지르며 함성을 질러 댔다.
지속되는 교전에 지쳐 가던 전장이 다시 한번 가열하게 타오른다.
나를 본 카드론이 염려 섞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리하는 거 아닌가?”
“마음에 없는 소리 말고.”
“하하. 이거 속내가 너무 뻔했나. 그럼 부탁함세.”
그는 씩 웃어 보였다. 나를 봤을 때부터 쾌재를 지르고 있었을 테지.
그 또한 내 존재가 전장에 미치는 영향력을 알았다. 나로 인해 얻게 될 이득부터 생각했을 녀석이 내 걱정을 할 리가 없지.
나는 별말 없이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보통의 성벽보다 배는 높은 그것을 나는 새처럼 활강했다.
적들의 머리통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이내,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칼날이 푸르게 타오른다.
콰과과과광-!
넓은 반경으로 뿌려진 참격이 그들의 머리 위로 작렬했다.
나는 그들의 시체 위로 사뿐히 내려섰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적들의 시선이 몰린다.
“희, 흰 사자?”
나를 보는 표정이 아군과는 정반대였다.
사색에 질린 이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일대에만 잠시 고요가 내린 듯했다.
나는 그들에게 검으로 답했다.
콰과과과과광-!
앞으로 뻗어 나간 검격이 전장을 내달린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적의 전열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피라미들을 잡기 위해 내려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적의 사령관의 위치는 이미 성벽 위에서 파악해 놓았다.
이대로 전진하면 놈을 마주할 수 있을 터.
그는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전장에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막아라! 놈을 막아!”
병사들이 앞을 막아 왔지만, 제국의 대오는 내 검격에 손쉽게 갈라졌다.
푸확-!
고성을 내지르는 지휘관의 목을 가르며 지나치는 비검기.
어느 순간 병사들은 나를 마주하기보다 도망치기 바빴다. 간혹 피하지 못하거나 만용을 부리는 자들도 있었으나, 나는 그대로 쓸어버리며 나아갔다.
그런 내 앞에 기사단들이 서기 시작한다.
익스퍼트를 넘어선 이들의 벽.
천령신공 검법편.
벽력의 장(章) 뇌정(雷霆).
콰자자자자작!
수평으로 들이친 뇌기가 그들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전방을 밀어 버리는 압도적인 파괴력.
적들의 전열에 일순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버렸다. 나는 그 사이를 지나쳐 나아갔다.
“…….”
그리고 그 끝에서 적의 사령관을 마주했다.
그는 별말 없이 검을 들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긴말은 필요치 않았다.
콰과과과광!
두 개의 신형이 얽히며 푸른 불꽃을 토해 낸다.
그는 나의 검을 곧잘 막아 냈다.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듯했다.
하나, 나에게는 녀석과 오래 어울려 줄 여유가 없었다.
촤-악!
번쩍인 섬광이 적장의 목을 치고 지나갔다.
녀석의 머리통이 허공에 팽그르르 솟구쳐 올랐다.
그런 내게 주변의 적들이 달려들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나는, 내게 적의를 던지는 이들을 천천히 쓸어 갔다.
내가 적들의 후방을 교란할수록 그들은 앞으로 나아갈 힘을 잃어 갈 터였다.
“후퇴하라-!”
“모두 퇴각하라-!”
어느새 적들의 움직임이 썰물이 빠지듯 뒤로 흐르고 있었다. 적들이 후퇴하고 있었다.
“우와아아아-!”
테이난의 드높은 성벽에서는 승리의 함성이 그들을 배웅했다.
그렇게 완전히 적군의 무리가 빠져나가자,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널따랗게 펼쳐진 시체들뿐이었다.
참혹한 전장의 잔상만이 자리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지나 천천히 성을 향해 돌아섰다. 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내 쪽으로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제국의 갑옷을 입고 있었으나, 그들에게서 나는 익숙함을 느꼈다.
“죽이지 마쇼! 나란 말이오! 스티스시에서 당신에게 내 목숨과 다름없던 아티팩트를 사용했던 그 리포드 말이오!”
대체 언제까지 우려먹을는지.
나는 녀석의 말은 깡그리 무시하며 그 옆에 선 자를 보았다.
그가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레이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