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제149화 오르엔 대교 (1)
드로타니아 평원.
드넓게 깔린 대지 위로 각양각색의 깃발이 모여들고 있었다.
활공하는 와이번의 테이난가.
하얀 매, 크로단가.
검은 멧돼지, 하리아디가.
이 세 개의 가문 외에도 각기의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이 평원 곳곳에서 펄럭였다.
총독부의 요청으로 지원을 보낸 근방의 가문들과 세 가문의 봉신 가문들까지 포함하여, 군사의 수는 물경 5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개중 가장 많은 병력을 투입한 건 7,000에 이르는 군사들을 이끌고 온 테이난가였다.
임시 연합군의 지휘부 막사.
“모두 먼 길을 오느라 고생 많았소.”
총사령관을 맡은 카드론이 가문을 대표하는 이들과 함께 작전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독립군들의 뿌리를 뽑지 못한다면 앞으로 더 어려운 전장이 될 거란 걸 다들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오.”
그는 비장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 말을 이었다.
“피노센에서 도망친 병력의 말을 따르면 흰 사자가 아직 건재하다는 이야기가 있소만, 그 또한 인간. 최근 바레인가부터 트레왈로가에 레트로이나 6검까지, 체력적인 한계에 봉착해 있을 확률이 높소. 또한, 남동부에 주둔하고 있는 8만의 제국군도 피노센으로 향할 것이라 하니, 병력의 수만 13만이요. 아무리 그라도 혼자서 우리 모두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오.”
카드론의 말에 다들 긴장된 낯빛을 서서히 풀었다. 그의 말마따나 아무리 흰 사자라고 해도 양동 작전이 펼쳐지는 대규모 전장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큰 규모의 병력을 모을 생각까지는 없었으나, 총독부와 여러 가문의 지원으로 우리의 병력은 피노센을 함락하기에 충분하오. 그 부분에 대해 지원을 아끼지 않은 총독부와 먼 길을 달려와 준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먼저 드리는 바요. 그럼 이제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소.”
이후 지휘부에 모인 이들은 카드론을 중심으로 프렌치아 임시정부의 움직임을 토대로 전장에서 벌어질 다양한 경우의 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는 다른 가문의 의견 또한 적극적으로 반영하며 회의를 지속했다.
다급한 발걸음이 막사에 닿은 것은 여전히 열띤 이야기가 오가던 중이었다.
“사령관님! 도시에서 온 전령입니다!”
다급한 표정의 기사.
그는 카드론에게 한 장의 서신을 건넸다. 그것의 내용을 읽은 카드론의 표정이 일순 딱딱하게 굳는다.
“흐음.”
카드론이 낮게 침음하자 크로단가의 가주, 히도르센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흰 사자가 다음 가문을 공표했다고 하는군.”
일순, 크로단가와 하리아디가 가주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평원에 결집해 있던 이들은, 관련된 정보에 대해 아직 아무런 기별도 받지 못한 상황. 본인들의 가문이 지목되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피노센에 남을 줄 알았던 흰 사자가 새로운 가문을 공표하다니.
새로이 생겨난 변수였다.
연합군을 흔들려는 적의 계략일 수도 있으나, 지목된 가문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만약 공표가 사실이라면, 이번 전장에서 승리하더라도 지목된 가문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될 테니.
“그가 공표한 가문은…….”
모두의 눈길이 카드론의 입가로 모였다.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긴장된 장내에서 카드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테이난가군.”
짧은 침음이 흘렀다.
테이난가는 현재 연합군에 가장 많은 병력을 투입하기도 했고, 가주인 카드론은 총사령관의 직위를 맡고 있었다. 그의 결정에 따라 연합군의 결속력이 흔들릴 수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카드론이 입을 열었다.
“모든 일은 사전에 협의했던 그대로 진행하겠소.”
카드론의 말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분위기가 한결 풀어졌다.
“그럼 지난번 협정의 내용대로 우리는 최후방으로 빠지도록 하고, 총사령관의 직위는 하리아디가의 가주이신 알롱드 백작께 위임하도록 하겠소.”
“모두 잘 해결될 것입니다.”
알롱드는 사령관의 견장을 받으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이들 또한 흰 사자가 가문을 공표하는 경우의 수를 생각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에 따른 상황 또한 협정의 내용에 들어가 있었고.
하나, 그것을 정확히 이행할지는 또 다른 문제.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탓이다.
나라까지 변절한 마당에 협정이라고 번복을 하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테이난가는 협정의 내용을 따르겠다고 명백히 선언했다.
찝찝했던 마음이 한결 개운해질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이로써 선봉에 섰던 테이난가는 최후방으로 빠질 것이다.
그렇다고 계속 후방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본래 테이난-하리아디-크로단의 순으로 선봉을 맡기로 한 것이, 하리아디-크로단-테이난으로 바뀌었을 뿐. 지목당한 가문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 카드론이 굳은 결의를 품은 듯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거듭하자면, 이번 전쟁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오. 적들을 뿌리 뽑지 못하면 우리가 되레 당할 수 있으니, 잠시 가문의 이익은 내려놓고 하나가 되어 움직이도록 합시다.”
가문의 위협을 목전에 둔 카드론이 말하자 그 말에 더욱 힘이 실렸다. 다들 흰 사자가 공표한 가문이 자신의 가문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진군하도록 하겠습니다.”
새로운 총사령관 알롱드가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평원을 가득 메우고 있던 군대가 반듯이 정렬한 채 이동하기 시작했다.
5만에 이르는 병력이 움직이자, 개미 떼가 평야를 가로지르는 듯했다.
* * *
적의 움직임은 우리 쪽에서 예측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테이난가가 적의 작전을 진두지휘하고 있으니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럼 부탁할게.”
루시안의 말이었다.
나를 비롯한 알렌, 이리엘, 레이크, 레이나, 사르페는 모두 루시안이 머무는 시청의 정원에 모여 있었다.
여정을 떠나기 위함이다.
이번 전장은 두 곳에서 벌어질 터였다.
때문에 작전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그룹을 나누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떨어지는 게 얼마 만인지.”
루시안은 레이크를 보며 씩 웃었다.
“8년하고 7개월 만입니다.”
“……그걸 말하고자 한 건 아니었는데. 어쨌거나 몸조심하고.”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사르페가 제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레이크의 호위는 레이나와 사르페가 맡게 될 터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레이크의 말을 끝으로 우리는 길을 떠났다.
피노센에는 루시안, 네더만, 리포드, 드라칸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우리는 레이크 일행과도 작별한 뒤 따로 길 위에 올랐다.
나와 알렌, 이리엘, 그리고 네스는 남동부를 향해 빠르게 달렸다.
우리의 목적지는 스도스.
프렌치아에서 가장 거대한 도개교를 가진 성이었다. 변절자 스도스 가문이 통치하고 있는 이 성은, 프렌치아의 4대 강이자 남동부를 가로지르는 오르엔강의 원줄기를 끼고 지어진 성이었다.
스도스성을 지나는 오르엔강의 폭은 50m에 이를 정도로 넓었고 유속이 빠르고 조류가 있어, 나룻배가 아닌 초대형 도개교를 구축하여 강을 건너고 있었다.
“와. 진짜 엄청 크네요.”
알렌과 이리엘이 오르엔 대교라 불리는 그 거대한 도개교를 보며 감탄을 토해 냈다.
“이렇게 커다란 다리를 만들 생각을 했다니.”
오르엔 대교의 총길이는 강의 폭인 50m를 당연히 넘었고, 가로 폭도 10m는 되어 보였다. 그 위로 사람들과 마차가 꾸준히 오가고 있었다. 둘은 한동안 오르엔 대교를 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정보는.”
내 물음에 알렌이 눈을 반짝였다. 내가 이곳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두 녀석은 스도스에 있는 혁명의 칼의 대원들과 접촉하고 왔기 때문이다. 알렌은 주변을 슥 둘러보고는 내게 조용히 속삭여 왔다.
“현재 제국군 병력이 일주일 거리에 있다고 합니다.”
8만에 이르는 대군이 움직이고 있었다. 대놓고 움직이는 그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적들은 이곳을 향해 진군하고 있을 터였다.
남동부 끄트머리에서 주둔하고 있던 그들이 피노센으로 가기 위해서는 오르엔강을 건너야 하는데, 대규모 병력이 움직이려면 이 오르엔 대교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라 니세라닌산(山)을 끼고 이동하는 방법도 있지만, 대교를 이용하는 것보다 시간이 일주일은 더 소요될 거다.
그 때문에 그들은 오르엔 대교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스도스 가문이 있는 이상 그들이 이 대교를 건너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곳에 왔다.
이리엘이 물었다.
“언제 움직이시려고요?”
“적들이 이틀 거리까지 왔을 때.”
굳이 먼저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그들이 다리를 건널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이곳에 다다랐을 때여야 했다. 그래야 별다른 수를 생각지 못하고 우리의 뜻대로 움직여 줄 테니.
그렇게 5일의 시간이 지났다.
적은 어느새 이틀 거리에 도달해 있었다.
이제 움직일 시간인 거다.
나는 롱 소드를 패용하고 흰 사자 가면을 쓴 채, 거처를 나섰다.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른 늦은 시각.
스도스 가문이 거주하고 있는 내성에서 밤잠을 깨우는 굉음이 울었다.
콰아아앙-!
터져 나간 성문의 잔해가 뿌연 먼지와 함께 흩어진다.
“저, 적이다!”
당황한 경계병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검을 늘어뜨린 채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모조리 정리해야 했다. 급할 필요는 없었다.
“뭐, 뭐야?”
내 앞을 막으며 검을 겨눈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들의 낯빛이 일순 거무죽죽하게 굳는다.
우왕좌왕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들.
“흰 사자다! 흰 사자가 왔다!”
그들은 사형대로 끌려가는 얼굴을 한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나는 그런 이들을 향해 쏜살같이 쇄도해 갔다.
길게 뻗은 칼날 위로 푸른 검기가 타올랐다.
콰과과과광!
일대를 단숨에 휩쓸어 버리는 검격.
휘황한 섬광이 적의 전열을 무참히 뭉개 버리고 있었다.
바레인가와 트레왈로가에 비하면 한참이나 낮은 수준의 병력들.
나의 걸음을 잡을 수 있는 이들은 이곳에 존재치 않았다.
나는 칼날에 사정을 두지 않고 적들을 베어 냈다.
“끄아악!”
“도망쳐!”
압도적인 무력에 적들은 대항하기보다 이리저리 도망치기 바빴다.
나는 쥐새끼들처럼 흩어지는 병사들 사이를 가로질러 손쉽게 스도스 가문의 가주를 마주할 수 있었다.
“히익! 저자를 막아라!”
나를 발견한 그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하얗게 질리더니 주변의 기사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그는 재빨리 말에 올라 고삐를 채었다.
나와는 반대 방향.
녀석은 도망치고 있었다.
척.
나는 바닥을 구르고 있는 창을 쥐었다.
허공에 던지고 받으며 무게를 가늠하고는 녀석을 향해 힘껏 던졌다.
쿵!
디딤 발을 받아 낸 지반이 옅게 일렁인다.
쐐애애애액!
동시에 대기를 가르며 쏘아진 창.
손끝을 떠난 궤적이 어둠 속에 삼켜지듯 모습을 감추며 순식간에 도약했다.
콰아앙-!
멀리서 굉음이 일었다.
쏘아진 창은 가주의 상반신을 뚫고도 앞으로 나아가 건물에 틀어박혔다.
나는 이후에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성 내부에 프렌치아에 반하는 자들을 남겨 둘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다음 날 오후.
스도스성을 깔끔히 정리한 나는 외성에 올라 오르엔 대교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우웅.
대교 위로 마법진이 피어올랐다.
다리 위로 마법의 수식이 적힌 푸른 선들이 넝쿨처럼 타고 올라 그것을 뒤덮었다.
구구구구구궁!
이내 거대한 기둥이 뽑히는 듯한 굉음과 함께 대교의 중앙부가 반으로 갈라지며, 마법의 수식으로 덮인 다리가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