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제145화 혁명의 칼 (2)
루시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놈도 서부의 노예 검투사 출신이라지.”
드라칸의 커다란 근육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 위로 무수히 새겨진 상처들.
혁명의 칼을 이끌며 얻은 상처보다, 검투사로 지내며 얻은 상처가 더 많았다.
그는 노예로 자랐고, 프렌치아가 전쟁에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을 때, 주인을 베고 부하 놈들과 도망쳐 세력을 일궜다.
그리고 범죄자와 매춘부, 사기꾼에 노예까지.
인생의 밑바닥에 있는 자들끼리 모여 만든 단체가, 바로 혁명의 칼이었다.
“그래서 문제라도 있나? 내가 비록 구정물에서 굴렀을지언정, 네깟 귀족 놈들보다는 낫다.”
인간을 멸시하고 차별하며 위에서 군림하는 자들.
사람을 가축으로 보는 자들.
그들이 제국과 다를 게 무엇인가.
결국, 독립해도 마찬가지였다.
위에서 군림하는 놈들만 달라질 뿐.
밑바닥 인생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다.
삶을 바꿀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들이 가진 힘뿐이었다.
천하게 태어났으나 천하게 살지는 않았다.
사람을 우선하고 서로를 위했다.
세상을 적으로 삼는 대신 진정한 가족을 얻었다.
대부분이 태어났을 때부터 가혹한 인생을 살아온 이들이었다. 그 구렁텅이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은 자들이 모여 만들어 낸 것이 바로 혁명의 칼이었다.
그들이 제각각 할 일을 해내며 일궈 낸 세력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기른 힘을 또 다른 귀족 놈들을 만들어 내는 일에 보태라고?
웃기지도 않은 일이었다.
루시안은 드라칸의 태도에 조소를 지었다.
“그러니 너희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거다.”
“감히 네깟 놈들이 우리의 삶을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삶의 고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애송이가?”
“네 말이 맞다. 나는 세리어스 공작가에서 태어나 삶의 고통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다. 귀족으로서 예절을 익히고 역사를 배우고, 여러 학문을 공부하며 검을 익혔다. 대부분의 귀족가 자제들도 그렇지. 너는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지?”
사람을 죽였다.
매질 속에서 창을 익혔다. 악으로 버텼다. 곰팡이 나는 지하실의 좁은 방에서 삶을 한탄하고 저주하며 지냈다.
그 끔찍했던 나날들.
그리고 언젠가부터 끔찍한지도 모르게 된 일상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 삶을 버텨 냈을까, 싶다.
그저 죽고 싶지 않았던 거 같다.
그냥 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했다.
드라칸은 그런 인생을 살았다.
하나, 드라칸은 그 삶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루시안이 말했다.
“그저 지독히도 끔찍했을 테지. 지옥과 다름이 없었을 것이야.”
“동정이라도 하는 거냐. 그딴 수작에 넘어가지 않아.”
“너의 삶뿐만이 아니다. 부하들의 삶도 그렇겠지. 다들 밑바닥의 삶이 아니더냐.”
“하. 모욕이었나.”
“지금의 너희들은 이 삶에 만족할지 모른다. 스스로의 힘으로 지옥에서 걸어 나와 쌓아 올린 평안에 뿌듯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희들은 여전히 어두컴컴한 세계에 살고 있다.”
루시안은 계속해서 말했다.
“넌 이제 혼자가 아니다. 너를 따르는 이들과 그들의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자라 낳을 아이들까지. 네가 만든 터전에서 앞으로 자라나게 될 이들을 너는, 어떤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으냐.”
그가 물었다.
계속해서 물었다.
“아이들이 너희와 같이 살아도 좋겠느냐?”
“너희처럼 살아도 좋겠어?”
“도적질을 대대손손 이으며 살게 할 것이야?”
그의 힘 있는 눈빛이 드라칸을 직시했다.
“그들의 날개를 꺾지 마라.”
“푸하하하!”
드라칸은 호탕하게 웃어 댔다.
“결국 나보고 귀족이 되라는 소리 아니냐. 그래서 그들을 돌보라고. 하지만 그런다고 하잘것없는 인생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혁명의 칼은 그런 이들을 위해 존재한다.
지금까지 함께 모인 이들 외에도.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에 꺾인 존재들.
날개조차 가져 본 적 없는 이들.
드라칸은 그들을 위해 어둠 속에 남을 것이다.
루시안이 말했다.
“그들을 돌보는 건 나라가 할 일이다.”
“나라가 뭘 해 줄 수 있다고!”
“그러니 네가 귀족이 되어라. 귀족이 되어 내게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라. 그들을 위해 말하고, 그들을 위해 일하여 나라의 손길이 그들에게까지 닿을 수 있도록 하라.”
누군가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리와 힘, 권력.
새로운 나라와 함께 태어날 새로운 권력의 한 축을 잡을 수 있는 기회.
“지금 너에게 그 기회가 왔음이야.”
드라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대화는 여기까지 하고 남은 이야기는 내일 더 나누도록 하지. 한번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루시안은 그렇게 몸을 돌려 밖으로 나섰다. 레이크와 네더만은 묵묵히 그 뒤를 따랐고, 드라칸은 그들이 떠난 자리를 가만히 보았다.
푸조가 루시안이 나간 자리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어휴. 저자도 한 성깔 하네. 대장 앞에서 눈 하나 안 깜박이고.”
털썩 의자에 주저앉은 드라칸은 머리를 짚었다.
“생각 좀 하게, 일단 나가.”
푸조는 드라칸의 눈치를 슥 보고는 걸음을 물렸다. 드라칸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들의 날개를 꺾지 마라.
루시안의 목소리가 여전히 머릿속에서 윙윙거렸다. 억지로 몸을 일으킨 드라칸은 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그래야 좀 살 거 같다.
문을 나서니 환한 햇살에 눈이 시리다. 고개를 내리자, 저 아래에서 나무 막대기를 쥐고 전쟁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오늘은 내가 흰 사자 할 거야.”
“내가 할 거야!”
“너는 어제 했잖아!”
서로 흰 사자를 하겠다고 아웅다웅하는 아이들.
누구나 흰 사자를 하고 싶겠지.
그늘 속에 가려진 존재보다, 화려하게 빛나는 존재가 되고 싶겠지.
저 아이들은 자라서 무엇이 될까?
드라칸은 지금껏 그들의 미래를 그려 본 일이 없었다.
그가 그리는 미래는 눈앞의 목적이었고, 그가 가진 고민들은 눈앞에 놓인 생존이었다.
드라칸은 처음으로 아이들의 미래를 그려 보았다.
평범한 농부가 되도 다행일 거다.
이곳에서 배울 수 있는 건 싸움박질, 도둑질, 노름질뿐이니.
어른들이 모두 배움이 없는데,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나.
스타치가 글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들의 앞날은 빤했다.
자신과 같이 주머니 두둑한 놈들의 배때기를 가르며 도적질이나 하겠지.
그게 뭐 어때서.
그렇게 사는 게 뭐 어때서.
-그들의 날개를 꺾지 마라.
빌어먹을.
루시안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머리를 울린다.
드라칸은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적부터 세상을 향해, 귀족을 향해, 밝은 곳에 있는 이들을 향해 갈아 온 칼이었다.
그들을 향한 증오로 여태껏 살아남았고, 그들을 저주하였기에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것들과 같은 삶을 살라고?
그럼 지금껏 그들에게 겨눈 자신의 칼은 무엇이 되는 건가?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드라칸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독립이 되도 어차피 누군가는 밑바닥 삶을 살게 될 거다.
자신마저 귀족이 되면, 이미 삶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놈들은 누가 챙기냔 말이다.
빠져나오고 싶어도, 빠져나올 수 없는 그 빌어먹을 태생의 굴레에서 그들을 누가 끌어내 주냔 말이다.
귀족들이?
새로운 나라의 지도자들이?
X랄하고 자빠졌네.
자신뿐이다.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건.
처절히 지옥을 굴러 본 자만이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다. 그들에게 진짜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이들을 도와 세운 혁명의 칼이 그 증거였고.
그것이 지금의 드라칸이 생존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 너에게 그 기회가 왔음이야.
우득.
주먹을 쥔 드라칸은 곧장 걸음을 옮겼다. 루시안이 어디에 머무는지 알았다. 생각을 끝냈다. 굳이 내일로 시간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쾅!
문을 열었다.
대화를 나누던 세 녀석이 눈을 뜨며 드라칸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보고 지금 귀족 나부랭이가 되라는 것이냐! 한자리 줄 테니 부하들의 몫을 챙기라, 이 말이냐고!”
루시안은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 이미 지옥에 빠진 놈들은! 내 부하들뿐만 아니라, 그 구렁텅이와 같은 지옥에서! 희망조차 없는 그 삶의 늪에서 죽을 때까지 허우적거려야 하는 이들은 어쩌란 말이냐! 그들은 무슨 죄가 있어 그런 삶을 살아야 되느냔 말이다!”
루시안은 이미 이 부분에 대해 말했다.
귀족이 되어 그들을 보살피라고.
그들의 목소리를 전해 달라고.
하나, 그 말이 드라칸의 귀에는 그렇게 닿지 않은 듯했다.
“네 눈에는 귀족과 나라가, 제 배만 불리는 존재들로 보이는가 보구나.”
“아니라고? 나라를 팔아먹고 떵떵거리는 놈들이다. 사람을 짓밟고 노예로 부리는 놈들이야. 나 같은 것들은 지나가는 벌레만도 못하게 보는 놈들이야. 돈이면 사람의 영혼까지도 살 수 있다고 믿는 놈들이라고! 그리고 너 또한 그런 귀족 놈의 자식이지.”
드라칸의 눈이 불을 켰다.
“결국, 네놈은 내 부하들의 피로 작위를 사라는 말이지 않나! 아이들의 삶을 위해 충성을 바치라는 말이지 않나! 허울 좋은 것들로 입발림을 해 놓고 결국 왕이 되어 네놈의 배를 불릴 작정이겠지! 네놈의 진심을 모를 성싶으냐!”
“내 진심은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거다.”
루시안은 말을 이었다.
“한데, 그건 불가능하지. 너도 이끌어 봤기에 알 것이 아니냐.”
아이를 어르듯 차분하게.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다. 새로운 나라가 들어선다고 해도 누군가는 고단한 삶을 살 것이야. 독립이 된다고 해도 누군가는 여전히 지옥에서 살 것이야.”
상처 입은 이를 돌보듯 자상하게.
“하지만 그런 이들을 보살피는 게 나라가 해야 할 일이다.”
루시안은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 이 땅에는 그런 나라가 없다.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을 지켜 줄 나라가 없어. 나는 국민을 위한 나라를 만들고 싶다. 그들이 힘을 가지는 나라를 만들고 싶어. 오래 걸릴 것이야.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할 거다.”
그는 그저 진심을 전했다.
“그러니 옆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내게 전해 다오. 내가 그들을 살뜰히 살필 수 있게.”
“무슨 개소리냐. 그딴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나를 믿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네가 만들어라. 네가 그들의 삶을 위해 애쓰거라. 도적이 아닌 귀족이 되어. 네가 원하는 세상이 있지 않더냐.”
‘내가 원하는 세상?’
드라칸은 그저 자신과 같은 끔찍한 삶이 없기를 바랐다. 자신과 같이 살아가는 이들이 없길 바랐다.
“독립이 온다면 너는 그 세상을 위해 일할 수 있다. 왕이 되고 귀족이 된다는 건 그런 의미다. 누군가의 위에 선다는 건 그런 것이다. 국민을 지키기 위해 권위가 있고, 그 대가로 우리는 그들을 짊어져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귀족이다. 나는 지금 너에게 그 권위와 책임을 주겠다는 거다. 귀족의 의무를 주겠다는 것이야.”
귀족의 의무와 책임?
드라칸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본 귀족은 그러지 않았으니까.
“지금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을 거다. 지금보다 더 많은 이들을 구제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너에게 그것이 가능한 작위와 권력을 주겠다. 그러니 너는 그들의 목소리를 내게 전해 다오.”
그가 지금껏 살아온 세상은 그러지 않았다.
“너희들의 설움이, 너희들의 억울함이 언제고 왕의 귓가에 닿은 적이 있었나.”
왕의 귓가? 왕은 무슨.
드라칸의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그가 노예로서 끔찍한 삶을 살아갈 때, 그의 비명은 작은 담벼락도 넘지 못했다.
누구도 그를 돌보지 않았고, 누구도 그를 위하지 않았다.
이자의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저 귀족 놈의 혓바닥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심장이 뛴다.
그의 목소리가 가슴에 날아와 틀어박힌다.
한마디 한마디가 뇌리에 인을 새긴다.
“새로운 프렌치아는 다를 것이다. 그러기 위해 노력할 것이야.”
그가 말했다.
“나와 함께 그런 나라를 만들어 가자.”
그의 진심 어린 눈을, 드라칸은 바라보았다.
뼛속부터 귀족인 자였다. 말 한마디만 나눠 봐도 알 수 있었다. 기품이 철철 흘러넘치는 자다.
드라칸이 봐 온 어떤 귀족보다도 더 귀족 같은 사내.
반면, 자신은 노예였다.
주인의 한마디에 목숨을 잃는 하찮은 존재.
더럽고 습한 어둠 속을 기어 다니며 벌레 같은 삶을 살아온 존재였다.
“……함께라고? 나는 천하디천한 몸이다. 그런 내가 네놈과 같이 일할 수 있을 리 없다.”
“천하지 않다.”
루시안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천한 삶이란 없어.”
왕이 될 자가 말한다.
“너를 천하다 말한 건 너를 자극하기 위함이었다. 사과하지.”
누구보다 귀족 같은 사내가 말했다.
자신이 천하지 않다고.
그의 말에는 마음을 뒤흔드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고작 몇 마디 말에 자신이 믿고 있던 세상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가 만들 나라에 천한 태생은 없을 것이다. 내가 만들 나라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주마.”
마법이라도 부리는 것인가?
“그러니 함께 나아가자.”
그의 손이 어깨를 잡아 온다.
뭐랄까 가슴속에서 뜨거운 게 울컥 치밀어 올랐다.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부모의 손길이 이러할까? 왠지 따뜻하다. 세상을 향해 겨누고 있던 창날이 무뎌지는 기분이었다.
드라칸은 그 손길을 탁 치며 몸을 홱 돌렸다.
“내일 다시 이야기하지.”
그러고는 성큼성큼 막사를 나섰다.
이 자리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았다.
네더만은 그런 드라칸이 떠난 자리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분명, 합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과 목소리가 그러했다.
확답은 하지 않았으나 태도가 달라졌다.
지금까지 단단히 벽을 세우며 발톱을 드러내던 그가 대화를 이야기했다.
눈빛에 담긴 증오는 더 이상 루시안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네더만은 그것을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혁명의 칼마저도 합병되는 것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회의적인 시선을 가졌던 네더만이었다.
드라칸의 태도가 그랬으니까.
그런데 대화조차 하지 않겠다던 놈의 마음이 돌아섰다고?
고작 몇 마디 대화만으로?
그게 말이 되나?
사람은 그렇게 쉽게 설득되지 않는다.
고작 몇 마디 말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쉽게 돌아가겠는가.
한데.
이 녀석은 그걸 해낸다.
동부에서도 그렇고, 남부에서도 그랬다.
그리고 그전에 박쥐 같은 카드론 자식도 설득해 냈지.
뭘까?
무엇이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의 말에 귀 기울이게 하고,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게 하는 걸까.
그 방법을 네더만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알겠다.
이것이 카드론이 말한 왕의 자질이란 것이겠지.
그를 보고 있자니 너른 해협이 떠오른다.
푸르도록 시린.
넓디넓은 바다.
그 속에는 깊은 골짜기와 드높은 산도 잠겨 있다지.
각각의 욕망과 이상이 루시안에게 잠겨 드는 듯했다. 그는 그 모든 걸 품어 내고 있었다.
무엇이 그에게 그런 힘을 갖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네더만 또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힘을 선명히 느꼈다.
사람을 깊숙이 끌어당기는 힘.
신뢰하게 하고 의지하게 하고 더 나아가 믿고 싶어지게 만드는.
자신은 지금껏 살아오며 무거운 뜻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저 흐르듯 쾌락을 좇으며 살았다.
거창한 목적 때문에 독립군이 된 것도 아니었다.
카드론에게 용돈이나 받으면서 살려고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을 뿐.
그런데 그런 자신의 심장마저 뛰고 있다.
그저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랬다.
그것이 대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다만, 확실히 녀석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
이자는 진정 왕이 될 자질을 가졌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언제고 왕이 될 사내가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네더만은 그를 보며 씩 웃었다.
‘독립군 하기를 잘했네.’
왕이고 나라고, 여전히 아무런 관심도 없지만.
루시안의 이상이 무엇인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지만.
그저.
이 녀석이 왕인 나라가 미치도록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