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제158화 대륙 제일검 (2)
츠미온이 눈을 반짝였다.
이 지겨운 대치 상태도 그날에 맞춰 끝이 날 터였다. 바르안 경의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었고.
“날은 언제로 잡으면 되겠습니까?”
“일주일 후가 적당할 듯하군.”
일주일이면 아군이건 적군이건 승패에 대한 기대감이 절정에 이르렀을 터. 그만큼 그 결과에 대한 여파도 커지리라.
바르안은 그것을 노렸다.
언제나 그렇듯, 승리를 자신하기에.
“예. 그렇게 통보하겠습니다.”
테이난 쪽에서도 거절하지는 않을 거다. 기껏해야 날짜 조율을 하려 할 테지. 그들 또한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니.
‘기대되는군.’
바르안은 머릿속으로 레트로이나 6검의 단장, 케이언을 떠올렸다. 그는 곧게 선 검이었고, 충절을 품은 기사였다. 케이언의 어린 시절을 봐 왔기에 그의 검을 잘 알고 있었다.
태양의 검, 레트로이나를 손에 쥔 이후에는 더욱 날카로워졌었지.
그가 단장이 되어 이끌던 레트로이나 6검은, 레트로이나 특임기사단 창설 이래 가장 막강한 전력이라 평가될 정도로 전장에서 훌륭한 전과(戰果)를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한 사내에게 멸절했다.
소드 마스터마저 감당치 못할 거라 여겨지던 여섯 개의 검이 하나의 검에 꺾였다.
흰 사자의 검이 궁금하지 않을 리 없었다. 세월에 가라앉아 있던 투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길었던 권태에서 바르안은 벗어나고 싶었다.
20년 전 대륙 제일검에 오른 이후, 그는 외딴 섬에 홀로 남은 기분이었다.
그를 향해 검을 들이미는 존재도 없을뿐더러, 적수가 없었다.
홀로 망망대해를 나아가는 기분이랄까.
검을 쥔 후부터 도달하고자 했던 정점이었지만, 그 첨단에 발을 디디고 나니 성취감은 잠시였고 절대자로서의 기나긴 고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 권태로운 길을 자신의 검에 의지한 채 묵묵히 걸었다. 그렇게 지금껏 아무도 디디지 못했던 길 위에 올랐다.
때문에 흰 사자의 존재가 반갑기도 했다.
지금까지 벌인 일만 보아도, 그의 검은 막강할 터였다.
* * *
적진에서 기별이 왔다.
일주일 뒤 흰 사자와 무한의 속검 간에 일대일 생사결을 벌이자는 내용이었다.
무한의 속검이 적진에 도착한 듯했다.
그들의 제안은 구체적이었다.
장소부터 참관 인원까지 제한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불리할 것은 없는 내용이었으나, 그렇다고 유리할 것도 없었다.
어쨌거나 공정한 대전이 될 터였다. 일부러 그리한 듯하다. 그들 또한 승리를 자신하고 있겠지.
우리 쪽에서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말했다.
“제안을 따르도록 하지.”
“자네가 그렇다면야.”
카드론이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식탁 위로 각양각색의 한숨이 일었다.
“에효.”
“휴우.”
“크흠.”
이리엘, 알렌, 네더만 순이었다.
“크릉.”
그 뒤를 네스가 따랐다. 식탁은 침잠된 분위기였다. 다들 초상이라도 치른 것처럼 표정이 거무죽죽하다. 카드론의 얼굴도 어딘가 썩어 있었다.
카드론이 말했다.
“마음이 편치는 않군.”
“네가 싸우냐.”
“상대가 상대이지 않나.”
카드론이 겸연쩍게 말했다. 네더만도 말을 보탰다.
“대륙 제일검이라고, 대륙 제일검.”
그 또한 얼굴 한편에 근심이 어려 있었다.
“이 넓디넓은 대륙에서 제일가는 검이란 말이지. 무려 20년 동안 그랬네. 역대 최연소로 소드 마스터에 오른 사람이라고.”
“이제 최연소가 아니지.”
내 나이는 마흔여섯이다. 그는 마흔여덟에 소드 마스터에 올랐다고 했다. 당연히 이제 그 자리는 내 차지였다.
“맞네, 맞아. 이제 자네가 최연소지. 부럽구만. 하지만 말이야, 그게 무려 20년 전이란 말일세.”
“그래서.”
“아니, 그냥 그렇다고. 자네의 강함이야 당연히 알지만, 어딘가 껄쩍지근하달까.”
알렌도 옆에서 말을 보탰다.
“맞아요. 제네스 님이 강한 줄은 저희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죠.”
알렌이 입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무려 20년 전에 최연소로 소드 마스터에 오른 사람이라구요. 그 또한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아니란 법도 없잖습니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들의 걱정은 백 마디 말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객관의 요소가 제거된 주관적 불안.
그들은 나의 무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다. 그저 불안한 거다. 나의 패배가 백 번 중에 한 번 일어날 희박한 확률을 가진 일이라 해도 말이다.
나의 패배로 프렌치아 임시정부가 잃게 될 것들은 무수히 많았다.
나의 죽음은 우리가 지금껏 쌓아 올린 것들을 모조리 무너뜨릴 터였다.
프렌치아 임시정부는 내 존재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것이 저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다.
나의 패배가 그들의 희망과 미래를 모두 앗아 갈 것이기에.
본래 잃을 게 많을수록 불안한 법이다.
하물며 그것이 굉장히 소중한 것이라면, 오랜 시간 동안 간절하게 염원해 왔던 것이라면.
더 불안하겠지.
이들에게는 내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패배할지도 모를 그 1할의 가능성이 내가 승리할 9할의 가능성보다 더 크고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지금 이 현실이 눈앞에서 꿈결처럼 사라질까 봐.
“이제 내 말을 믿을 때도 되지 않았냐.”
내 말에, 알렌은 얼굴을 붉히며 딴청을 부렸다. 이리엘이 죄 지은 사람처럼 말꼬리를 흐렸다.
“그래도 걱정되는 걸 어떡해요오…….”
“일주일 후면 결판이 날 테지만, 어쨌거나 내가 질 일은 없다. 그리고 그때.”
나는 축 늘어진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대륙 제일검이될 테지.”
“크으-.”
네더만이 감탄하며 내게 엄지를 세워 보였다.
“정말이지 멋진 포부야. 자네 실력이라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래, 분명 그럴 테지. 나는 믿고 있다고. 이번에도 멋들어지게 이겨 주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 친히 관을 짜 놓으려고 하는데, 자네 키가 어떻게 되나?”
“네 키에 맞추면 될 거다.”
“그래? 나보다는 자네가 더 큰 거 같은데.”
“상관없다. 그 관에 눕는 건 너일 테니까.”
스릉.
식겁한 네더만이 손사래를 치려는 찰나, 이리엘이 난데없이 소리쳤다.
“그래도 저는 제네스 님 믿어요!”
그녀의 뜬금없는 포부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몰렸다.
“그, 그게 제네스 님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잖아요! 게다가 적군보다 아군을 믿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분명 제네스 님이 이길 거라구요. 촤하하!”
호탕한 척 허리까지 꺾으며 웃어 보이는 이리엘.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상당히 민망해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얼굴이 터질 듯 붉었으니까.
아무래도 또 혼자 만의 세상에 빠져 있었나 본데.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 * *
흰 사자와 무한의 속검의 생사결이 일주일 후에 펼쳐진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테이난을 달궜다.
모두의 관심이 생사결로 모여들었다.
흰 사자는 대륙 제일검과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게 될 터였다.
둘 중 승리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고, 그자가 다시 대륙 제일검이 될 거다.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고, 또 들뜨게 했다. 프렌치아에서 대륙 제일검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생사결은 어디서 벌인다던가?”
“성문 앞, 평야에서 벌어진다던데.”
“그럼 성문을 열고 나가야 된다는 이야긴데.”
“설마 그들이 다른 짓을 하겠나. 그들도 명예가 있을 건데.”
“하긴. 그런 비겁한 짓을 하지는 않겠지.”
사람들의 불안과 기대가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생사결의 결과에 따라 벌어질 파장은, 조금만 생각해도 어마어마했다.
무한의 속검이 패해도, 흰 사자가 패해도.
프렌치아는 크게 뒤집어지고 말 터였다.
생사결의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그날부터 밤잠을 아끼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작은 웅성거림이 모여 테이난의 밤을 흔들었다.
각자의 바람이 하나의 구체성을 띠고 모여들고 있었다.
반면, 제국군의 분위기는 차분하게 흘렀다.
누구도 무한의 속검의 패배를 예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결정된 승리를 확인할 날을 기다릴 뿐이었다.
상대가 흰 사자라고 해도, 바르안은 제국에서 제일가는 검이었다. 더군다나 지난 20년간 정점에 올라 있던 그였다. 무한의 속검의 패배는 그들 사전에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레트로이나가 제국의 자존심이었다면, 무한의 속검은 제국의 자부심.
그들은 벌써부터 오지 않은 승리를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군영으로 낯선 그림자가 드리웠다.
해가 지평선에 반쯤 삼켜졌을 때였다.
붉게 흩뿌려지는 노을 사이로 두 개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한 쌍의 젊은 남녀.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풍모에 경계병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둘은 모두 흑색의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왼쪽 가슴팍에 새겨진 블랙 드래곤의 주위로 금수실로 수놓인 마법진의 형태와 비슷한 문양이 있었다. 병사들은 처음 보는 문장이었으나, 그것이 황가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쯤은 쉬이 유추할 수 있었다.
“죄, 죄송하지만 신분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안으로 드실 수가 없습니다…….”
병사들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칫 잘못 대응했다가는 큰 사달이 날 수 있는 까닭.
정석적으로 경계하기도, 그냥 들여보내기도 애매했다. 다행히 그들은 병사의 물음에 순순히 답했다.
“황제 직속 친위대, 저스티스 소속의 페르오다. 지휘부까지 안내하거라.”
“다들 고생 많으시네요. 저희는 바르안 님을 뵈러 왔답니다.”
예리아가 싱긋 웃으며 말을 보탰다.
“황제의 직속 친위대?”
병사의 전언에 바르안은 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정확한 정체가 베일에 싸여 있었지만, 그들의 존재는 알고는 있었다.
황제가 직접 키웠다는 수족들.
근래 전장에서 암약 중이라지.
그런데 그들이 왜 여기에?
잠시 후 막사의 입구를 막고 있던 천막이 젖혀지며 젊은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바르안 알센도르 경.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스티스 소속의 페르오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예리아라고 해요!”
바르안의 시선이 그들을 훑었다.
제국에서 프렌치아에 오던 배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감춘다고 감춘 듯했지만, 그들의 기세가 평범치 않아 주의 깊게 보았던 이들이었다.
이들이 황제의 직속 친위대였다니.
자신의 뒤를 따라온 건가…….
바르안은 그들과의 만남을 짐짓 모른 척 말했다.
“황제의 직속 친위대가 예까지는 어인 일이오.”
예리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 그게요, 보니까 대련을 참관할 수 있는 인원이 정해졌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저희도 그 대련에 참관토록 해 주시길 요청을 드리러 왔답니다.”
애초에 둘은 은밀히 숨어 있다가 바르안이 패배했을 시 흰 사자를 제압하려 했으나, 생사결을 치르는 방식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면서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하나, 그 의도를 밖으로 꺼내지 않았기에 예리아의 대답은 바르안의 의문을 조금도 해결해 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바르안은 별다른 질문도 하지 않고 그들의 참관을 허가했다.
“생사결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약조를 한다면 얼마든지 그리해 주겠네.”
“물론입니다. 저희는 그저 경의 검을 견식하고 싶을 뿐입니다. 생사결에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페르오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거짓을 고했다.
어차피 자신들은 무한의 속검이 패배한 뒤에 나설 것이다. 그리 된다면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터. 지금의 이 약조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