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제146화 전쟁의 서막 (1)
트레왈로가(家)가 무너진 다음 날.
우리는 작렬하는 태양을 떠나 남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금방 다시 보자고!”
리포드가 배웅 나온 부하들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제네스 님,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또 뵙겠습니다, 제네스 님!”
“저 우라질 자식들!”
툴툴거리는 리포드 옆으로 레이나와 사르페가 있었다.
한동안 더 시끄러워지겠군.
부려 먹을 이들이 많아져 편하기야 하겠지만, 그런 단순한 이유의 동행은 아니었다.
이제 전쟁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작금의 판을 뒤집을.
반격의 전장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 * *
프렌치아 전역이 활화산처럼 끓어올랐다.
흰 사자가 레트로이나 6검을 꺾었다.
제국의 자존심이라 불리던 검이 부러진 것이다.
이 이야기는 프렌치아를 넘어 대륙의 끝을 향해 질주했다.
또 한 명의 소드 마스터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인정될 터였다.
본래 프렌치아 국경 인근에만 뜬소문처럼 떠돌던 이야기가, 레트로이나 6검을 통해 공증된 것이다.
주변 왕국의 시선이 패망하여 잊힌 프렌치아에 모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기, 또 하나의 소식이 프렌치아 전역을 휩쓸었다.
“그 얘기 들었는가?”
“무슨 얘기?”
“독립군이 통합됐다는구만!”
“그게 참말인가?”
“그렇대도. 확실한 정보라고. 곧 전쟁이라도 벌어질 분위기라니까.”
네 개의 파벌로 나뉘어 있던 독립군의 통합이 이뤄졌다.
‘프렌치아 임시정부’가 완전해졌다는 의미.
“제국에서 가만히 있을까?”
“가만히 안 있겠지. 하지만 처음부터 전면전을 벌이지는 않겠지.”
“하긴, 아직 실체도 없으니.”
“지금 임시정부에서 병사를 모집하면 지원하겠다는 이들이 산더미라네.”
“나도 지원해야지! 이대로 제국 놈들의 밑구멍이나 빨면서 살 수는 없잖은가!”
군중의 입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의 희망은 갈수록 크게 부풀어 널리 퍼져 나갔다. 하지만, 빛이 짙어지면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 현 상황에 대해 우려를 가진 이들도 적지 않았다.
결국 제국의 힘을 당해 내지 못할 것인데. 전쟁이 벌어지면 엄한 사람들만 죽어 나갈뿐더러 오히려 폭정이 더욱 심해질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금방이라도 독립 전쟁이 찾아올 것 같은 분위기에, 총독부의 횡포가 잦아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칫 흰 사자에게 지목될 수 있기에, 다들 몸을 사리는 분위기였다.
그것은 공표된 다섯 개의 가문 중 남은 세 개의 가문도 마찬가지.
다음이 누가 되건 간에, 흰 사자를 막을 수 없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멸문의 공포가 그들을 휩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기감은 콧대 높은 이들을 결국 한자리에 모이도록 만들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들 많으셨소.”
카드론은 크로단가와 하리아디가의 사절단을 기꺼이 맞이한 뒤, 작전 회의실로 그들을 불러들였다.
“경들의 의견이 가문의 뜻을 대표한다고 생각해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좋군.”
그들의 대답에 카드론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즉 모이자고 할 때는 대꾸도 없다가 레트로이나 6검이 당하고 나니, 오크 무리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달려온 이들이었다.
“사안의 무거움은 다들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하오.”
카드론은 심각한 표정으로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그만큼 사안이 중대했다.
하루빨리 대응하지 않는다면 흰 사자는 세 가문 중 하나를 지목할 터.
그 전에 합의를 보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래야 본인의 가문이 지목되었을 때 최대한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게 아닌가.
세 가문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트레왈로가의 이야기는 모두 들었을 테지?”
“착잡한 일이지요.”
“그 레트로이나 6검까지 당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카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구도 레트로이나 6검의 패배를 상정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뒤늦게 자리에 모인 것이고.
제국의 검이 부러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렇다고 제국에 흰 사자를 감당할 전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국의 지원만 목 빠지게 기다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추가적인 지원이 있다 한들, 그들이 프렌치아에 당도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소요될 터.
당장을 버틸 묘책이 필요했다.
카드론은 차를 조용히 음미하고는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다들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는 걸로 알겠소.”
“물론입니다. 당연히 힘을 모아야지요.”
“특별한 방도라도 있으신 겁니까.”
크로단가의 대표로 온 베르엔이 말했다.
그의 낯빛은 어두웠다. 카드론의 요청으로 모이기는 했다만, 전력을 합친다 한들 흰 사자를 막을 수 있겠냐는 물음이었다.
크로단가의 주력 기사단의 전력은, 특임대에 미치지 못한다.
크로단가의 전력이 약한 것이 아니라, 테이난가와 하리아디가의 전력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기사단이 모인다고 해도 흰 사자를 막을 방도가 현재로서는 없었다.
그렇다고 가문의 모든 정예를 한 성채로 모을 수도 없지 않나.
세 개의 가문이 온 힘을 합쳐도 버거울 판이었다. 하나 그것까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힘을 모아 봤자라는 의미였다.
그의 염려를 모르지 않던 카드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곁들이며 말했다.
“현재 독립군 쪽에서 추가 공표가 늦어지고 있소. 바레인가를 멸문한 후에 바로 트레왈로가를 공표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지. 왜 그런 거라고 생각들 하시오.”
“부상을 입었다는 소문이 있기는 하더군요.”
레트로이나 6검을 상대한 뒤 곧바로 트레왈로가를 상대했다고 한다.
하다못해 내상이라도 입었을 것이다.
카드론이 다시금 나서서 말했다.
“그러니 지금이 기회가 아니겠소.”
그의 말에 가문의 대표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기회라니.
카드론은 곧장 그들의 의문에 답을 내려 주었다.
“그들의 본진을 치는 거요.”
“예?”
둘의 눈이 동시에 떠졌다.
“우리 쪽에서 알아본 정보에 의하면 현재 통합된 프렌치아 임시정부가 남부의 도시, 피노센을 점령하겠다고 선전 포고를 했다더군. 그 소식은 들으셨소?”
“예. 오는 중에 듣기는 들었습니다만.”
독립군을 통합한 임시정부의 첫 행보였다.
현재 피노센을 점령하고 있는 검은 오소리 부대에게 도시를 두고 떠나라 선전 포고했다고.
피노센은 남부의 전략적 요충지 중 하나로,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수성이 매우 용이한 도시였다.
하여 그곳에 근간을 잡으려는 것이겠지.
“그들은 흰 사자의 위명을 이용해 피노센을 손쉽게 얻고자 선전 포고를 했을 게요. 만약 퇴군하지 않는다면 아마 그 전장에 흰 사자가 등장할지도 모르지.”
“확실히 그럴 확률이 높을 것 같군요.”
“피노센에 상주하는 병력이 많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지만, 독립군의 전력만으로 뚫기는 피해가 상당할 테니 말입니다.”
다들 한시름 놓는 분위기였다.
어쨌거나 다음 가문을 공표하기 앞서 하나의 작은 성벽이 앞에 놓이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그때를 노리는 거요.”
“그때라면.”
“그들이 성을 얻은 이후 말이오.”
하리아디가의 대표, 포르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오히려 저희가 공세를 펼치자는 말씀이시군요.”
카드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도 하지. 우리 세 가문의 힘을 효율적으로 집중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는 방법뿐이오. 작은 전장에서는 절대 흰 사자를 감당할 수 없으니.”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들을 피노센에 가둬 놓을 수만 있다면 흰 사자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테지.”
“아.”
짧은 탄성이 포르빈의 입가에서 흩어졌다.
카드론의 말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베르엔이 제 턱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그들과 전면전을 일으키자는 말씀이시군요.”
“맞소. 그들이 피노센을 점령하려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측되지만, 그것은 오히려 흰 사자의 발목을 부여잡는 실책이 될 거요. 그들의 거점이 생기면 우리야 병력을 모으기 편해질 테니.”
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총독부에도 병력 지원을 요청할 생각이오.”
“총독부 말입니까?”
“현재 프렌치아에 독립에 대한 열망이 들끓고 있다는 걸 그들도 알 테지. 그리고 그들 또한 흰 사자를 두려워하고 있소.”
카드론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나선다고 하면 기꺼이 병력을 내줄 것이오. 그렇게 되면 우리 쪽에 승산이 훨씬 높아지지. 아무리 흰 사자라도 그 많은 병력을 홀로 감당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오.”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저희 쪽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요.”
포르빈이 우려를 표했다. 소드 마스터는 하나의 군단과도 같다.
말 그대로라면 6만의 군세.
그런 그와 전면전을 벌인다면 피해가 만만치 않을 터였다.
치고 빠지는 전략을 취할 확률이 높았고.
“어차피 사자를 잡기 위해서는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소. 하지만 그렇다고 빠르게 진군할 필요까지는 없소. 적들에게 압박을 준다는 게 중요하지. 곧 제국의 추가적인 지원도 있을 게 분명하오. 그리되면 흰 사자는 앞으로 나서기가 더 애매해질 거요.”
“과연, 그렇게 되겠군요.”
포르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베르엔 또한 동조하고 나섰다.
“확실히 지금은 그 계책이 최선이 될 것 같습니다.”
제국의 자존심 레트로이나 6검이 흰 사자에게 꺾였다.
제국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레트로이나 6검 이상 가는 전력이 프렌치아에 올 터였다.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흰 사자 또한 그들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전장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할 터.
카드론은 그 기회를 활용하여 적을 압박하는 동시에 흰 사자가 가문을 공표하는 일을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 계책이 제대로 성공한다면, 흰 사자의 발목을 붙잡는 동시에 가문의 명예까지 챙기며 독립군의 싹을 짓밟을 수도 있었다.
카드론이 말했다.
“그렇다고 너무 시간을 끌면 되레 흰 사자에게 반격을 당할 수 있소. 그러니 우리 모두 전면전으로 인한 피해는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오.”
“그렇겠군요.”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였다.
“과연, 카드론 후작님이십니다.”
베르엔이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카드론을 추켜세웠다. 단순한 아첨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제멋대로 꼬여 있던 실타래를 풀어 갈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진즉 총독부에도 군사 요청을 해 두었으니 지원은 제때 받을 수 있을 거요. 두 분은 가문에 돌아가시면 바로 병력을 모아 주시오.”
“하하. 정말 발 빠른 대처이십니다.”
포르빈은 환히 웃으며 말했다.
과연 ‘최초의 변절자’.
시국을 읽는 눈이 탁월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예상보다 훨씬 적은 피해로 흰 사자를 감당할 수 있을 거다.
“모두 동의한다면 이제부터 세세한 이야기들을 나눠 봅시다.”
그들의 회의는 며칠 동안 계속됐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정해졌으니, 지금부터는 가문 간의 이해관계를 세밀히 논해야 했다.
* * *
“총독 각하, 테이난가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총독, 아르멜은 봉인된 서신을 받아 들었다.
레트로이나 6검이 흰 사자에게 전멸한 작금의 상황에 그의 뇌는 하얗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아르멜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프렌치아의 총책임자는 그였다.
레트로이나 6검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피해 가지는 못할 터였다.
그런 상황에 테이난가의 서신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흐음.”
카드론의 계책을 이해한 아르멜은 짧게 신음했다.
서신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세 개의 가문이 힘을 모으는 데 총독부 또한 병력을 지원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제국의 중앙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었으나, 레트로이나 6검이 당한 이상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였다.
그쪽의 지원이 올 때까지, 프렌치아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막아 내는 게 총독의 역할.
목이 달아나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그리해야 했다.
그 상황에 카드론의 작전은 시의적절했다.
또한, 세 개의 가문이 알아서 연합을 하겠다는데 총독부의 병력을 지원해 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세운 공에 발을 걸칠 수 있을 터.
안 그래도 적들이 피노센을 점령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심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일이 수월하게 풀릴 듯했다.
아르멜은 씩 입꼬리를 올렸다.
“우매한 프렌치 놈들. 스스로 제 무덤을 파 주는구나.”
독립의 열망을 집중시키기 위해 그런 수를 둔 듯한데.
오히려 그 때문에 본진이 노출됐다.
긴 협곡으로 방어하기 유리하다고는 하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일.
“테이난가에 동남부에서 전쟁을 치르는 이들을 회군시켜 지원하겠다 전하라.”
“4군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프렌치아의 형국이 어지러운 상황에 아리아나 왕국과의 지속적인 전쟁은 무리다. 안 그래도 병력을 회군하려던 차였는데, 마침 그곳에 자리를 잡아 주어 명분을 주다니. 운이 좋았다.”
만약 그들이, 회군한다면 자신들은 프렌치아 임시정부를 앞뒤로 포위하게 되는 상황.
아무리 흰 사자가 있다 한들, 혼자서는 두 개의 성문을 막지 못할 테니 승기는 자신들에게 있을 터였다.
“크크큭. 드디어 앓던 이가 빠질 거 같구나.”
아르멜은 오랜만에 속 시원히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