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후 천하제일인이 되어 귀환했다-154화 (154/228)

제154화

제154화 두 개의 협곡 (3)

좁다란 협곡.

치열한 전장이 이어지고 있었다.

고함과 비명이 아군의 것과 적군의 것이 구분되지 않았다.

연합군은 후미에서 밀려드는 테이난가를 막으면서, 전방에서 들이닥치는 독립군들까지 상대해야 했다.

앞은 막혔고, 뒤로도 후퇴할 수 없었다.

어디를 보든 목덜미가 서늘했다.

퇴로가 없다는 사실은 연합군에게 극도의 불안감을 심어 주었다.

패색이 짙어지자, 병사들의 머릿속에는 살 궁리부터 떠올랐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물며 검에 꿰뚫리고 목이 베어 죽고 싶을 리는 더더욱 없다.

그들은 어떻게든 제 목숨을 지키고 싶었다.

하나, 검은 무언가를 해치기 위해 만들어졌다.

검이 상대에게 겨눠지지 않고 본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움츠러든다면, 그것은 상대에게 죽여 달라 목을 내미는 행위와 같다.

검은 적을 베는 것만으로 주인을 지킬 수 있다.

하나, 패배와 죽음을 직감한 병사들에게 그만한 각오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때문에 사기가 떨어진 이들의 검은 무뎌질 수밖에 없다.

반면, 사기충천한 검은 승리의 확신을 담아 적을 겨눈다.

적의 몸을 꿰뚫는 것으로 본인의 몸을 지킨다.

전장의 승패에 있어 병사들의 사기와 의지는 그만큼 중요했다.

더군다나 애초부터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달랐던 두 진영이었다.

전장의 양상은 한쪽으로 가파르게 기울어졌다.

어느새 유혈이 낭자한 협곡 위로 동이 터 오르고 있었다. 여명의 빛이 피 묻은 갑옷에 닿으며 부서져 내렸다.

아침이 밝아 온 지금.

서 있는 자든 누워 있는 자든.

산 자든 죽은 자든.

모두 피에 절어 있었다.

전장의 승자는 태양빛 아래 쉬이 드러났다.

높게 쌓인 토성은 반쯤 허물어졌지만, 밤을 버텼다. 그리고 그 앞에 적의 후미부터 달려온 테이난가의 병력들이 있었다.

카드론과 네더만이 리포드와 드라칸과 눈을 맞췄다.

그들 사이에 적은 없었다.

“전쟁은 끝났다-!”

“우와아아-!”

“우리의 승리다-!”

승리의 함성이 협곡을 울렸다.

살아남은 이들은 테이난가의 깃발과 프렌치아 임시정부의 깃발을 들고 연신 우렁찬 함성을 질러 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지쳐 있던 이들이 고래고래 악을 쓰며 소리를 질러 댔다.

드로타니아 평원에서 집결하여 피노센을 점령하고자 호기롭게 진군했던 연합군의 병력은, 피노센의 성벽을 보지도 못한 채 전멸했다.

* * *

흰 사자를 피해 회군을 선택했던 페치말로는 저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저 빌어먹을 X끼!”

흰 사자가 뒤편의 니세라닌 협곡으로 들어서는 길을 떡하니 막고 서 있었다. 그가 길을 막을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대군이 움직이는 길을 예측하지 못할 리 없으니까. 흰 사자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도 없었고.

하지만 그럼에도 열받는다.

“그냥 밀고 지나간다.”

피해를 감수하는 것 외에는 어차피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럼에도 먼 길을 돌아온 것은, 지금은 그나마 밀고 지나갈 수라도 있으니 강을 건너는 것보다야 피해가 적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니세라닌 협곡은 우거진 수림을 품은 골짜기였다.

많은 병력이 지나가기에 좋지는 않지만, 흰 사자의 움직임도 원활하지만은 않을 터.

아무리 녀석이 강하다 해도 협곡 전체를 막아서지는 못할 거다.

“전속력으로 전진한다!”

나는 저 멀리서 밀려오는 제국군의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이 까만 파도가 되어 밀려온다. 나를 무시하고 지나칠 생각이겠지.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하겠다는 의미였다. 그 수가 줄었다고는 하나, 나 또한 7만에 이르는 병력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건 해 보지 않아서 뭐라 답할 수가 없다.

하지만 못할 것도 없지.

“으아아-!”

적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지나쳐 협곡에 닿기 위해 돌격하듯 달려왔다.

끝없는 인해의 물결이 내 앞으로 흘러들었다.

파츠츠츠츳.

칼날을 타고 푸른 뇌전이 인다.

천령신공 검법편.

벽력의 장(章) 뇌정(雷霆).

뇌기를 품은 검기가 벽을 가르며 내달린다.

콰과과과과광!

전방을 쓸어버리는 검격에 전열이 뭉그러졌다. 하나, 적들은 광기에 젖은 눈빛으로 그저 달렸다. 내게 오는 것이 아닌, 나를 피해서.

나를 지나치는 것이 오로지 살 수 있는 방법이라도 되는 양.

그들은 협곡을 향해 달려갔다.

마치 물결이 바위를 타고 갈라지듯, 그들은 알아서 내 앞에서 갈라지고 있었다.

협곡은 깊었다.

그들 전부를 충분히 받아 낼 만큼 기다란 협곡이었다.

7만을 넘어가는 병사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그저 지나쳐 가는 것만으로도 꽤 긴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땅에 못 박힌 돌부리처럼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고 있다 보니.

솨아아.

병사들로 가득 찼던 시야가 훤히 트이며 청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너른 평원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적들이 모두 지나간 것이다. 나는 앞으로 걸었다. 협곡을 뒤로 두고 멀찍이 자리 잡은 뒤에, 뒤로 돌았다.

적을 삼킨 거대한 수림이 눈가에 잡혔다.

나는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돌아올 이들을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른 아침부터 나와 있었던 거 같은데, 태양은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깊은 협곡이 요란해지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고요했던 숲속에서 비명과 고함이 섞인 전장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푸른 숲 안에서 새로운 전장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수풀이 움직이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곤 병력을 삼켰던 협곡이 그것을 다시금 토해 낸다.

적들은 협곡에 매복해 있던 병사들을 피해 후퇴하고 있었다.

나를 피해 들어간 수림에는 그들을 지옥으로 이끌 덫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달려 나오는 이들의 목을 베었다.

그들의 수가 워낙 많아 모두를 베기 어려웠으나, 최대한 바쁘게 움직였다.

평원이 금세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적들의 후퇴는 계속됐다.

저편에서 밀고 들어오는 병력을 감당할 수 없는 듯했다.

봇물이 터지듯 밀려 나오는 병사들이 급류처럼 쏟아져 나왔다.

나는 무리해서 맞서기보다, 그 흐름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물렸다.

그렇게 뒷걸음질 치다 보니, 해가 저물 때쯤에는 상당히 뒤쪽까지 밀려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협곡에서는 어느새 새로운 병력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국군이 아니었다.

독립군도 아니었다.

그들은 가슴팍에 황금 독수리를 새긴 자들이었다.

아리아나 왕국의 병사들.

제국과 얼마 전까지 프렌치아 국경 너머에서 전쟁을 벌이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평야로 흩어지는 제국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섬멸해 갔다.

제국의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오합지졸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문장(紋章)의 갑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각기 하나의 인간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반면, 아리아나 왕국의 군대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하나로 뭉쳐 그들을 유린했다.

병력의 질만 보면 제국군보다 압도적인 병력은 아니었으나, 하나로 뭉친 크기가 달랐다.

적들이 모래 알갱이라면 이들은 진흙 더미다.

한 군대는 똘똘이 뭉쳐 하나의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고, 한 군대는 패닉에 빠져 제 살길만 찾아 도망치느라 바빴다.

지금의 전황이 그러했다.

입구를 막고 있던 흰 사자를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밀고 들어갔던 수림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앞으로 내달리는 것만이 최선이라 생각했을 터.

그런 상황에 난데없는 매복과 기습을 만나 속절없이 무너졌을 거였다.

게다가 그 상대는 아리아나 왕국의 정규군.

지휘관들의 머리통이 새하얗게 물들 수밖에.

병사들의 사기 또한, 그들을 보자 직각으로 고꾸라졌을 거다.

아리아나 왕국군은 내가 레트로이나 6검을 꺾었을 적부터 천천히 협곡에 진영을 구축하고 덫을 설치해 갔다.

적들이 이곳을 지나갈 것은 오래전부터 설계된 일이었으니까.

점차 마무리되는 전장으로 아리아나 왕국군의 총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옆으로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레이크, 레이나, 사르페 그리고 전격의 창, 우르노.

* * *

“모두 당신의 말대로 진행이 되었군.”

아리아나의 왕국의 사령관, 베트론이 말했다. 짧은 금발을 가진 그는 각진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베트론의 눈은 레이크의 의도대로 이루어진 전장을 담고 있었다.

“아리아나 왕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레이크는 짧게 감사함을 표했다. 표정만 봐서는 감사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워낙 표정이 없는 그였기에 진심이 무엇인지는 가늠되지 않았다.

“프렌치아의 독립을 아리아나 왕국은 바라고 있네. 돕는 건 당연한 일이지.”

거짓은 아니었다. 아리아나 왕국으로서는 프렌치아가 제국에 합병당하면서 제국과 국경이 맞닿게 되었다. 그로 인해 전면전까지는 아니지만, 국지전 규모의 전쟁이 근 몇 년간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었고.

해서, 아리아나 왕국은 프렌치아가 완전히 독립하여 제국과 자신들 사이에 성벽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제국보다야 프렌치아가 훨씬 상대하기 편하니까.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베트론은 레이크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장에 아리아나 왕국에 귀향할 의사가 없는지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음부터 아리아나 왕국이 도움을 주려고 한 건 아니었다.

프렌치아가 독립하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라지만, 그들과 함께 제국군을 격퇴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으니까.

자칫, 프렌치아가 독립하지 못한다면 이 전쟁으로 인해 제국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리아나 왕국은 프렌치아를 도왔다. 프렌치아가 독립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가 처음 이 작전을 제안해 온 건 무려 세 달 전에 일이었다.

그때는 총독 할렌트 바레인 또한 건재했고, 흰 사자의 위명은 국경을 넘지도 못했었다. 독립군 파벌의 통합도 이루어지지 않은 때였다.

우르노란 자가 처음 프렌치아의 사절이라고 하며 와서 동맹을 제안했을 때, 그것은 베트론의 귓가에도 닿지 못할 정도로 힘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프렌치아가 격동에 휩싸일 때마다 그의 발언의 무게는 힘을 더해 갔다.

그리고.

마침내 독립군의 통합과 흰 사자가 레트로이나 6검까지 베어 냈을 때는, 프렌치아의 가능성에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충분히 승산이 있는 전쟁이라 판단됐으니까.

제국을 프렌치아 땅에서 몰아낸다면, 전운에 휩싸여 있는 아리아나 왕국에 다시금 평안이 찾아올 터. 걸어 볼 만한 승부수였다.

“그럼 앞으로 건투를 비네.”

레이크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저 멀리 있는 흰 사자에게로 말을 몰았다. 베트론은 그 뒤를 가만히 바라보며 다시금 왕국의 병력에게 시선을 돌렸다. 평야에는 승리의 함성이 가득 차 있었다.

레이크를 따르던 사르페는 그런 이들을 둘러보며 입술을 꾹 물었다. 다른 왕국의 힘을 빌려 제국군을 전멸시키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르페가 적의 무덤이 된 평야를 보며 말했다.

“모두 레이크 님의 말씀대로입니다. 대체 어떻게 적의 움직임을 모두 예측하신 겁니까.”

레이크는 언제나처럼 무심한 태도로 답했다.

“저라고 어떻게 적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미래를 보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런데 모두 레이크 님 말씀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그게 예측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물길을 비트는 법을 알고 계십니까.”

“물길이요?”

“예.”

“……배수로를 파면 될까요?”

사르페는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레이크가 말한 물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비틀 수 있는 물길이라면 배수로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네, 맞습니다. 흐르는 빗물은 새 고랑만 내어도 손쉽게 방향을 틀 수 있지요. 하지만 그 물길이 강물이라면요?”

“……그건 무리겠지요.”

강물을 비틀 만큼의 배수로라.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요?”

“물길을 비틀기 위해서는 고랑을 팔 힘이 필요합니다. 비틀어야 할 물길이 거대할수록 더 큰 힘이 들겠지요.”

“뭐, 그렇겠죠.”

“한데 어떤 물길이라도 비틀 수 있는 힘이 저기 있습니다.”

레이크는 저 멀리 서 있는 흰 사자를 보고 있었다.

“저는 앞날을 예측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길 앞으로 고랑을 낸 것뿐이지요.”

“…….”

“책략이란 본디 그런 것입니다. 적이 제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고랑을 내는 일이지요. 그것이 막연한 예측보다는 명확한 결과를 가져오거든요.”

“그, 그렇군요.”

사르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어쨌거나 제네스 님의 무력이 상황을 수월하게 만들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제게 물길을 비틀 힘이 있어, 상황이 한결 쉬웠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제 첫발을 디뎠을 뿐이지요.

레이크는 이어지는 뒷말을 조용히 삼켰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다음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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