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제134화 작렬하는 태양 (1)
네더만은 여느 때와 같이 술병을 쥐고 접견실을 찾았다. 루시안과 레이크 또한 언제나처럼 그곳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루시안이 읽던 책에서 눈을 떼어 그를 보았다.
“오셨습니까.”
“그 지겨운 책을 한시도 놓지 않는군.”
“마찬가지 아닐까요?”
루시안의 시선은 네더만이 손에 쥔 술병에 닿아 있었다.
하긴 그렇군.
하나, 그는 여전히 루시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책과 술이 같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그는 의자를 끌어 풀썩 앉은 뒤 놀란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술을 들이켰다.
“오늘도 별다른 소식 없었나.”
“예. 아직 없네요.”
“하, 참.”
기가 막혀 콧방귀가 절로 튀어나왔다.
“나야 이리저리 놀러 다녀서 좋기는 한데, 자네들은 괜찮나.”
루시안은 다시금 책을 들어 보였다.
“빌어먹을.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있는 거군. 거, 어떤 놈인지 참으로 궁금하네. 황금으로 얼굴을 빚었나. 바쁜 척은.”
작렬하는 태양의 본부에 도착한 지도 어느새 일주일. 하지만 이곳의 수장이란 놈의 얼굴은 아직까지도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할 일이 많단다.
바빠 죽겠단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뭐, 협상 전에 줄다리기를 해 보겠다는 건 알겠다만,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녀석의 수작은 빤했다.
합병 협상을 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해 보려는 작정이겠지.
너무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미X놈이 어딨겠는가.
네더만이 불만을 터트리자, 루시안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슬슬 오겠죠.”
“어째 나보다 더 느긋하군.”
자신이야 늦게 올수록 좋았다.
이렇게 늘어지게 놀 수 있어서.
그런데 두 녀석 또한 불편한 기색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접견실에서 기다리라는 한마디만 툭 던져 놓고 일주일째 깜깜무소식인데도.
이러고 있다가 해가 지면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일상이 반복되고 있었다.
웬만한 이는 이미 꼭지가 돌아서 깽판을 치고 남았을 터.
하다못해 지나가는 이를 붙잡고 수장을 데리고 오라고 호통이라도 쳤겠지.
하지만 이 녀석은 오늘 처음 온 사람처럼 평온하다.
“방법이 있겠습니까. 올 때까지 기다려야죠.”
그러니 이런 태평한 소리나 늘어놓고 있지.
“이럴 때는 제네스 그 자식이 보고 싶구만. 그 녀석이라면 수장의 멱살이라도 붙잡아 자리에 앉혔을 테니. 1시간은 기다렸으려나.”
“1시간도 안 기다렸을 거 같은데요.”
언제나 짧고 간결한 본론만을 찾는 녀석에게는 30분도 길 터였다.
“하긴. 그 자식 성격에는 1시간도 길지.”
“그래서 제가 왔지요.”
루시안이 씩 웃자, 네더만은 그 의미를 짐작하며 말했다.
“기다리는 게 낫다?”
“그럼요.”
“저 목석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서는 아닐 테고.”
지금까지 프렌치아 전도만을 바라보고 있던 레이크가 고개를 들었다.
“레이크입니다.”
“호오. 목석이 말도 할 줄 알다니. 이거 정말이지 놀라운 일 아닌가? 이 놀라운 사실을 전하면 수장이란 녀석도 당장에 뛰쳐나오지 않겠나.”
“목석 아니고 사람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꽉 막혀서야. 농담 따먹기도 못 하겠군.”
“저도 농담을 할 줄은 압니다.”
레이크의 말에 네더만은 눈을 반개하며 흥미를 보였다.
“참말인가.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자네에게 인간의 냄새를 맡지 못했거늘. 그런 자네가 농담을 할 수 있다니.”
네더만은 함께 했던 일정을 떠올렸다.
정말이지 말을 걸지 않으면 한마디도 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쉴 새 없이 조잘거리던 알렌과 이리엘이 보고 싶을 지경.
그 녀석들은 놀리는 맛이 제법 있었는데.
이건 영.
그나마 루시안이 말 상대를 해 줘서 다행이지.
어떤 면에서 레이크는 제네스보다 상종 못 할 녀석이었다.
그놈은 성격은 더러워도 술도 즐길 줄 알고 어느 정도 대화는 되니까.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수시로 검을 뽑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 나온 김에 해 보게. 가벼운 농담이라도 좋네.”
“할 기분이 아닙니다.”
“퐈하.”
힘이 빠진 네더만은 고개를 내저었다.
“기대한 내가 바보지.”
“농담이었습니다만.”
“응? 대체 어디가?”
“할 기분이 아니라는 지점이요.”
아. 그 지점이었어?
네더만은 레이크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걸 농담이라고 하다니. 자네 나한테 말하는 기술을 배워 볼 생각 없나? 내 장담하지, 한 달만 지나도 말하는 재미를 알게 될 걸세. 어때, 나처럼 유쾌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여자들도 줄줄이 따를 거라고.”
“별로 되고 싶지 않군요.”
“농담이지?”
“진담입니다.”
네더만은 루시안을 보며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돌아와 본론을 물었다.
“그래서 계속 기다릴 생각인가?”
“예.”
“안 오면 어쩌려고?”
“네더만 씨는 저들이 왜 이런다고 생각합니까.”
“뭐, 기 싸움을 벌이고자 하는 거겠지.”
“저희 쪽 입장을 배제하고 그쪽만의 시선으로 지금 상황을 한번 바라볼까요? 네 개로 나뉘어 있던 세력 중 두 곳이 하나로 합병했습니다. 그리고 그 세력의 수장이라는 자가 합병을 요청하러 왔죠. 그들과 저희 세력의 크기는 이미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렇지.”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합병은 어떤 의미일까요?”
“고개를 숙이고 밑으로 들어오라는 일 같겠군.”
“네. 그럴 겁니다.”
루시안의 말대로 현재 두 개의 세력은 비등한 힘을 가진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루시안이란 존재는 본인들의 세력을 압박하는 존재로 다가올 터.
“그러니 이런 식으로 힘의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궁금하기도 할 테죠. 프렌치아 임시정부의 수장인 사람이 말이죠. 그러니 지금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중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이야기를 듣는 중이라…….”
네더만은 검지를 까닥이며 잠시 생겼다.
그러곤 이내 술병을 들이켰다.
대체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
생각하기도 귀찮았다. 그냥 녀석들의 투정을 받아 주고 있구나, 라고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가만 보면 루시안은 참 신기한 녀석이었다.
매번 여유롭게 허허거리며 지나가는 듯하지만, 뭐 하나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
까탈스러운 완벽주의자도 아니고 그냥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것처럼 맥없이 흐르는데도 그 흐름이 고고하다.
마치 하늘 아래서 굽어보는 것처럼.
그것은 기묘한 감정이었다.
무언가 초탈한 인간을 보는 기분이랄까.
저 녀석도 화를 낼까 궁금해질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왠지 그의 옆은 편안하다.
광활한 바다를 앞에 둔 것처럼.
그래서 네더만은 한번 삐뚤어져 보기로 했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 일정이 그렇게 넉넉한 건 아닐 텐데.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어도 되겠나.”
“그 부분은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됐거든요.”
“에? 진짜?”
“네. 저들도 저희를 하염없이 기다리게 하는 건 부담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례가 중첩될수록 심적 부담이 쌓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저희는 오래 기다렸습니다. 그러니 협상이 어긋난다면 오히려 난감해지는 건 그쪽이죠.”
“아. 과연 그렇겠군.”
일주일간 반복된 무례.
그것은 두 세력의 관계에 부정적인 감정을 쌓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현재 프렌치아 임시정부 소속의 흰 사자의 명성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대외적인 명분은 자신들 쪽이 훨씬 유리한 상황.
그런 자신들에게 작렬하는 태양은 무례를 범했다.
만약 이 합병이 실패하거나, 그 과정에서 그들이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그들을 후원하고 있을 이들에게도 좋은 모습으로 비추어지지 않을 터.
아마 나라의 독립보다 제 밥그릇을 챙기는 것처럼 보이겠지.
그러니 오히려 이 무례는 본인들의 발목에 무거운 족쇄를 달게 하는 형국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렇게 나온다는 건.
합병의 의지가 있다는 방증이기도 할 터.
하여간.
삐뚤어지는 것도 똑똑한 놈들이나 할 짓이다.
네더만은 그냥 술이나 마시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루시안의 예상대로 작렬하는 태양의 수장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들 하시오. 이거 내가 너무 늦었군. 미안하오. 일이 워낙 바빠서.”
좋게 말하면 풍채가 좋은, 다르게 말하면 널따랗게 퍼진 사내였다.
저자가, 인간 성벽.
네더만은 그를 보며 눈빛을 빛냈다.
왠지 그 얼굴이 익숙한 탓.
그 옆으로 안경 쓴 여인과 입가에 작은 검상이 있는 사내가 따르고 있었다.
인원이라도 맞춰 온 건가.
두 세력은 가운데 직사각형의 테이블을 놓고 양측으로 나뉘어 앉았다.
루시안이 특유의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가 갑자기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반갑게 맞이해 주신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루시안이라고 합니다.”
반갑기는 무슨.
루시안은 그의 무례를 아예 없던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술 퍼먹고 논 자신도 입술이 절로 오므라지는데 말이지.
“리포드라고 하오. 인간 성벽이라 불리고 있지.”
“예. 익히 들었습니다.”
“궐련 좀 피워도 되겠소? 내가 이거 없으면 죽는 사람이라.”
“그러시지요.”
리포드가 궐련에 성냥불을 붙이는 모습을 네더만은 빤히 바라보았다.
리포드라, 리포드.
이름을 들으니까 더 머릿속이 간질간질하다.
흠. 도박장에서 만났었나?
시커먼 사내자식이랑 엮일 연은 그거밖에 없는데.
리포드는 연기를 한차례 길게 뿜어내더니 말문을 열었다.
“서로 입장을 알고 있으니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말하는 게 좋지 않겠소.”
“공감하는 바입니다.”
“북부의 흰 사자가 굽이치는 해협과 합병하여, 프렌치아 임시정부를 건립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소.”
그는 의자에 늘어지게 기대며 루시안을 보았다.
“당신이 그곳의 수장이라고.”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 작렬하는 태양과도 합병하고 싶으시다.”
“예, 맞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결정할 문제가 있잖소.”
그는 삐딱한 태도로 시퍼런 안광을 토해 내며 말을 이었다.
“누가 왕이 될 것인지.”
합병의 과정에서 가장 예민한 문제이기도 했고,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독립군이 하나가 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과연, 누가 왕이 될 것인가.
협상의 시작부터 본론이었다.
“당연히.”
루시안은 언제나처럼 말간 미소를 지었다.
“제가 왕이 될 것입니다.”
* * *
하, 이 자식 봐라.
리포드는 태연하게 나오는 루시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모든 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듯한 태도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헤실거리는 그가 만만히 보였으나 만만히 볼 자가 아님을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과연, 합병한 세력의 수장이라 이건가.
무례를 대범하게 넘기는 것을 보고 뭔가 있나 싶기는 했지만, 자연스레 분위기를 장악하는 게 쉽게 볼 놈은 아닐 듯하다.
리포드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 보고 밑으로 들어와라?”
“정확히는 힘을 합치자는 이야기죠.”
“변죽은 좋소만, 결국 본인이 왕을 하고 우리는 그 밑에서 똥이나 닦으란 말 아니오.”
“그럼 리포드 씨는 누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당연히 나지!”
리포드는 당당히 제 엄지로 자신의 가슴팍을 짚었다.
“왜죠?”
“왜라니. 지난 10년간 내가 들러리나 하려고 이 고생을 한 줄 아쇼? 나는 와이번의 머리가 되면 됐지, 드래곤의 꼬리를 할 사람은 아니란 말이오.”
리포드는 제 포부를 낱낱이 밝혔다.
남의 똥이나 닦자고 여태 고생해 온 게 아니었다.
자신의 밑으로 달린 입들만 몇 개인데.
“그럼 드래곤의 꼬리가 되고 싶지 않아, 프렌치아의 왕이 되고 싶은 겁니까.”
“뭣이오?”
리포드는 눈썹을 비틀었다.
이자가 지금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루시안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말을 이었다.
“저는 이 나라 국민을 위해 왕이 되고자 합니다.”
“그럼 나는 내 사리사욕을 채우자고 왕이 되려는 사람이고, 당신은 국민을 위해 왕이 되고자 한다? 푸하하하! 말 한번 재밌게 하는군.”
“그럼 당신도 국민을 위해 왕이 되고자 합니까.”
쾅!
리포드는 책상을 내리치며 성을 냈다.
“그럼 내가 권력욕에 눈먼 사람인 줄 아쇼! 사람 한참 잘못 봤소! 나도 대의란 게 있는 사람이라고! 무슨 동네 양아치처럼 보고 있어!”
“그럼 답은 간단하군요. 우리 모두 국민을 위해 왕이 되고자 하니, 나라를 더 잘 다스릴 사람이 왕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자가 왕이 되는 게 국민에게도 나을 테니 말입니다.”
“뭐. 그래서 그게 당신이다?”
“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하는 루시안의 태도에 리포드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군.”
루시안이 계속해서 말했다.
“지금 국민에게 가장 시급한 건 나라의 독립 아니겠습니까. 독립이 되지 않는다면 저희들끼리 왕을 뽑을 이유도 없고요.”
“그래서?”
“당신이 왕이 된다면, 독립은 언제 가능합니까.”
“뭐, 당신은 현실적인 방안이 있기라도 하단 말이오?”
독립이 언제 가능하냐니.
어처구니가 없는 질문이었다.
구체적인 일정을 말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니까.
그럴듯한 개소리야 누가 못 늘어놓을까.
하지만 현실적인 방안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10년간 프렌치아가 독립을 못 했을 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갈수록 독립에서 멀어지고 있었지.
근래 흰 사자의 등장으로 다시금 독립의 열망이 들끓고 있지만, 혼자 힘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
일례로 총독을 죽이면 뭣하나.
다음 총독이 떡하니 자리에 앉았는데.
아무리 날뛰어 봐야, 이 넓은 땅덩어리에 뿌리내린 놈들을 무슨 수로 다 쫓아낸단 말인가.
게다가 제국은 가만히 있고?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한세월이 걸릴 일이었다.
한계는 명백했다.
네 개의 독립군이 합병한다고 해도, 보다 강한 독립군이 될 뿐.
독립은 현 상황에서 쉽게 장담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렇게 했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시간을 제시하면서.
“저희는 이번 겨울이 오기 전에 수도 마그네트를 수복하고 프렌치아의 독립을 선포할 예정입니다.”
그 말에, 궐련을 빨던 리포드는 연기를 기도로 넘겼다.