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제137화 정체 (2)
나는 헐레벌떡 방을 찾아온 이들을 보았다.
“표정들이 왜 그래.”
알렌이야 문을 벌컥 연 죄로 머리통을 부여잡고 있다지만, 이리엘 또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네스 님…… 큰일 났습니다.”
알렌이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표정이 참으로 볼만했다. 시장통에서 부모의 손을 놓친 애 같은 얼굴이다. 이리엘도 옆에서 청승을 떨었다.
“이번에는 정말 심각해요…….”
이것들이 단체로 왜 이래?
“뭔데.”
내 물음에 알렌은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여기서 누가 듣는다고 저러는지.
“제국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제네스 님을 노리고 있다고요!”
“그런데.”
“듣고 놀라지 마십시오.”
대체 뭔 말을 하려고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무엇을 들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레트로이나 6검이 프렌치아에 왔답니다.”
역시나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예? 그런데라뇨!”
알렌이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발작하며 나를 쏘아 보았다. 내 무심한 반응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듯했다. 이리엘은 나를 보며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다.
“설마, 레트로이나 6검이 뭔지 모르는 거 아녜요?”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내가 세자일 때도 제국의 자존심으로 유명했던 자들이다.
단원의 교체는 있었을지언정, 그들이 가지는 명예와 무게는 달라지지 않았을 터.
“에효.”
알렌은 내가 모른다고 확신을 했는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제네스 님도 참. 어떻게 그들을 모르실 수가 있으세요. 이건 지나가는 애를 잡고 물어봐도 다 아는 상식이라고요. 상-.”
빡!
“끄악!”
조금 전에 맞은 데를 또 맞은 알렌이 머리통을 부여잡으며 흰자위에 핏대를 세웠다. 나는 쪼그려 앉아 고통을 삭이는 그를 핀잔했다.
“그들이 누군지는 알고 있다.”
“웬일이래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리엘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그들이 지금 흰 사자에게 생사결을 신청했대요!”
“생사결?”
“네. 장소와 시간도 벌써 공표했더라니까요! 들어 보니까, 트레왈로가 쪽에서 움직이는 것 같아요. 둘이 한패를 먹은 게 분명하다구요!”
그들의 의도는 대충 예상이 간다. 트레왈로가를 보호하면서 나를 도망치지 못하게 발목을 붙들려는 속셈인가 본데.
“잘됐네.”
“대체 어디가요?”
알렌이 몸을 일으키며 황당한 눈길을 보냈다.
아직 덜 맞았나 보네.
나는 녀석의 불손한 눈빛을 넓은 아량으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죽여 달라고 시간과 장소까지 잡아 놨는데, 나야 편하지.”
“레트로이나 6검이 누군지 진짜 아는 거 맞으세요?”
“물론.”
“제네스 님, 이번에는 지금까지와는 달라요.”
이 녀석은 잊을 만하면 저 소리다.
“지금까지와 같을 거다.”
“아뇨. 이번에는 진짜 다르다니까요.”
알렌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들은 소드 마스터도 이길 수 있는 전력이라구요!”
“알고 있다.”
제국의 자존심이라고 불리는 특임기사단.
그들은 익스퍼트 최상급의 끝자락에 붙어 있는 놈들로 구성된 기사단이었다.
소드 마스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자들.
하나, 그 한 걸음의 차이는 누구나 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들 여섯이면 소드 마스터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할 거다. 단순히 최상급에 이른 자들만은 아니었으니까.
“아시는 분이 왜 그러세요. 제네스 님이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그들을 혼자서 감당하실 수는 없으실 거라구요!”
이리엘도 옆에서 말을 거들고 나섰다.
“알렌 형님 말이 맞아요. 이번에는 진짜 무리예요. 간단히 네더만 씨가 여섯 명 있다고 생각해 봐요.”
“아니, 네더만보다 더 강할 거다. 그 녀석은 아직 극의에 이르지 못했으니.”
이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겠죠?”
“아까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반응이 왜 그래요.”
이들이 왜 이러는지 알고 있었다.
골려 먹는 맛이 있어 놓아뒀을 뿐.
둘은 나를 보며 답답해 죽으려는 표정이었다.
소드 마스터를 넘어서는 전력이 오는데, 소드 마스터인 내가 천하태평이니 그럴 만도 하지.
그런데.
“내가 소드 마스터라고 누가 그러든.”
“그럼 아니라는 거예요?”
이리엘이 어이가 없다는 시선을 던졌다.
“그래. 난 소드 마스터가 아니다.”
“예?”
두 녀석의 고개가 동시에 기울어졌다. 두 눈에는 물음표를 담은 채였다.
알렌이 멍청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뭔데요?”
“그보다 위.”
?!
두 녀석은 입을 쩍 벌린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
조각상처럼 굳어 있던 알렌은 미간을 좁히며 더욱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녀석의 진중한 표정에 슬며시 주먹을 쥐었다.
“제네스 님. 혹시 머리를 다치-.”
빡!
“끄악!”
* * *
뜨거운 용병단의 단장실.
의자에 늘어지게 앉은 리포드는 언제나처럼 책상 위에 다리를 꼬아 얹어 놓고 궐련을 뻐끔뻐끔 펴 대고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온 이는 레이나였다.
그녀는 안경을 올리며 눈을 날카로이 떴다.
“팔자 늘어지셨네요.”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그냥 꼴 보기 싫어서요.”
“…….”
리포드는 황당한 눈길로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농담이에요.”
그는 궐련을 비벼 끄며 자리에 바로 앉으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냥요. 흰 사자가 언제 오나 다들 궁금해하고 있어요.”
“낸들 알까. 그래도 곧 올 때가 되지 않았어?”
“네. 슬슬 도착할 거 같아요.”
“아주 잔뜩 신났군.”
레이나의 눈동자는 자신을 바라볼 때와 달리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하긴, 자신도 흰 사자의 얼굴이 궁금하기는 하다.
대체 어떤 자이려나.
네더만의 말만 들었을 때는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떠오르기는 하다만.
“애들도 난리겠다?”
“예. 사르페는 아까 낮잠 자면서 잠꼬대까지 하던데요.”
“하여간.”
리포드는 픽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나, 이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자신도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그 흰 사자다.
꺼져 가던 독립의 열망에 단숨에 불을 붙인 자.
또 그것을 눈앞의 현실로 끌어당기고 있는 자.
그가 수도 마그네트에 프렌치아 국기를 걸었다는 이야기는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다.
하지만 속이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제국 새끼들.”
성질이 뻗친 리포드는 새 궐련을 다시금 찾아 들었다. 그가 어느 부분에서 꼭지가 돌았는지 알고 있던 레이나가 입을 열었다.
“레트로이나 6검이라면, 아무리 흰 사자라도 무리예요. 그 또한 본인의 역량의 한계를 잘 알고 있을 테죠.”
리포드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궐련에 불을 붙였다. 그러곤 연기를 후 뱉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우리가 기쁨을 누릴 틈을 안 주는군. 제국이 그 정도로 프렌치아에 신경을 쓰고 있었을 줄이야. 그나저나 어떻게 하려나.”
흰 사자의 선택이 궁금했다.
그들의 공표를 뒤로하고 도망친다면, 그 순간부터 상황이 수월하게 흘러가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공표했던 트레왈로가가 아닌 다른 가문을 급습하는 것밖에 답이 없을 거 같기는 한데.
레이나가 말했다.
“아무리 그라도 별다른 방도는 없을 거예요.”
“그렇겠지.”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혼자서는 그들을 넘어설 수 없다. 그래도 자신과 용 사냥꾼에 카드론 후작, 그리고 아직 합병은 되지 않았지만 혁명의 칼의 수장인 검은 유성까지 합세하면 승산은 충분하다.
그러니 고작 한발 물러서는 것 가지고 호들갑 떨 필요는 없었다.
문이 벌컥 열린 건 그때였다.
불쑥 모습을 드러낸 사르페가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대장!”
“뭔데 또.”
“흰 사자 일행이 도착했답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눈망울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초롱초롱하다. 누가 보면 몇 년 동안 떨어져 있던 가족이라도 상봉하는 줄 알겠네. 리포드는 궐련을 비벼 끄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가 보자고.”
* * *
뜨거운 용병단에 도창한 우리는 접견실에 와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들의 면면을 유심히 보았다.
스티스시에서 보았던 이들이다.
“먼 길 오느라 고생들 많았소. 그런데 흰 사자는?”
가운데 선 알렌보다도 더 푸짐하게 생긴 녀석이 우리를 훑었다. 이미 몇 번 겪은 상황이기에 알렌이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이분이 흰 사자입니다.”
“에에?!”
세 녀석은 동시에 눈을 번쩍 뜨며 나에게 홱, 시선을 모았다.
“다, 당신이 흰 사자?”
“앉아라. 고개 아프다.”
내 말에, 그들은 내게 시선을 둔 그대로 의자를 더듬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리포드라고 하오. 이쪽은-.”
리포드가 자신과 동료들을 소개했고, 우리 또한 짧게 이름을 말했다.
“이리엘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리엘이 자신을 소개하자 그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당신이군, 저하의 여동생. 그럼 공주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이리엘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뇨. 그냥 이리엘이라고 불러 주세요.”
녀석이 지칭한 저하는 루시안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벌써 저하라니.
단순한 합병을 넘어 녀석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듯했다.
합병에 관해 이야기하던 루시안의 확고한 눈빛이 떠오른다.
괜히 자신감을 보인 건 아니었군.
리포드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 일단 그렇게 호칭을 정리하고. 그나저나 흰 사자가 이렇게 젊은 청년일 줄이야.”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궐련을 한 대 꺼내 들었다.
“궐련 좀 피우겠소. 내가 이거 없으면 죽는 사람이라.”
그가 궐련을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는 순간, 나는 검지를 수평으로 까딱 움직이는 것으로 궐련 끝을 잘라 버렸다.
“…….”
잘려 나간 궐련을 본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냄새난다.”
“……나 이거 없으면 죽는 사람인데?”
“걱정 마라. 그걸 펴도 죽을 테니.”
“과연 듣던 대로 무시무시하군.”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잘린 궐련을 빈 재떨이에 버렸다.
“용 사냥꾼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었소. 그 말을 듣고 꼬장꼬장한 노인네를 떠올렸었는데, 이렇게 젊을 줄이야.”
아무래도 네더만이 내 이야기를 했던 모양인데.
내 외모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을 안 한 듯했다.
일부러 그랬겠지.
하여간 쓸데없는 장난으로는 일등인 놈이다.
“뭐, 사담은 저녁에 술을 곁들이면서 하기로 하고. 일단 일 이야기부터 해 봅시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프렌치아에 레트로이나 6검이 온 것은 알고 있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작정이오.”
“어쩌기는. 초대를 받았으면 그에 응하는 게 도리지.”
리포드가 제 입술을 손으로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응하겠다라……. 뭐, 묘책이라도 있는 거요?”
“내 존재가 묘책이다.”
“……흠. 당신이 강한 건 알고 있소. 하나, 그들의 전력을 과소평가하는 듯한데. 그들은 소드 마스터를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는 제국의 검이요. 당신이 소드 마스터라도-.”
“누가 소드마스터라고 하더냐.”
“그럼 뭐 당신이 익스퍼트 최상급이란 말이오?”
리포드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 위다.”
“…….”
잠깐의 적막이 일었다.
세 녀석은 일전의 알렌과 이리엘처럼 입을 떡 벌린 채 굳어 있었다. 리포드가 벙찐 표정으로 제 옆에 앉은 레이나와 사르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금 내 귀 멀쩡한 거 맞지?”
“아마도요. 제 귀에도 분명 그렇게 들렸거든요.”
레이나가 안경을 고쳐 쓰며 난색을 표했고, 사르페는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흰 사자님은 소드 마스터 위의 경지란 말씀이신가요?”
“그래.”
이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자, 얌전히 있던 알렌이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다들 많이 놀라신 거 같군요.”
매도 먼저 맞은 놈이 낫다고.
알렌은 본인이 처음 들었을 때는 생각 않고 여유로운 척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유세를 부렸다.
하여간.
“조금 전 제네스 님이 말씀하셨듯, 제네스 님은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 그 위의 경지인-.”
녀석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환히 반짝거렸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