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제160화 대륙 제일검 (4)
네더만은 눈을 부릅뜬 채 전장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신형이 어지러이 얽히며 교차하고 있었다. 희끗한 궤적이 그들 주위를 휘돌았다. 그리고 그것이 교차할 때마다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이 뒤를 이었다.
쿠구구구구궁!
바닥이 기다랗게 파이며 먼지구름이 인다.
공간이 뒤틀리고 갈라지며 비명을 질러 댔다. 그때마다 투명한 충격파가 세찬 바람을 싣고 날아왔다.
머리칼이 사납게 나부낀다. 땅의 몸부림이 발바닥으로 계속해서 전해지고 있었다.
‘인간도 아닌 것들.’
네더만은 그 광경을 보며 땀을 삐질 흘렸다. 정확히는 보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의 눈에도 둘의 움직임은 그저 자욱했다. 그 또한 둘의 검을 제대로 좇을 수가 없었다.
네더만은 어렸을 적 기사들의 검을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지금 심경이 그때와 같았다.
아득함.
그들과 자신의 격은 하늘과 땅 사이만큼 멀었다. 그 안에는 거대한 산악도 능히 들어갈 터였다.
하지만 그때와는 조금 다르다.
어릴 적 네더만은 기사의 검을 보며 언젠가 저곳에 도달하리라, 또 언젠가 저 기사를 넘어서리라,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무리겠군.’
그들은 인간의 벽을 완전히 초월해 있었다.
이중 가장 강한 네더만조차 그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은 어떻겠나.
알렌은 제네스를 위하는 마음에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만, 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바닥이 파이며 흩날리는 먼지구름과 휘돌며 번쩍이는 섬광, 그리고 온몸을 날카롭게 찔러 오는 기파의 잔해를 감각하며 그저 전투가 벌어지고 있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반면 이리엘은 아예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고 있었다.
작은 입이 쉴 새 없이 웅얼거린다.
눈을 떠 봐야 볼 수 있는 게 없는 그녀는 간절히 기도하는 방법을 택했다.
일순, 푸른 섬광이 명멸하며 일대의 지반이 사납게 흔들렸다.
카드론은 그 와중에도 전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것이 대륙 제일…….’
그는 그들의 압도적인 검력에 혀를 내둘렀다. 일선에서는 물러났다지만, 그 또한 과거 레오니랜서의 일원이었으며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른 기사.
그들의 검이 가진 무게를 모르지 않았다.
지금 이 전장의 승리자가 대륙 제일이 될 터였다.
눈앞의 전장은 세계의 정점을 가리는 자리인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가문의 명운이 저 생사결에 달려 있었다. 테이난을 통째로 배팅한 도박이 이 승부에 따라 갈릴 터였다.
‘반드시 대륙 제일이 되거라.’
카드론은 주먹을 꾹 움켜쥐며 전장을 바라보았다.
“생각만큼 강하지는 않은데?”
페르오는 팔짱을 낀 채 입매를 비틀었다. 전장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사납게 흔들고 있었다.
예리아 또한 싱긋 웃으며 동의했다.
“내 생각도 그래. 우리가 너무 강해진 걸까나?”
그녀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들의 눈앞에서 대륙 제일의 검이 펼쳐지고 있었다.
과연 그 위명에 맞게 빠르고 강맹한 검격이다.
둘의 격돌로 공간이 조각나는 듯했다.
그들의 위명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혼자 힘으로 저들을 감당할 자신은 없으니.
하나, 예리아와 함께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페르오가 말했다.
“흰 사자도 확실히 강하네.”
흰 사자는 바르안과 비등하게 검을 나누고 있었다. 아직 누가 우위라고 판단할 수 없을 정도.
예리아가 속삭였다.
“저자가 진짜 역천의 대가일지도 모르겠는걸.”
“높은 확률로 그렇지. 저 정도의 전력이 갑자기 나타날 수 없으니. 우리를 제외하고 말이야.”
페르오는 이제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저자가 순리를 거스른 대가로 발생한 부작용일 거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정도의 검력을 가진 존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날 리 없었다.
근데, 그렇다고는 해도.
“대체 어딨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지?”
그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예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하려나 보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람이 평야의 비틀림을 싣고 왔다.
콰아아아아.
흐릿하게 뻗어지던 백색 섬광 위로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가 타오른다.
쩌어엉-!
그것이 부딪칠 때마다 대기에 거대한 균열이 이는 듯했다. 허공에 투명한 파동이 일며 시공간이 통째로 몸을 떨었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선명한 울림이었다. 일반인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멀찍이 떨어져 있음에도 심한 내상을 입었을 거다.
그만큼이나 강맹한 충격파가 파도처럼 계속해서 밀려오고 있었다.
페르오가 전장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누가 이기든 이긴 쪽도 멀쩡하지는 않겠는데?”
“내 생각도 그래.”
두 개의 검이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사납게 흩날리고 있었다. 지금 상황으로는 한쪽이 우위를 점한다기보다 비등했다. 어느 쪽이 이기든 온전한 승리를 가져가기는 버거울 것처럼 보였다. 승자 또한 큰 부상이 있을 테지.
예리아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쳇. 만약 흰 사자가 이겨도 산송장 치우는 격이겠네.”
“그건 그거대로 아쉽긴 하겠다. 그래도 어쩌겠어.”
페르오가 말을 이었다.
“반드시 죽이라는 폐하의 명이 있었으니, 그리해야지.”
* * *
내가 그려 낸 궤적을 뚫고 들어오는 섬광이 있었다.
찰나를 비집고 들어오는 검격.
등골이 싸할 정도로 서늘한 검이었다.
그 속도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공간을 도약하듯 뻗어진 칼끝이 우측 어깨 앞에 놓여 있다.
나는 어깨를 트는 동시에 검을 당겼다.
앞으로 나아가던 검이 일순 그의 팔을 노리고 휘어진다. 그의 검이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가 다시금 쏘아졌다.
마치 폭발하듯 뿜어지는 섬광.
정말이지.
미칠 듯이 빠르다.
콰과과과광-!
여러 개의 소리가 하나의 소리로 압축되어 터져 나온다.
한 호흡이 끝나기도 전에 수십에 이르는 검격이 오갔다.
칼날을 타고 뿌려지는 강기는 그 궤도와 범위가 평야를 가로지를 듯 길었다.
간격이 무의미해졌다.
가까이 있으나 멀리 있으나, 우리의 검은 서로의 숨통을 노릴 수 있었다.
시간이 일그러졌다.
세계가 멈춘 듯한 느릿한 시간 속에서도 흩뿌려진 검광은 세찬 빛살이 되어 평야를 내달렸다.
그와 나는 완전히 다른 시공을 걷고 있었다.
모든 시간이 멈추고 모든 간격이 지워진 세계에서 우리만이 제 속도를 갖고 엇갈렸다.
얼마 만인가.
이 세계에 함께 발을 디딜 수 있는 자를 만난 것이.
전신을 옥죄던 구속구를 모두 풀어놓고 전력으로 질주하는 기분이었다.
마구간에 갇혀 있던 말이 평원을 질주하는 기분이랄까.
간만에 나는 마음껏 검을 뿌리며 속도감을 즐기고 있었다.
그것을 따르는 위태로움이 나를 더욱 고양시킨다.
그래.
전장에 선 기분이다.
이것이 진정 검을 휘두르는 희열이었다.
이 감정을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녀석 또한 마찬가지.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검을 나누는 것만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걸어온 검이 낱낱이 풀어진다.
절정에 이른 속도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간격을 지워낸 신속의 검이 계속해서 나를 몰아붙였다.
나 또한 내 검을 보였다.
내가 지나온 길을 풀어냈다.
정점에 선 고독.
적수가 없는 것에서 오는 무에 대한 갈증.
그것이 해소되고 있었다.
그의 검을 보고, 나의 검을 보이며.
검과 검이, 세계와 세계가.
맞물리며 폭발한다.
콰과과과과광!
천지를 메우는 폭발음.
그것마저도 갈라내는 검격이 쏘아진다. 벼락같은 강기가 공간을 찢고 시간을 자르며 들어오고 있었다. 사선으로 떨어지는 궤적에 세계의 전면부가 지워지는 듯했다.
천령신공 검법편.
광풍의 장(章).
제3장 낙화유검(落華流劍).
저돌적으로 쏘아지는 강기 앞으로 하늘하늘한 꽃잎이 휘날린다.
내력의 속성이 바람을 품었다.
콰아아아-!
세찬 바람을 탄 꽃잎이 어지러이 흩어졌다. 폭풍을 올라탄 듯 사납게.
꽃잎이 눈보라처럼 일대를 뒤덮으며 세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일순, 하나의 꽃잎 앞으로 하나의 섬광이 쏘아진다.
꽃잎의 중심을 정확히 꿰뚫는 검강.
적의 검이었다.
무수한 꽃잎의 중심이 모조리 그의 검에 꿰뚫린다. 그의 검은 소리마저 삼키며 쏘아지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궁!
음파를 가르는 속검에 공간이 비틀리듯 몸부림쳤다. 동시에 꽃잎을 꿰뚫던 무수한 섬광이 모여 하나의 검날로 빚어져 다가온다.
그 빛살이 어찌나 휘황하고 거대한지, 수직으로 선 빛의 해일이 밀려오는 것 같다.
검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정면으로 부딪치고자 마음을 먹었다.
천령신공 검법편.
제2장 흑관섬(黑貫閃).
뒤로 당겨졌던 검이 찰나에 앞으로 밀어진다.
지금껏 한 번도 선 보인 적 없는 전력의 찌르기.
한 줄기 빛살이 칼끝에서 뻗어 나간다.
콰아아아아!
적의 검에 비하면 좁쌀만큼 작은 푸른 섬광.
압축되고 압축되어 하나의 환 형태로 조성된 검환. 그것이 앞으로 쏘아지며 기다란 선을 그린 것이다. 유성우처럼 가느다란 꼬리를 그린 강기가 빛의 해일의 중심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그것이 부딪쳤다.
쿠과과과과과!
바르안이 빚어낸 거검이 칼끝부터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깨져 나간다.
푸른 섬광이 그 거대한 빛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렇게 산산이 부서진 강기의 파편들 사이로 바르안이 짓쳐들었다.
그는 부서진 칼날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또다시 새로운 검을 들이밀었다.
수평으로 들이치는 무수한 가시가 있었다.
밤하늘을 메우는 별처럼 빽빽한 빛 무리였다.
은하수를 형성하던 별들이 와르르 쏘아지는 듯했다.
나는 그것에 맞서 검을 그었다.
천령신공 검법편.
제4장 광휘폭검(光輝爆劍).
일순 반원으로 폭발하는 발광체.
나를 중심으로 피어난 빛의 반구체가 창졸간에 공간을 집어삼킨다. 그 넓은 반경의 면으로 별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과광!
온몸을 망치로 두드리는 듯한 충격파가 검망을 타고 들어온다.
나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반구체 안에서 새로운 반구체가 자라나고 또다시 피어나며 겹겹이 쌓여 갔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검격은 내가 짜낸 방어벽을 하나씩 쳐부수며 밀고 들어왔다.
콰아아아아-!
그러다 마침내 모든 검망을 찢어발기며 들어오는 섬광.
강기로 만들어진 벽을 단칼에 가를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검이었다. 나 또한 쉬이 볼 수 없다.
천령신공 검법편.
벽력의 장(章) 뇌정(雷霆).
콰자자자자작!
한 줄기로 모여든 뇌기가 적의 강기를 힘으로 압도하며 쓸어버린다.
사방의 공간을 찢어발기는 검격이 그의 검을 뚫고 나서 그에게까지 쏘아졌다.
번지는 뇌기가 괴조의 형상을 하며 비행했다. 바르안은 물러서지 않고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 냈다.
콰아아아아앙-!
천지가 무너지는 굉음이 일었다.
일대의 지반이 갈라지며 깊은 수렁을 만들어 냈다.
자욱이 피어난 먼지구름.
그것이 흩어지며 그 중심에 선 바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옷은 이곳저곳이 해져 있었다.
그 사이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흐른다.
하나, 경상.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꽤 매서운 검격이군.”
“받아 낼 줄 알았다.”
그 또한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이르렀음을 나는 쉬이 알았다.
한 명의 절대자가 가지는 기운.
이것은 소드 마스터 여럿이 힘을 합친다고 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홀로 오롯이 선 검만이 가질 수 있는 위엄이 그에게 있었다.
잠시 호흡을 고른 우리는 서로를 향해 다시금 치달았다.
콰앙!
발끝에 지반이 터져 나간다.
다시금 이어지는 격돌의 시간.
전장은 쉽사리 마무리되지 않았다.
두 개의 검은 지치지 않고 얽혔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전장의 향방이 드러난 건,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가며 세상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할 때였다.
“헉헉…….”
적막에 잠긴 평야.
거친 호흡만이 들려온다.
이곳저곳이 해진 제복.
처음과 달리 흐트러진 백발.
그는 입가에 핏물을 흘리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검격이군.”
바르안이 검을 쥔 손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의 왼팔은 날아가 있었다.
바르안의 눈가에는 여러 복잡한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왜 지금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지?”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물었다.
“대체 그 검은 뭔가? 발렌시아 대륙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데.”
“천령신공.”
“……굉장히 낯선 이름이군.”
그럴 만도 했다. 이 검은 중원의 것이니.
내가 말했다.
“검력이 극에 이르렀더군.”
그는 그저 씩 웃었다.
대륙 제일검 바르안 알센도르.
그의 검은 확실히 강했다.
천마에 비하면 조금 부족하기는 해도, 현경에 이른 자였다.
그것도 발렌시아 대륙에서, 최초로.
바르안이 말했다.
“이 벽은 나 혼자만 넘었다고 생각했거늘, 그런 자가 또 있을 줄이야. 역시 대륙은 넓군.”
발렌시아 대륙에 소드 마스터 위의 경지는 없었다. 그 또한 그 벽이 무엇인지 모르고 넘었을 터였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
“?”
“그것이 너의 경지다.”
“……그런가.”
“내가 기억해 주지.”
“그거 참 고맙군.”
바르안이 검을 고쳐 잡는다.
“후.”
그러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준비가 된 듯했다.
나도 묵묵히 검을 잡았다.
태양이 대지에 잠기며 마지막 빛을 토해 내듯, 바르안 또한 전력을 칼날에 담았다.
쿵!
그의 신형이 증발하듯 흩어진다.
동시에 내게 겨눠지는 막대한 적의가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에 놓인 공간이 반으로 갈라진다.
속도의 한계를 돌파하며 가속한 검이 내게 쏘아졌다.
나 또한 그에 맞서 검을 그었다.
전력을 다한 검.
천령신공 검법편.
극의(極意) 파천(破天).
하늘의 법령을 품은 무공이, 그 마지막에 이르러 하늘마저 부순다.
콰아아아아-!
앞에 놓인 모든 것을 가르고 다가오는 검격을 가르는 검격이 있었다.
손끝에서 뿜어진 궤적이 바르안의 혼신의 전력을 가르며 뻗어 나간다.
하나의 세계가 갈라진다.
그가 세운 찬란한 검이 산산이 부서진다.
노을빛이 그 파편에 아롱졌다.
촤아아아악!
감각이 극도로 발달하여 시간축이 늘어지고 늘어진 세계.
그 안에서조차도 희끗한 잔영을 남기며 쏘아진 검격.
그것이 바르안의 몸뚱이를 가르고 지나쳤다.
휘이이이이.
기다랗게 잘려 나갔던 공간이 다시 붙으며 돌풍이 높고 가느다란 소리를 내었다.
지난 20년간 발렌시아 대륙을 덮고 있던 하늘이 찢겨졌다.
그리고 그 위로 새로운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