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제141화 불과 얼음 (1)
너른 평야를 구릉이 감싸고 있는 분지와 같은 지형. 그 둘레를 트레왈로가와 제국의 깃발이 울타리처럼 두르고 있었다.
“오지 않으면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츠르센이 물었다.
“올 겁니다.”
케이언이 말했다.
이미 흰 사자는 트레왈로가의 근방에 와 있었다.
오지 않을 거였으면 3일 전, 그 자리에 없었겠지.
그리고 대화 몇 마디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자는 올 거다.
“하하. 저는 흰 사자가 6검의 위명이 무서워 도망치면 어쩌나 싶군요.”
케이언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츠르센은 흰 사자가 오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떠날까 두려운 게지.
참으로 간사한 자가 아닐 수 없다. 창술을 익혔다지만 마음에 창을 세우지는 못한 듯했다.
참으로 가벼운 자였다.
이런 자의 편에 서서 싸워야 한다니.
제국의 검으로서 살아왔지만, 이번만큼은 황제의 처사가 탐탁지 않았다.
프렌치아의 위치가 지리적 이점이 있다고는 하나, 아직 내륙도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황.
굳이 이곳에 신경 쓰는 황제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10년 전 전쟁도 이 때문에 말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럼 가 보겠습니다.”
케이언은 츠르센이 무어라 말하고 있음에도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츠르센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싸늘히 굳혔다.
‘건방진 놈.’
현재는 가문의 방패막이와 다름없기에 이 정도의 모욕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기사단은?”
츠르센의 물음에 옆에 선 기사가 조용히 읊조렸다.
“모두 준비되어 있습니다.”
민간인을 통제한다는 명분하에 병사들을 풀어 구경꾼들의 진입을 막았다. 레트로이나 6검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나, 대련이 시작되면 트레왈로가의 정예들이 이 일대를 일제히 포위하게 될 거다.
케이언은 실리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자.
이런 행위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에 은밀히 준비했다.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독립군 쪽에서 흰 사자만 올 거라는 보장도 없는 데다, 부상을 입은 흰 사자가 도주할 가능성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레트로이나 6검의 패배까지도 염두에 두었다.
가문의 명운이 걸린 문제.
일말의 가능성도 남겨 둘 용의가 없는 츠르센이었다. 이번 기회에 그는 반드시 흰 사자의 목을 벨 셈이다.
“흰 사자만 없으면 독립군 새끼들이야 이빨 빠진 사자 새끼나 다름없지.”
구릉에 올라 있던 그는 널따란 대련장을 바라보며 기다란 웃음을 지었다.
“자. 그럼 이제 흰 사자의 최후를 만끽해 보자꾸나.”
저편에서 흰 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 * *
“저 개같은 새끼들.”
리포드가 구경꾼들을 막는 트레왈로가의 병사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전투의 여파로 위험한 것은 사실이나, 이들의 속셈은 다른 것으로 보였다.
병력이 은근하게 늘어나고 있었고, 그런 이들의 기도가 자못 날카롭다. 병사들 사이로 정예들이 섞여 들고 있음을 한눈에 알았다.
“혼자서 괜찮겠나. 이긴다고 해도 빠져나올 수 있겠어?”
“빠져나올 생각 없다.”
“응?”
“모두 죽일 생각이니.”
리포드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트레왈로가의 움직임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이들만 무너뜨려도 트레왈로가는 막대한 타격을 입을 터. 나를 잡기 위해 깐 올가미가 본인들의 목을 조이게 될 테지.
“조심하셔야 합니다.”
“조심하세요…….”
알렌과 이리엘 또한 염려의 눈빛을 던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저물기 전에 돌아오마.”
나는 그대로 땅을 박찼다.
돌풍이 한차례 일더니 신형이 움푹 꺼지듯 흩어진다. 나는 앞을 막고 있던 병사들을 지나쳐 중심으로 나아갔다. 그 사이, 흰 사자 가면이 내 얼굴에 올려졌다.
“희, 흰 사자다!”
나를 본 이들의 웅성거림이 세찬 바람에 뭉개져 흩어졌다. 나는 손쉽게 평야에 내려섰다.
태양이 중천에 걸려 있었다.
그 아래 서 있는 레트로이나 6검.
“왔군.”
간격을 두고 멈춘 나를 보며, 케이언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저편 구릉에 시선을 두었다. 눈매를 좁히니 머리가 희끗한 중년인을 필두로 늘어선 자들이 보였다.
저자가 트레왈로가의 가주, 츠르센 트레왈로인 듯했다.
그 옆에 있는 이들은 직계들로 보였고.
그 뒤로는 방계와 가신들로 보이는 이들까지 있었다. 본인의 가문을 지목했던 나였다. 레트로이나 6검에게만 맡기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었을 테지.
“저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자네가 이긴다면 기사의 명예를 지키기로 했으니.”
나를 그냥 보내 주겠다는 이야기.
내가 말했다.
“순진한 구석이 있군.”
그들이 기사의 명예를 지킬 이들이었으면 변절도 하지 않았겠지.
“자네는 순진한 구석이 없군.”
케이언 또한 그것은 잘 알고 있을 거다.
“비겁하다고 하지는 않겠지.”
애초에 공정한 대결을 위해 깐 판이 아니었다. 도망치라고 깐 판. 하나, 나는 왔다. 그 모두를 감당할 자신이 있으니.
나는 검을 뽑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스르렁.
푸르게 물결치는 칼날에 햇볕이 부서져 내린다.
그것에 맞춰 레트로이나 6검 또한 제 무기들을 쥐었다.
휘이이이익-.
검을 따라 일어난 기세가 맞부딪치며 돌개바람이 일었다. 무형의 기세가 서로를 집어삼키려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검을 맞대기도 전에 적의 기운이 먼저 와 닿는다.
공간 일대를 내리누르려는 기파가 내 몸에서 나온 기파와 맞닿으며 무게를 더했다.
하늘이 주저앉으려는 것 같기도 하고, 땅이 들고 일어나는 듯도 했다.
온몸이 저릿저릿해져 올 정도로 막강한 기세.
나는 그 중심에 검을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이 정도의 상대는 간만이었다.
억지로 끌어올려 만들어진 게 아닌, 긴 세월 부단한 담금질로 벼려진 검.
그들이 기사로서 쌓아 올린 시간들이 내게 겨눠지고 있었다.
“시작하지.”
케이언의 말과 함께, 일순 공간이 일그러졌다.
구와아아앙!
맹렬한 파공음을 꼬리처럼 달고 공간을 가로지르는 검격이 있었다.
백색의 섬광이 대기를 통째로 꿰뚫고 쏘아진다.
바늘의 첨단처럼 좁고 예리한 칼끝.
쩌엉-!
그것을 쳐 내는 동시에 앞으로 쇄도했다.
시야를 물들이던 섬광이 흩어지며 적의 모습이 드러난다. 나아가는 힘에 검을 실었다.
콰아아아-!
한 점을 뚫고 들어가는 섬전.
그것을 좌우 측에서 솟아난 빛줄기가 막아 왔다.
콰과과과광!
찰나에 빛 무리가 이지러지며 얽혀들었다.
여섯 개의 신형이 마치 하나의 생물체처럼 유기적으로 흩날렸다.
두 개의 검이 앞으로 쏘아지던 검을 묶고, 두 개의 검이 회피할 방위를 차단하며, 나머지 두 개의 검이 나를 노리고 짓쳐 든다.
레트로이나 6검의 검은 때로는 하나로 뭉쳤다가, 때로는 세 개가 되었다가, 또 어느 때는 여섯이 되기도 했다.
뭉쳤다가 흩어졌다가 합쳐지며 쏘아지는 검격들.
쿠과과과과광!
생동감 있게 펼쳐지는 무수한 선을 하나의 검이 갈라 냈다.
나의 것이었다.
적의 검이 몇 개이든, 나는 하나로 충분했다.
공간을 엮어 오는 검로를 쓸어 내자, 검은 그림자가 머리 위의 태양을 가렸다. 나는 막아 내는 대신 뒤로 걸음을 물렀다. 바닥을 찬 신형이 빙판에 미끄러지듯 죽 밀려난다.
내가 있던 자리로 묵직한 낙뢰가 떨어졌다.
콰아아앙!
그것을 받아 낸 지반이 황토색의 토사를 수직으로 토해 냈다. 마치 작은 산이 솟아오르는 듯했다. 나는 후두두둑 떨어지는 흙더미를 피해 측면으로 휘돌았다. 정확히는 그 안에 숨은 검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흙비를 뚫고 오는 신형은 셋.
나는 검을 움켜쥐었다.
손끝에서 일어난 검영이 사위를 휩쓴다.
콰과과과광!
개화하듯 만개한 칼날이 이리저리서 휘어져 들어오는 것들을 단숨에 삼켰다.
그사이로, 뒤편에서 은밀히 들어오는 걸음.
난장판 사이를 고요하게 난입하는 검격이 있었다.
절정에 이른 살수의 걸음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적막을 품은 검.
그것에 더해 좌우측에서 동시에 들어오는 검격.
까다롭기 그지없는 연계였다.
나는 가면 안에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 * *
‘괜한 자신감은 아니었나.’
케이언은 귀신처럼 흩어지는 흰 사자의 신형을 좇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심해 보였던 그의 젊은 얼굴이 떠오른다.
그것이 정녕 이 가면 뒤의 얼굴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강함이군.’
자신들은 제국의 자존심이라 일컬어지는 레트로니아 6검이다.
대륙의 정점에 있다고 해도 무방한 전력.
소수의 인원으로 이 정도의 검력을 가지는 무력 부대는 한 손에 꼽았다.
흰 사자는 그런 자신들을 홀로 감당해 내고 있었다.
콰가가가각!
사선으로 떨어져 내린 검기가 단원들의 공격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바닥까지 거칠게 긁고 지나간다. 그것을 따라 일어난 파편이 다른 이들의 걸음까지 막아섰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창졸간의 틈.
흰 사자는 그 좁은 틈을 비집으며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는 단순히 검력만이 강한 게 아니었다.
흰 사자의 칼끝에는 만전(萬戰) 을 거친 경험이 담겨 있었다.
‘대체 어떻게?’
백번 양보해서 그만한 무력을 그 나이 때에도 가질 수 있다고 치자.
그것은 여지없는 진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대체 어디서 이런 경험을 쌓았단 말인가.
하루 이틀 만에 쌓아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자는 적어도 자신만큼.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무수한 전장을 겪어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투란 찰나에 생사가 오가는 수 싸움.
순간의 판단과 선택들이 삶과 죽음을 가른다.
그렇기에 만전의 경험이 종종 검력을 뛰어넘기도 한다. 그만큼 한순간에 쌓아 올릴 수 없는 게 검의 경지였다.
하지만 흰 사자는 그 찰나의 판단과 선택마저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최선의 최선을 비집고 있었다.
자신조차도 보지 못하는 길을 만들어 내며 오히려 자신들을 압박해 온다.
그와 검을 나눌수록 칼날의 예리함이 무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존재가 한없이 불어나며, 견고하고 드높은 벽으로 세워진다.
그리고 여전히 그 끝이 가늠되지 않는다.
그에게 겨눈 칼끝이 뭉툭해지는 기분이다.
“하압!”
케이언은 기함과 함께 검을 내질렀다.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빛살이 바늘처럼 뻗어 갔다.
붉은 선을 그리며 쏘아진 섬광.
그것은 정확히 적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흰 사자의 손끝이 흐려지기 전까지는.
일순 칼끝에서 전해지는 작은 반동이 있었다. 흰 사자의 검이 흐르듯 지나친 후였다. 마치 바람을 탄 낙엽처럼 부드럽게 밀려난 칼끝이 허공을 꿰뚫는다.
목표를 잃은 광채가 기다랗게 뻗어나가 평야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이내, 눈동자로 말려 들어오는 광채가 있었다.
적의 참격이었다.
콰아앙-!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올려 막아 냈다.
손목에 묵직한 통증이 이는 동시에 발이 두둥실 떠올라 뒤로 날았다. 애초에 자신을 밀어내려는 일격이었던 거다.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충격을 흩어 놓고는 다시 지반에 내려섰다.
케이언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뒤로 물러서라.”
“쳇.”
“이 괴물 같은 자식.”
단원들은 혀를 차며 흰 사자를 둥그렇게 둘러섰다.
주변의 지형이 뒤틀리고 깎이고 파이고 무너져 있었다. 그만큼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 하나, 흰 사자는 그 중심에서 칼끝을 늘어뜨린 채 서 있다.
처음과 같이 여전히 고른 호흡으로.
정말이지 괴물이군.
“태양의 힘을 쓴다.”
레트로이나는 태양의 검의 이름이었다.
그것은 그저 상징적인 의미만이 아니었다.
레트로이나의 대원이 되면 받을 수 있는 마법검.
그것의 이름이 바로 태양의 검, 레트로이나였다.
하나의 성채로도 살 수 없는 값어치를 가진 최강의 무구.
케이언이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가 왜 레트로이나인지 알려 주마.”
동시에, 그의 칼끝에서 시뻘건 불길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