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제161화 벽을 넘는다는 건 (1)
알렌은 시야에 드러난 광경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사납게 요동치던 평야가 적막에 잠겨 있다. 지금껏 눈에 담기지도 않던 전장의 향방은 다행히 선명했다.
바르안 알센도르가 붉은 핏물을 뿌리며 스러지고 있었다.
지난 20년간 대륙의 정점에 올라 있던 거인이 허물어졌다.
그 의미는 간단명료했다.
“우아아-! 제네스 님이 이겼어요!”
이리엘이 펄쩍 뛰며 알렌의 목을 얼싸 안았다. 알렌 또한 그제야 허공을 보며 포효했다.
“끄아아아! 제네스 니이임!”
머리 위에 있던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질 때까지 이어진, 긴 혈투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검을 좇을 수 없었지만, 그랬기에 누구보다 마음을 졸이면서 보았다. 알렌은 그새 볼살이 쪽 빠질 정도로 퀭해 있었다.
“젠즈앙! 제네스 님이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다고요!”
알렌이 허공을 향해 울부짖었다.
“저도예요! 믿고 있었다구요!”
이리엘도 덩달아 펄쩍펄쩍 뛰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바르안 알센도르를 꺾었다.
대륙 제일을 꺾은 것이다.
프렌치아 왕국이 패망하기 전부터 정점에 올라 있던 그는, 지금의 시대를 상징하는 자였다.
제네스는 그런 남자를 이긴 것이고, 이제 그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이것이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구!”
카드론은 환호하는 알렌과 이리엘을 보며 픽 웃고는 저 멀찍이 선 제네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믿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카드론은 여러 방면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제국에서 무한의 속검을 보낼 줄은 몰랐던 탓이다.
다수의 전력이 온다면야 굳이 정면으로 맞서지 않아도 된다.
하나, 한 명의 검사가 온다면 승부를 피할 수 없다.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승부였고,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승리를 자신하기 어려웠다.
그는 다름 아닌 대륙 제일검이니까.
지금까지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말은 단순한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카드론이었다.
그래서 만약 제네스가 패배한다면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심하던 차였다. 프렌치아 임시정부에 몸 담근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제국에서 이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설 거라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
한데, 그 모든 예상을 뒤엎고 제네스가 승리했다.
대륙 제일검을 꺾고.
본인이 그 자리에 올랐다.
“당최 믿을 수가 없군.”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저 괴물 자식. 하.”
네더만이 허탈하게 웃었다.
진짜로 대륙 제일이 될 줄이야.
패망한 프렌치아에서 이런 괴물 같은 놈이 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말이지 무지막지한 일이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두근거림이 있었다.
빌어먹을 놈.
나이 사십을 넘긴 남정네의 가슴을 이렇게 쥐고 흔들다니.
제네스의 등이 그 어떤 성벽보다 든든해 보인다.
저놈 등 뒤에 있으면, 적어도 뒈지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자식아.
이제 네가 대륙 제일이다.
아주 배가 아파 죽겠구나!
네더만은 꼬인 창자를 쥐며 씩 웃었다.
그때였다.
적진에서 쇄도하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창졸간에 공간을 도약하는 움직임.
그들의 적의가 찰나에 훅 끼쳐 왔다.
그만큼 적나라한 적의였다.
“이런 비겁한 새끼들이!”
네더만이 칼자루를 쥐며 분통을 터트렸다. 카드론도 그 광경을 보고 다급히 무릎을 굽혔다. 당장에 뛰쳐나갈 생각이었다.
-나서지 마라.
그때 귓가에 선명한 음성이 담긴다.
분명 제네스의 목소리였다.
저 먼 거리에 있음에도 귓가에 속삭이듯 선명히 들렸다.
콰과과과광!
일순, 제네스가 서 있던 자리로 거센 참격이 휘몰아쳤다.
네더만은 그것을 보며 이를 악물었고.
카드론 또한 미간을 사납게 찌푸렸다.
“뭐, 뭡니까!”
알렌은 갑작스런 상황에 눈동자를 크게 키웠다.
“저 개자식들이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리엘도 눈을 뒤집었다.
쇄도한 이들과 같은 편인 사령관 츠미온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갑작스레 튀어 나가는 두 개의 그림자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제국의 자부심인 무한의 속검의 패배만으로도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들의 진영에서 제안한 생사결이었다.
공정을 기했고, 그 상황에서 패배했다.
그런데 그것에 불복하고 아군의 병력이 뛰쳐나갔다.
심지어 바르안의 수행 기사들도 아닌, 황제의 직속 친위대인 저스티스 소속의 대원들이었다.
“…….”
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흰 사자를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인다면 두 팔을 들고 환영해야 하는 일이나.
바르안과 제국의 명예는 땅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말 터.
‘이래도 되는 건가?’
하나, 츠미온은 그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황제의 수족인 그들을 자신이 무슨 수로 막겠는가.
* * *
승부가 결착되기 무섭게 적진에서 쇄도해 오는 이들이 있었다.
두 개의 그림자가 간격을 빠르게 삼키며 쏘아졌다.
쾌속한 움직임.
그것만으로도 적의 경지가 가늠된다.
그들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둘 모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전신을 짓눌러 오는 기파가 그랬고, 그들의 속도가 그랬다.
벽을 넘지 않는 한 보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가 무려 둘이다.
지금껏 공인된 대륙의 소드 마스터는 나를 포함하여 총 다섯.
바르안을 제외하면 이제 넷이다.
개중 둘은 제국이 아닌 다른 왕국의 소속이었다.
그런데 소드 마스터가 이 전장에 둘이나 더 나오다니.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일단 카드론과 네더만을 말렸다.
-나서지 마라.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순간, 섬광이 번쩍했다.
일대를 가르며 쏘아지는 참격.
나는 하나의 궤적으로 그것을 지웠다.
쿠과과과과광!
일검에 쓸려 나간 참격의 파편이 평야 위로 거칠게 쏟아졌다.
잠시 후 그 잔해 위로 새처럼 우아하게 내려서는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둘 모두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대륙 제일검도 죽으니 별반 다를 게 없군.”
개중 남자가 바르안의 시체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일말의 존경심도 담겨 있지 않은 눈빛.
“네가 흰 사자인가.”
그는 나를 보며 눈을 빛냈다. 옆에 서 있던 여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뭐야, 뭐야. 흰 사자가 이렇게 잘생긴 오빠였다니. 완전 내 취향이잖아!”
나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의 뒤를 다급히 따랐던 자들이 평야에 내려섰다. 검은 방패의 문장을 가슴팍에 새긴 자들. 알센도르가의 기사들인 듯했다.
그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바르안의 시체를 수습하고는, 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들 보다 앞서 도착했던 남자가 말했다.
“너희들은 물러가라.”
“바르안 경께서 본인이 패배할지언정 절대 나서지 말라 말하셨습니다.”
기사의 말이었다. 감정적으로 격노한 건 그들일 것임에도, 그들은 오히려 철수를 말했다. 바르안의 명예가 걸린 전장인 탓이다.
하나 그 말을 들은 사내는 조소하며 말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죽은 영감의 말을 들어야 하나?”
남자의 말에 기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기사와 죽은 바르안을 동시에 모욕했다. 버르장머리가 없는 놈이었다.
몇몇이 울컥하는 듯했지만,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손을 들어 부하들의 동요를 막았다.
그러곤 바르안의 시체를 챙겨 걸음을 물렸다.
“가서 보고 있어요. 복수는 저희가 해 줄 테니까.”
여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알센도르가와 바르안의 명성을 생각했을 때, 그가 죽었다고 해서 이렇게 막 나갈 수 있는 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들의 소속이 대충 감이 왔다.
내가 말했다.
“황제의 직속 친위대인가.”
“호, 눈치가 제법 빠르군. 나는 저스티스 소속의 페르오다.”
“저는 예리아라고 해요. 그 얼굴을 지금 이후로는 못 볼 생각을 하니 벌써 아쉽네요.”
예리아가 새침데기처럼 말했다.
“그래도 일단 축하드려요. 대륙 제일검이 되셨네요. 그러니 둘이 한꺼번에 덤빈다고 비겁하다고는 하지 않겠죠?”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황제의 직속으로 있다 보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저리 천방지축인 거겠지.
그런데 둘 모두 한참이나 젊다.
나는 그들을 보며 지금껏 내게 나이 이야기를 했던 이들의 심경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나 또한 같은 마음을 느끼고 있는 탓이다.
반로환동을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20대로 보이는 이들이 소드 마스터에 이르러 있다.
나 또한 20대에 소드 마스터에 이르지는 못했다.
근데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것도 둘이나.
페르오가 건방진 태도로 입을 놀렸다.
“안타깝겠어. 승리를 누리고 싶었을 텐데 말이야.”
둘은 여유로운 태도였다.
본인들의 승리를 장담하는 듯했다.
조금 전 바르안과 나누던 검을 보았음에도 그랬다. 아마 내가 지쳤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것이겠지.
“여유들이 넘치는군.”
실제로 지치기는 했다.
바르안은 강했고, 그를 상대하는 건 내게도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그럼 시작할게요!”
먼저 걸음을 박차고 달려든 것은 예리아였다. 걸음을 내딛는 동시에 예리아의 신형이 증발하듯 흩어진다.
쇄액-!
동시에 뒷덜미를 그어 오는 검격이 있었다.
나는 자세를 낮춰 그것을 피했다.
파밧.
다시 흩어진 예리아의 신형이 이번에는 지면 가까이에서 솟아나 하체를 쓸어 왔다.
나는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파밧.
그러자 이번에는 머리 위에서 예리아의 신형이 불쑥 솟아난다.
분명 조금 전까지 바닥을 쓸어가고 있었음에도 나보다 빨리 상공을 선점했다. 손에 쥔 단검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팡!
나는 허공을 밟고 몸을 비틀었다. 땅에 내리는 순간, 측면에서 들어오는 권격이 있었다.
이번에도 예리아다.
검을 뿌렸다. 찰나에 그려진 궤적이 그물망처럼 녀석을 감쌌다. 하나 예리아의 신형은 내가 짠 검망을 관통하듯 지나치며 그 앞에서 솟아났다.
거미줄처럼 촘촘히 엮은 검기였다.
정면으로 뚫고 들어올 틈은 없었다.
그런데 녀석은 그렇게 했다.
마치 공간을 도약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솨아아악!
그녀를 베기 위해 휘두른 검이 허공을 갈랐다. 앞으로 쏘아지던 예리아는 어느새 등을 찔러 오고 있었다.
휘릭.
맹렬히 회전한 몸을 따른 검극이 그런 녀석의 몸을 베고 지나간다.
하나 손끝이 가볍다.
그녀는 내 측면에 새초롬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여전히 반응 속도는 살아 있네용.”
마법인가?
하나, 주르하가 썼던 공간 이동 마법과는 달랐다. 캐스팅이 빠른 수준이 아니다. 공간 이동에 조금의 딜레이가 없었다.
마치 공간을 뛰노는 것처럼.
그렇다고 아티팩트를 이용한 움직임일 리는 없었다.
아티팩트로 이런 게 가능할 리 없으니.
결국, 마법은 아니다.
마법으로는 이 정도의 순속을 보일 수 없다. 내 반응 속도만큼이나 빠른 캐스팅이라니,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능이겠지.
“아직 힘이 남았나 본데. 대륙 제일검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볼까!”
잠시 지켜보고 있던 페르오도 나섰다.
촤라라락.
그의 어깻죽지에서 강철이 여러 가닥으로 솟아나며 날개처럼 펼쳐졌다.
기다랗게 나풀거리는 것이 꼭 천 같았다.
솟아난 강철의 천 조각이 녀석의 팔에 휘감겨 든다. 그러고는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형태를 조형했다.
잠시 후 그의 오른손에 거대한 강철 팔이 생겨났다. 갑옷을 여러 겹 덧대어진 형태로 보이는 그 거대한 팔은, 홀로 비상식적으로 거대했다.
인간의 몸에 팔만 오우거의 것처럼 컸다.
그 주먹이 내게 쏘아졌다.
공기를 뭉개며 쏘아지는 오우거의 주먹.
나는 몸을 틀어 그것을 피해 냈다.
과아아앙!
주먹이 뻗은 자리로 묵직한 권풍이 평야를 휩쓸며 지나간다.
크기만큼 막강한 파괴력.
페르오가 주먹을 회수하며 반대쪽 주먹을 뻗어 왔다. 그때까지는 인간의 것이었던 그의 왼팔 위로 강철의 천이 휘감기며, 오우거의 팔이 된다.
나는 그것을 검으로 비스듬히 쳐 냈다.
콰아아아앙!
그럼에도 묵직한 충격에 절로 몸이 떠올랐다.
뇌운검도 버거운지 지잉 울었다.
나는 허공에서 몸을 여러 차례 뒤집어 자리에 내려섰다.
“크큭. 힘이 빠졌나? 별거 아닌데?”
페르오는 건방진 웃음을 지었다.
그의 양팔은 오우거의 것처럼 거대화되어 있었다.
촤라라락!
다시금 그의 등에서 펼쳐진 강철의 천이, 이번에는 온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그는 금세 거대한 팔이 잘 어울릴 정도의 거체를 갖게 됐다.
마치 오우거가 풀 풀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듯한 모습.
체고는 4m에 이를만큼 거대했다.
아이언 오우거라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그가 말했다.
“간단한 자기소개는 끝이 났으니, 이제 봐주지 않으마.”
호기롭게 말하고 달려드는 녀석.
이번에는 예리아까지 함께였다.
나는 검병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다른 걸 떠나, 태도 자체가 건방진 이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발아래 둔 양 오만을 떨고 있었다.
알량한 무력을 믿고 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꼴을 보니,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려 줄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