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제138화 정체 (3)
그랜드 소드 마스터?
“그게 뭐냐.”
내 물음에 알렌이 머쓱한 듯 머리를 긁었다.
“소드 마스터 위의 경지를 표현할 명칭이 따로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한번 만들어 봤습니다. 어때요? 멋지죠?”
“나쁘지는 않네.”
대화를 들은 리포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요? 농담이라면 당장 때려치우쇼.”
“농담할 생각은 없고, 그리 알고 있으면 된다.”
어차피 이자의 이해와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이들의 도움이 필요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니.
내가 작렬하는 태양을 찾은 것은 이들의 본부가 트레왈로가와 가까워서이기도 하지만, 독립군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서였다.
프렌치아 임시정부의 상징적인 존재인 흰 사자가 작렬하는 태양을 찾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하나의 세력이 되었다는 게 마음속에 확 와닿을 테니까.
자의에서 우러나와 한 일은 아니고, 레이크의 뜻을 따라 준 거기는 하지만.
“……미치겠군.”
리포드는 머리를 벅벅 긁고는 생각하는 게 귀찮은지 말을 툭 내뱉었다.
“뭐 어쨌거나 이길 수 있다는 거 아니요.”
“그래.”
“마음대로 하시오. 어차피 말린다고 해도 듣지도 않을 성격인 거 같은데.”
녀석이 말을 이었다.
“그럼 뭐 딱히 할 이야기도 없겠네. 저녁에 거하게 한잔 준비할까 하는데, 다들 괜찮소?”
“물론.”
물어 뭐 하나.
무조건 좋지.
내게서 긍정의 대답이 떨어지자 녀석은 우물쭈물하며 슬며시 입을 열었다.
“뭐, 그리고 말이오. 내가 딱히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려고 하는 말은 아닌데, 그래도 당신이 알아두긴 해야 할 거 같아서. 스티스시에서 말이오.”
“알고 있다.”
“뭔 줄 알고?”
“너희들이 한 일을 말하려는 게 아니냐.”
리포드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몸을 움찔거렸다.
“얼음 장벽을 세워 준 게 우리란 걸 알고 있단 말이오?”
“그래.”
“어떻게?”
“봤으니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얌전히 앉아 있던 레이나가 리포드의 팔뚝을 찰지게 때렸다.
“이봐요! 제가 눈 마주쳤었다고 했잖아요! 맞죠? 그런 거죠?”
“그래.”
“이봐요! 이봐요!”
흥분한 레이나가 리포드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려 대며 호들갑을 떨었다. 리포드는 몸을 움츠리며 본인의 팔뚝을 쓸어 댔다.
“아주 패 죽여라!”
레이나는 그제야 본인이 너무 흥분한 걸 알았는지 짐짓 시치미를 떼며 안경을 바로 썼다.
이제 와서 차분한 척해 봐야 한참은 늦었지만.
그녀도 그걸 알고 있는지 얼굴을 벌겋게 붉히고 있었다.
“저, 저도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사르페가 조심스레 말문을 뗐다.
그는 내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안 된다.”
“예?”
어벙한 표정의 그를 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말이 모두 끝났으면 그럼 이만 일어나지.”
“아니, 아직 하나 남았소!”
리포드가 나를 다급히 붙잡았다.
“이미 많이 들어 본 얘기일 거 같아서 좀 그런데, 도저히 궁금해서 못 참겠군. 대체 어떻게 그 나이에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던 거요?”
그의 말대로 어딜 가든 듣는 질문이었다.
때문에 쉬이 답할 수 있었다.
“알 거 없다.”
* * *
작렬하는 태양에서 준비해 준 방으로 들어오자, 알렌과 이리엘이 내 뒤를 쪼르르 따라 들어왔다.
“안 나가?”
내 으름장에도 알렌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꺼냈다.
“잠시만요. 문득 제네스 님한테 궁금한 게 생겨서요.”
이제 와서 무슨.
“제가 매번 묻는다, 묻는다, 해 놓고 까먹었었거든요.”
“뭔데.”
“남들한테 제네스 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듣던 질문인데, 다음 날에 술에서 깨면 그대로 까먹었지 뭐예요.”
“본론이나 말해.”
“예. 그게 제네스 님, 정확한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알렌의 물음에, 이리엘도 옆에서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하긴, 한 번도 정확한 나이를 말해 준 적이 없기는 하다.
굳이 말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갑자기 나이는 왜.”
“그냥 불현듯 궁금해서요. 아니, 아무리 천재라도 어떻게 그 나이에 그렇게 강해질 수 있냐는 거죠. 지금껏 그냥 제네스 님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있기는 했지만, 도저히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맞아요! 제가 인생을 허투루 살아서 약한 게 아니라구요!”
이리엘도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그 의견에 동조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봐 봐요. 아무리 제네스 님이라도 태어나서부터 검을 잡지는 않았을 거 아녜요. 젖병도 잡아야 하고 걸음마도 떼야 하고. 그러니까 그때부터 검을 잡았어도 길어야 20여 년을 휘둘렀을 텐데, 어떻게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되냐구요.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안 되기는 한다.
고작 46살에 이 경지에 오른 것도 믿기지 않는 일이니까. 그런데 녀석들은 나를 20대 중후반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니 더더욱 말이 안 되겠지.
“내가 몇 살로 보이는데.”
“스물여섯? 일곱쯤으로 보이기는 하는데요.”
알렌이 말했다. 이리엘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도 스물아홉은 되지 않을까요? 서른은 안 돼 보이고.”
나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그런 나를 보았다.
내가 말했다.
“마흔여섯.”
“네에에에?!”
두 녀석은 턱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입을 쩍 벌리며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비명을 질렀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십니까!”
“잠깐만. 그럼 네더만 씨랑 동년배라구요?!”
이것들이 누가 귀먹은 줄 아나.
“말도 안 됩니다! 거짓말이시죠? 제네스 님이 저보다 형님이시라니요. 그것도 한참이나. 말이 됩니까? 저는 제네스 님을 항상 동생처럼 여기고 있었다고요.”
대체 언제? 어느 순간에?
나는 한 번도 알렌의 동생이었던 적이 없었다.
녀석은 그럼에도 내 나이가 어처구니가 없는지 혼잣말을 폭포수처럼 쏟아 냈다.
“제가 그래서 제네스 님이 괴팍하게 굴고 못되게 굴고 구박해도, 조금이라도 나이 먹은 내가 참아야지, 하고 불만을 삼킨 게 얼마인데요! 그런 제네스 님이 저보다 나이가 많다는 게 말이 됩니까!”
녀석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주먹이 절로 스르륵 쥐어진다. 이리엘이 넋을 놓은 사람처럼 옆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 냈다.
“하하…… 거짓말이죠? 저 다 알아요. 깜박 속아 넘어갈 뻔했네. 저희가 바보인 줄 아세요?”
왜 그렇게까지 내 나이를 부정하는 건데?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굳이 억지로 설득할 이유는 없었다.
“마음대로 생각해라.”
내가 나이를 증명할 방도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을 말해도 안 믿으니 방도가 있나. 어차피 중요한 문제도 아니니.
이리엘은 내 말을 멋대로 오해하고는 입술을 댓 발 내밀며 말했다.
“진짜 사람이 왜 그래요? 말하기 싫으면 말하기 싫다고 하면 되지. 설마 저보다 어린 건 아니죠? 그래서 말 못 한 거예요? 그런 거죠? 하하하!”
이리엘은 드디어 해답을 찾았다는 듯이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너보다 어린 나이로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올랐겠냐?”
“아-.”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내 나이를 궁금해했던 이유를 깨달은 듯했다.
잠시 미간을 좁힌 그녀는 끝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쨌거나 알았어요.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마세요. 어차피 나이를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와중에 알렌은 사뭇 진지한 태도로 나를 불렀다.
“제네스 님.”
표정만 보면 큰일이라도 하나 저지를 기세다.
“저랑 약속 하나만 해 주시겠습니까.”
“무슨 약속.”
“제가 제네스 님의 정체를 맞혀도, 절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이요.”
또 뭔 개소리를 하려고 이러는 건지.
나는 풀었던 주먹을 다시 슬며시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제네스 님…….”
끝말을 먹고 한참을 뜸들이던 녀석은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드래-.”
빡!
“끄악!”
* * *
낙엽 사이로 햇볕이 부서져 내리는 숲길가.
남부로 향하고 있던 루시안 일행은 그 길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네더만이 육포를 뜯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그 녀석 어쩌려나. 레트로이나 6검이 왔다는데, 뭐 추가적인 조치라도 취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는 언제나처럼 무표정인 레이크를 바라보았다.
이런 쪽으로는 녀석이 머리를 잘 굴리지 않나.
녀석 또한 레트로이나 6검이 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거였다.
레이크가 말했다.
“제네스 님이 알아서 잘 하실 겁니다.”
네더만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 무심한 녀석은 레트로이나 6검을 무슨 동네 기사단쯤으로 취급하고 있다.
“상한 육포라도 먹은 겐가? 다른 녀석들도 아니고 레트로이나라고. 아무리 그 자식이 더러운 성깔만큼이나 강하다지만, 혼자서는 무리야. 소드 마스터라도 한계가 있는 법일세.”
네더만의 말에, 루시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누가 그 녀석이 소드 마스터라던가요?”
“자네도 상한 육포를 같이 먹었나 보군. 상한 육포가 머리에 안 좋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 봤지만 말이야. 그래도 내 육포는 멀쩡한 것 같네. 아니면 나만 상한 건가?”
자신과 달리 태평한 그들을 보며 네더만은 먹던 육포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루시안은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제 것도 멀쩡합니다만.”
“그건 다행이군. 그럼 녀석이 소드 마스터가 아니고 뭔가? 성격 파탄자?”
네더만은 혼자 픽 웃으며 가죽 주머니에 담긴 물을 마셨다.
루시안이 말했다.
“그 위입니다.”
“푸훕!”
네더만은 마시던 물을 그대로 허공에 뿜어 댔다.
“뭐, 뭣?”
그는 황급히 입가를 닦으며 어벙한 표정으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 그 위라니.
그 무슨 지나가던 코흘리개도 안 믿을 말인가.
루시안은 네더만의 황당한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자기가 그러더군요. 소드 마스터보다 위라고.”
“……그걸 믿는다고?”
“못 믿을 건 없지 않습니까. 거짓말을 하는 녀석도 아니고.”
네더만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루시안의 말마따나 괜한 허세를 부릴 놈은 아니다. 허세로 말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었고.
하지만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기나긴 대륙의 역사 동안 검의 정점이라 일컬어지던 소드 마스터 위로도 경지가 있다니.
평생 검을 쥔 자로서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아주 가만히 생각해 보면 확실히 이상한 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녀석이 벌인 일을 돌이켜 보면,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버거운 일들을 벌여 오기는 했다.
스티스시에서 로드르 헤이어서를 구출했던 일이나, 홀로 총독부를 뚫었던 일이나.
또, 소드 마스터 경지에 이르렀던 할렌트마저 압도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진짜 이상한 점은 그 지점이 아니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녀석은, 별다른 위기를 겪지 않고 해냈다.
별다른 상처 하나 입지 않았지.
그저 소드 마스터라 그러겠거니 해 왔지만, 잘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조금의 의구심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소드 마스터를 초월한 경지가 있다는 생각을 꿈에서도 해 보지 못했던 까닭.
……이 개자식.
진짜 소드 마스터마저 초월한 건가.
툭.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네더만은 손에 쥐고 있던 육포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는 루시안과 레이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말이 돼?”
상황을 놓고 봤을 때는 그럴싸한데,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루시안은 그런 네더만을 보고 그저 웃을 뿐이었다. 하나, 네더만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 나이에 그게 말이 되냐고…….”
새파랗게 어린 놈이었다.
검을 휘두르며 수련하는 꼴은 한 번도 보지도 못했다. 물론 자신도 여정 중에 수련한 적은 없었다. 뭐, 어느 경지에 오르면 백날 검을 휘두른다고 해서 실력이 늘지는 않는다만.
어쨌거나.
대략적으로 계산해도 자신의 3분의 2 정도 살았을 녀석이 소드 마스터마저 넘어섰다니.
소드 마스터라는 것만으로도 배 아파 죽겠는데.
그것마저도 초월했다니!
자신이 헛산 게 아니었다.
물론 술 퍼먹고 도박을 즐기며 허투루 쓴 시간도 많기는 한데.
어쨌거나.
이건 재능의 차이라고 하기에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무지막지한 놈이 어떻게 마른하늘에서 뚝 떨어진단 말…….
일순,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벼락같은 영감이 있었다.
“하. 이거 왠지 느낌이 오는데.”
네더만은 뭔가 알아냈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루시안이 물었다.
“무슨 느낌이요?”
네더만은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이 안 되지 않은가. 그 나이에 그 경지에 이른 것도 그렇고. 그런 괴물 같은 놈이 어느 날 갑자기 프렌치아에 뚝 떨어진 것도 그렇고. 어쩐지 그 성격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고.”
“그렇기는 하죠.”
“그 자식.”
네더만은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눈빛으로 둘을 훑었다.
“드래곤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