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제142화 불과 얼음 (2)
칼날에서 불꽃이 일자 일대의 공기가 타들어 가며 뜨거운 열기가 훅 밀어닥쳤다.
후끈한 공기가 기도를 타고 폐로 흐르며 몸의 수분을 단숨에 증발시킨다. 입술이 찰나에 바짝 마를 정도.
내게서만 일어난 변화가 아니었다.
주변의 땅이 수분을 잃고 바짝 가문 논바닥처럼 쩌저적 갈라졌고, 허공에는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마치 대사막 중심에 선 기분.
간만에 흥이 돋는다.
쾅!
신호탄을 울리는 대지의 울음과 함께 다시금 전장이 시작되었다.
적들의 궤적을 따르는 맹렬한 불꽃이 사위를 헤집었다.
마치 태양의 품은 듯한 열감.
직접 닿지 않아도 의복과 흰 사자탈의 끝에서 붉은 불씨가 맺혔다.
콰아아아!
나는 그 중심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걸음에 담긴 청량한 기운이 불꽃을 밀어낸다.
천령신공 보법편.
제3장 수류(水流).
신형의 움직임을 따라 푸르게 일렁이는 장막이, 사위를 뒤덮는 불꽃을 지르밟고 나아간다. 흐르는 걸음을 따라 물결이 파도치는 듯했다.
콰과과과광!
서로를 향한 살의가 얽히며 불길과 급류가 맞부딪쳤다.
츠스스스슷.
일대에 수증기가 일었다가 충돌의 여파로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콰아앙!
먼저 힘을 잃은 건 내 쪽이었다.
나아가던 물길 앞으로 불꽃의 벼락이 떨어졌다.
불꽃을 품은 대검.
꼭 거대한 불길을 손에 쥔 듯했다.
알렌에게 들은 그들의 이름과 칭호가 하나로 합쳐지며, 눈앞의 사내의 정체를 알았다.
홈멜스.
뇌정의 망치라지.
과연, 그의 대검에서 떨어지는 묵직한 선은 벼락을 상기하게 했다.
그것을 피해 뒤로 물러서는 내게, 한줄기 불꽃이 기다랗게 타오른다.
이자가 레이키.
천공의 바늘.
나는 몸을 비틀어 그 검격을 치워 내는 동시에 뒤편에서 떨어지는 꽃을 갈라냈다.
콰과과과광!
개화하듯 피어나는 화염의 꽃이 칼끝에서 흩어진다.
지극히도 변화무쌍한 검.
아마 이자가 광속의 꽃 네리엔일 거다.
다음은 묵직한 중검이었다.
수직으로 그어지는 검을 따라, 하늘이 빈틈없이 무너져 내린다.
팔방을 짓누르며 떨어지는 검격.
지반을 디디고 있던 발이 지반을 움푹 파고들었다.
이자가 바로 구속의 늪, 벤톤.
쩌어어엉!
무거운 검을 정면으로 쳐 내자, 칼날이 부러질 듯 지잉 울었다.
홈멜스의 대검만큼이나 묵직한 검격.
홈멜스의 뇌정이 집중된 힘이었다면, 벤톤의 검은 공간 자체를 장악하는 무게를 지녔다.
그렇다면 이자가 부단장인 검은 마녀, 로얀이겠지.
벤톤을 떨쳐 내기 무섭게 측면의 빈틈을 가르며 들어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뜨거운 열기를 머금었음에도 고요하고 은밀한 움직임.
불꽃의 그림자가 들이치는 듯했다.
나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막아 갔다.
콰아아앙!
사각을 노리던 검을 쳐 내자, 내 앞에 거센 불길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불길의 해일.
멸절의 홍염, 케이언.
레트로이나 6검의 단장.
그자의 검이었다.
나는 검을 움켜쥐었다.
천령신공 검법편.
제2장 흑관섬.
불길을 둥그렇게 관통하는 섬광이 있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홍염의 중심을 꿰뚫는 검격.
집어삼키는 힘과 관통하려는 힘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콰아아아앙!
나는 그 반탄력에 훌쩍 뒤로 물러나 충격파를 흘리기 위해 몸을 여러 차례 뒤집어야 했다.
검에 힘을 꽤 실었음에도 그랬다.
그런 내게 쉴 틈도 없이 달려드는 녀석들.
마치 뜨거운 불길 속에 갇힌 듯하다.
세계를 말려 비틀어 버릴 정도의 열기가 장내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확실히 어중간하게 상대할 만한 이들은 아니다.
의지가 이는 순간 체내를 휘돌던 내력에 살얼음이 낀다.
천령신공 검법편.
한빙의 장(章) 빙해(氷海).
바다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극한의 냉기가 내게서 풀어져 나왔다.
천령신공의 심법, 무극천승심결은 정심한 내공의 세밀한 운용을 통해 내력에 속성을 부여할 수 있는 절세의 신공이었다.
하나의 속성은 각기 하나의 장(章)으로 분류되는데.
천령신공은 총 네 개의 장을 가지고 있다.
열화, 벽력, 광풍, 한빙.
나는 개중 한빙의 장(章)을 풀어낸 것이다.
솨아아아-.
불꽃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하얀 한기가 낮게 가라앉는다.
뜨겁게 말라붙었던 입가에서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칼날 위에서 타오르던 오러가 물에 물감이 풀어지듯 색을 바꾸고 있었다.
푸른 강기가 하얗게 물들어 가며 청백색의 빛을 내었다. 그렇게 빚어진 강기는 날카로운 얼음 결정 같았다.
스스스스슷.
한기가 열기를 밀어내며 엉켜들자, 회오리바람이 일대에 소용돌이쳤다.
케이언은 내 상태를 멋대로 오해했다.
“……마법검을 가지고 있었나.”
나는 굳이 정정하지 않고 말했다.
“어떤 것이 우위인지 가려 보자고.”
지금까지 적들의 전력을 가늠했으니, 이제 내가 움직일 차례.
열기와 한기.
상극의 기운.
일대가 태양의 잠긴 사막이 될지, 눈 속에 잠긴 설원이 될지는 승자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질 터였다.
솨아아악-!
지독히 차가운 한기가 불꽃을 가르며 떨어져 내린다.
콰과과광!
두 개의 상반된 힘이 부딪치며 폭발했다.
나는 그것에 일어나는 충격파마저 베어 내며 검을 밀어 넣었다.
갈라진 불길 사이로 하얗게 얼어붙은 얼음 가루가 흩날렸다.
지독한 냉기가, 불길을 가르며 피어난 수증기를 단숨에 얼려 버린 것이다.
케이언을 몰아붙이니, 사방에서 들어오는 불길이 있었다.
천령신공 검법편.
제3장 낙화유광(落華流輝).
차디찬 얼음 꽃이 눈보라처럼 휘날리며 불꽃을 꺼트려 나간다.
하나, 아직 부족하다.
여섯 명이 뿜어내는 열기는 여전히 태양처럼 뜨거웠다. 주변에 용암이 흐르는 것 같다.
그 뜨거운 불꽃을 삼키는 가장 좋은 수는 역시, 인원을 줄이는 것.
나는 측면에서 찔러 오는 불꽃의 바늘을 압축된 냉기로 맞대응했다.
콰아아아-!
뾰족하게 쏘아진 청백색의 강기가 응축된 불꽃을 단숨에 부숴 버리며 곧게 뚫는다.
흩어지는 불길 사이로 적의 굳은 얼굴이 담겼다.
콰아아아앙!
일대를 관통하고 쏘아지는 기다란 빛살.
그 궤적을 따라 바닥에는 얼음길이 깔렸다.
그 중심에 놓인 적의 가슴팍은 휑하니 구멍이 뚫려 있었다.
“레이키!”
그런 그를 부르는 고함이 있었다.
“뒈져랏!”
동시에 분노를 품은 불꽃이 들이닥친다.
거대한 대검이 유성우처럼 제 스스로를 태우며 밀려왔다. 나는 그것에 맞서 검을 그었다. 칼날에 핀 강기가 새하얗게 타올랐다.
콰아아아앙!
무지막지한 폭발과 함께 일대의 열기가 한순간 흩어진다.
홈멜스는 동공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전력을 다한 대검이 정면 대결에서 밀린 건 처음인 듯했다.
그런 그를 사선의 섬광이 지나쳤다.
푸확!
붉은 핏물이 터졌다가 이내 얼음 결정이 되어 하얀 서리가 낀 채 뿌려졌다.
찰나, 두 개의 불꽃이 꺼졌다.
나는 핏물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네리엔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콰아아아아!
앞을 막아 오는 불꽃의 너울거림.
불꽃과 얼음의 꽃이 한데 어우러지며 바람에 날린 낙엽처럼 제멋대로 춤춘다.
푸확!
그 끝에서 차디찬 섬광이 네리엔의 몸을 꿰뚫고 지나쳤다.
“끄아아압!”
처절한 기합과 함께 태양이 가라앉는 듯한 거대한 불길이 떨어져 내렸다. 숨이 턱 막혀 올 정도로 묵직한 열기.
그것을 뿜어내는 벤톤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져 있다. 동료를 잃은 분노가 불꽃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그것을 하나의 선으로 갈랐다.
콰자자자자작!
불타오르던 하늘이 반으로 쪼개지며, 그 주인까지도 베어 냈다.
일대를 양단하는 참격.
그때 그 사이를 비집고 들이치는 그림자가 있었다.
나는 보지도 않고 그 존재를 알았다.
솨아아아-!
뒤로 돌며 검을 수평으로 긋는다.
등을 삼키려던 은밀한 화염이, 되레 새하얀 얼음 칼날에 갈라진다.
궤적을 따라 점점이 번지는 핏물을 따라 얼음 알갱이들이 눈발처럼 흩날렸다.
이로써 다섯 개의 불꽃이 꺼졌다.
어느새 장내에는 나와 케이언만이 남아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던 일대는 하얗게 얼어붙은 설원이 되어 있었다.
내 발끝에서 피어난 얼음이 일대를 하얗게 삼켜 갔다.
불꽃을 쥔 케이언의 입가에서 뿌연 입김이 흘러나왔다.
* * *
케이언은 적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잠시 침묵했다.
흰 사자는 격이 달랐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
현실적이지 않았다.
하나, 그는 이해되지 않는 이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여기가 내 마지막 전장이었군.”
수없이 상상해 왔다, 자신의 마지막 전장을.
그는 전장을 누비며 언제나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기에 언제고 이날이 올 수 있음을 알았다.
오늘은 그저, 지금까지와 다른 길을 갈 뿐이었다.
승리가 아닌 패배.
생존이 아닌 죽음.
이제 그 길을 처음 걷게 되겠지만, 익숙하다.
언제나 곁에 품고 있었기에.
흰 사자가 말했다.
“마음에 드나.”
마음에 드느냐고?
함께 전장을 달려온 이들을 눈앞에서 잃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죽음 앞에 서 있었다.
그런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다니.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마지막으로는 적당하군.”
자신 또한 무수히 많은 자를 베고 이 자리에 있다.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는 이미 되어 있었다.
그것은 죽은 저 녀석들도 마찬가지.
모두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았다.
슬퍼할 것도 없다. 분노할 이유도 없다.
자신보다 아득히 높은 경지에 오른 자.
그런 이의 검에 죽는 것은, 기사로서 가장 화려한 죽음과 다름이 없으니.
그것을 알고 있기에 저 녀석은 그리 질문한 것이다.
또한, 그 의미는.
자신을 기사로서 인정했다는 의미.
쉽게 죽어 줄 수는 없었다.
자신의 검을 보여 제대로 줘야겠지.
‘조금의 미련도 남기지 않겠다.’
케이언은 검을 움켜잡았다.
칼끝에서 홍염이 환하게 타올랐다.
뒤를 생각지 않은 전력의 검.
모든 기운이 칼날 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쾅!
흰 사자를 향해 쇄도했다.
홍염의 파도 11검.
극의. 하늘을 덮은 불길.
자신이 꺼낼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검이었다.
일순,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며 이내 멈춘 듯했다.
눈앞으로 선명히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
마치 세상과 하나가 된 듯한 일체감이 느껴진다.
……이곳인가.
벽 너머의 세계가.
일렁이는 마나의 요동이 마치 자신에게 손짓하는 듯했다.
마지막 순간, 그는 그토록 넘고 싶던 벽을 넘어서고야 만 것이다.
집중의 집중이 만들어 낸 순간의 성장.
케이언은 눈앞의 사내를 직시했다.
그의 존재가 또렷이 보인다.
그럼에도 아득하고 아득하다.
하늘을 향해 끝도 없이 뻗어 가는 기세.
마치 설산이 앞에 서 있는 듯했다.
죽음 앞에서 소드 마스터에 다다랐음에도 흰 사자의 끝이 가늠되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었겠군.’
그는 마지막 홍염을 불태웠다.
거센 홍염의 파도가 적에게 밀어닥쳤다.
설원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불기둥.
콰아아아아!
그렇게 모든 불길을 토해 내는 순간, 그는 보았다.
저편에서 내달려 오는 새하얀 빛을.
불기둥의 중심을 쪼개 버리며 그 틈새에서 피어나는 차디찬 검광을, 그는 보았다.
촤아악!
지독히도 차가운 무언가가 가슴팍을 훑고 지나간다.
힘을 잃은 무릎이 털썩 꿇렸다.
가슴이 서늘했다.
자신의 몸 상태를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일순, 황제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오연한 얼굴.
그 얼굴 위로 떠오를 당혹감을 떠올리니 오히려 재밌어졌다.
과연, 이 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제국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는지.
* * *
케이언의 몸뚱이가 설원에 풀썩 쓰러졌다.
나는 그들을 보았다.
제국의 검이었으나 곧게 선 검들이었다.
검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칼날은 흔들리지 않았다. 단단한 신념 위에 세워진 검이었고, 그것은 올발랐다.
케이언과의 짧은 대화만으로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검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검과 검의 대화.
검을 쥔 자만이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검을 쥔 자만이 이해하는 시간들이 있다.
그 검격을 펼치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고행들이 있다.
나는 그들의 검을 이해했고, 그들이 쌓아 온 시간을 보았다.
간만에 찝찝한 승리였다.
적이어도 좋은 놈들을 베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니.
나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멀리 두었다.
멀찍이 인의 장벽이 둘러져 있었다.
트레왈로가의 정예들.
하나, 장내가 정리되었음에도 그들은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깊은 적막이 설원이 된 평원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압도적인 힘에 눌렸겠지.
도망치는 이들을 잡기는 번거롭다.
그러니 미끼를 던져야 한다.
본래 큰판은 본인에게 승기가 있다고 착각했을 때 거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