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제139화 레트로이나 6검 (1)
루시안은 가만히 네더만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벌써 취했어요?”
“취하기는!”
네더만은 평소와 달리 얼굴을 붉히며 발끈했다.
본인이 말해 놓고도 민망한 탓이다.
그는 자신이 뱉은 말을 어떻게든 수습해 보고자 아무런 말이나 뱉어 댔다.
“그 불멸의 부대도 그렇고, 지금 프렌치아에는 알렌 녀석이 좋아하는 이야기 속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나. 그러니 드래곤이 나오지 말란 법이 어딨겠나. 큼큼.”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오히려 레이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루시안은 경악한 표정으로 레이크를 바라보았다.
레이크는 언제나처럼 건조하게 말했다.
“워낙 불가해한 존재가 아닙니까. 가진 무력도 인간의 격을 한참이나 넘어섰고요.”
“그래서 마법의 아버지인 드래곤이 검을 익혔다?”
“간혹 미친 드래곤이 한 마리쯤은 있을 수도 있는 법이죠.”
“그렇지! 한 마리 정도는 돌연변이 같은 놈이 있을 거라고!”
네더만은 옳다구나, 하고 그 의견을 받았다. 레이크는 무심히 말을 이었다.
“남아 있는 드래곤이 한 마리뿐이라서 문제지만요.”
“…….”
네더만은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하며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좀 여럿이라도 있어야 돌연변이가 나오든, 미친 도마뱀이 나오든 할 게 아닌가.
“게다가 마지막 남은 그 드래곤조차, 케케묵은 역사책에서나 나오는 존재 아닙니까. 검을 익혔을 리도 없거니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프렌치아를 위해 검을 들 이유도 없죠.”
레이크의 단언에 배신감을 느낀 네더만이 목소리를 높였다.
“조금 전까지는 드래곤일 수도 있다며!”
“말이 그렇다는 거죠. 설마 진심이셨습니까.”
“빌어먹을, 진심일 리가. 내 정신은 아직 말짱하다고. 상한 육포를 먹은 것도 아니고 말이야.”
루시안이 픽 웃으며 말했다.
“뭐, 다음에 제네스를 만나면 한번 직접 물어보죠. 거짓말은 안 하는 놈 아닙니까. 드래곤이 아니라 진짜 레오니랜서의 화신일지 어떻게 알아요.”
네더만은 눈을 흘기며 짐에서 술병을 꺼내 들었다.
“아주 작정을 하고 놀리는구만.”
차라리 취하자.
지금은 차라리 고주망태가 되는 게 나을 듯하니.
* * *
왁자지껄한 연회장.
너른 홀에는 기다란 식탁이 줄지어 있었고, 그 위로는 향미 가득한 음식들이 한가득 올라와 있었다. 작렬하는 태양의 독립군들은 들뜬 목소리로 술을 마시며 신나게 놀아 댔다.
우리를 환영하는 자리라고 했다.
그런데 본인들이 더 신났다.
나는 언제나처럼 한편에 떨어져 홀로 술을 음미했다. 말이라도 걸려는 놈이 있으면 손을 휘휘 내저어 쫓아내면서.
녀석들은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내 이야기를 신나게 하고 있는 알렌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제가 그때 딱 말했죠!”
알렌은 술병을 쥔 채 의자 위에 올라서서 일장 연설을 하듯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주변으로는 벌이 꿀을 찾듯, 사르페를 비롯한 이들이 우글우글 몰려들고 있었다.
하여간.
저 녀석은 매번 똑같은 소리를 하면서도 질리지도 않나 보다.
“이 늑대는 뭐예요?”
“네스라고, 제 호위 기사나 다름없어요.”
레이나와 이리엘은 단둘이 따로 앉아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
네스는 제 앞에 놓인 고기들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는 중이었다.
붉은 사과를 좋아한다더니만, 고기가 앞에 있으니 사과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들의 대화가 자연스레 귓가에 담겼다.
레이나가 물었다.
“제네스 님은 어떤 사람이에요?”
“뭐, 보신 그대로예요. 괴팍하고 못된 성격을 갖고 있죠. 말을 얼마나 못되게 하는데요. 또 잔소리는 얼마나 심한지. 에효, 알렌 형님이랑 제가 고생이죠. 그래도 어떡하겠어요.”
“어머, 너무 공감돼요. 결은 다르지만, 저도 리포드 님 때문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
둘은 서로의 고충을 나누며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신나서 내 이야기를 하는 이리엘을 보며 각오를 다졌다.
앞으로 더 확실히 부려 먹어 줘야겠다고.
매번 먹는 욕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욕먹은 값은 제대로 해 줘야겠지.
간만에 「긴 여행을 제대로 즐기는 101가지 방법」을 다시 정독해야겠다.
내용은 이미 다 외우다시피 했지만, 다시 읽다 보면 당시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이 생기는 법이니.
“왜 같이 어울리지 않고.”
리포드가 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아까처럼 손가락을 까닥 움직여 녀석의 궐련을 잘라 냈다.
“젠장.”
그는 떨어진 궐련을 밟아 끄며 술을 들이켰다.
“아무래도 고독을 즐기는 타입인가 보오.”
“그래.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네 부하들이나 챙겨.”
나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는 내 손짓을 못 본 척 말을 이었다.
“다들 잔뜩 신났군. 당신 때문이오. 보이지 않소? 남자고 여자고 당신을 이상형 보듯 힐끔힐끔 보고 있잖소.”
그는 술을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다들 당신이 흰 사자인 걸 알고 기절초풍을 했다오. 이렇게 젊을 줄 누가 알았겠소.”
나는 못 들은 척 술병을 기울였다.
“진짜 이길 자신 있는 거요?”
“고작 그 말 하러 온 건가.”
“고작이라니. 당신의 존재가 지금 프렌치아 상황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는데. 흰 사자는 절대 패배하면 안 된단 말이오.”
“그럴 일은 없다.”
“진짜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가 그거라는 말이오?”
“그래.”
알렌이 제멋대로 지어 낸 명칭이지만, 현경이라고 하는 것보다야 이해가 될 테지.
“어쨌거나, 한마디만 하겠소.”
아무래도 이게 본론인 거 같은데.
“사실 그때 그 얼음 장벽 말이오. 그거 내 개인 아티팩트거든, 사비로 산. 내 생명줄과 다름없는 것이었소. 그걸 내가 당신한테 쓴 거란 말이오. 이건 말해 줘야 할 거 같아서.”
“그래. 고마웠다.”
이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거 같기에 귀찮아서 해 줬다. 녀석은 호탕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뭐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려고 한 말은 아닌데.”
누가 봐도 인사 받으려고 한 거 같은데.
“그냥 궁금해할 것 같아서.”
“하나도 안 궁금했다.”
“……큼큼. 어쨌거나, 그들이 공표한 시간까지는 3주가량 남았으니 그동안 푹 쉬고 계시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부르고.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편하게 부르고.”
“그러지.”
“그리고 참고로 그 아티팩트 엄청 비싼 거라오.”
나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돈이라도 달라는 거냐?”
“허어, 아니오. 내가 무슨 몇 푼 받겠다고 이러겠소. 그냥 당신이 알아는 둬야 할 거 같아서.”
내가 왜?
“그럼 편히 즐기쇼.”
그는 씩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나는 녀석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고맙다고도 해 줬고.
그렇다고 보상을 받고 싶어 하는 건 아닌 거 같고.
그저 생색을 내고 싶었나 본데.
문득 본인의 상사가 7살짜리 애 같다던 레이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나는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 * *
트레왈로가는 레트로이나 6검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가주 츠르센은 한달음에 달려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 오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국의 특임기사단인 레트로니아의 위명은 익히 들어 왔습니다. 저는 트레왈로가의 가주, 츠르센 트레왈로라고 합니다.”
그는 왕이라도 알현한 듯, 깍듯한 태도로 그들을 대했다. 그들의 위명도 위명이지만, 멸문이 코앞으로 닥쳤던 가문을 수렁에서 건져 올려 준 이들이었다. 극진히 대할 수밖에.
케이언은 인사를 받으며 존대로 그를 대했다.
“수고는요. 도시가 좋습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일단 여독부터 푸시지요. 바로 식사 자리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럽시다.”
케이언을 비롯한 이들은 안내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트레왈로가를 둘러보았다. 제국의 고위 귀족만은 못하지만, 기사들의 수준이나 전체적인 조경을 보았을 때, 상당히 부흥한 가문인 듯했다.
“드디어 편히 쉬겠고만.”
6검 중 가장 거구인 홈멜스가 기지개를 길게 켜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체력적으로 부담은 없었지만, 그래도 쉬지 않고 달려온 고행길이었다.
빨리 달려도 40여 일이 걸린다는 길을 3주 만에 주파했으니.
그래도 덕분에 공표한 날까지 넉넉한 여유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날 밤.
레트로이나 6검을 환영하는 거대한 연회가 정원에서 열렸다.
석식을 끝내고 찾은 자리였다.
식탁에서 무겁게 자리하는 것이 아닌 너른 파티장에서 자유로이 마시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가문의 주요 인사들과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다.
“레트로이나 6검이 이리 와 주시니 든든합니다.”
츠르센이었다.
그는 케이언의 옆에 딱 붙어서 아첨하는 간신배처럼 꼬리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든든하다고 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귀하신 분들을 괜히 여기까지 오시게끔 하여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송구스러울 필요까지요.”
케이언은 과하게 찬사를 보내는 그를 보며 그가 그동안 흰 사자로 인해 얼마나 골머리를 앓아 왔는지 손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리 혀에 기름칠을 하는 것이겠지.
“흰 사자 때문에 난감하셨겠습니다.”
“뭐 그렇지요. 제국과 하나로 합병된 지가 10년인데 아직도 이 땅에는 은혜를 모르는 한심한 작자들이 많습니다.”
“독립을 바란다지요.”
“터무니없는 바람이지요. 하여간 제까짓 것들이 아무리 날뛰어 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모르는 한심한 작자들입니다. 제국의 하늘이 얼마나 넓고 그 검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모르는 게지요.”
케이언은 와인을 한 모금 음미하고는 조용히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그래도 본인이 섬겼던 나라에 여전히 충정을 바치고 있는 이들 아닙니까. 저는 나쁘게 보이지 않는군요.”
나라가 패망했음에도 여전히 그 나라와 국민을 위해 싸우는 자들이었다. 정치적 이득이나 가문의 영화를 누리기 위해 검을 드는 이들과 달리 그들의 정신은 숭고했다.
그것이 아무리 의미 없는 행위라 할지라도, 전혀 하잘것없게 느껴지지 않았다.
과연 자신은 제국이 패망한다 해도 제국과 제국민을 위해 검을 들 수 있을까?
물론.
그는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손쉽게 답을 했다.
기사로서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하하. 역시 인품이 훌륭하십니다.”
츠르센은 호탕한 척 웃으며 자연스레 자신의 말을 무마했다. 케이언은 연회장의 화려한 조명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정치적인 셈은 할 줄 모르는 기사다 보니 그렇습니다. 실례가 됐다면 사과드리죠.”
“아닙니다, 사과는요. 그럼 편히 즐기시지요.”
츠르센은 그제야 케이언을 자유로이 놓아주었다.
“예. 그럼 이만.”
정중히 인사하고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츠르센의 표정이 싸늘히 굳는다.
건방진 새끼.
명예를 중히 여기는 척은.
그의 콧대 높은 태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잠깐의 비위를 맞추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흰 사자만 제거된다면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을 테니.
어쨌거나 이제 레트로이나 6검도 왔겠다, 한시름 덜어도 될 듯하다.
그는 뱀처럼 기다란 미소를 지으며 레드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곧 땅바닥에 굴러떨어질 흰 사자의 목을 자축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